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9)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9)화(19/326)
그날 나는 드물게 날이 밝을 때 처소에 찾아온 생물학적 아비에게 엉겨들며 생각에 잠겼다.
“어허, 왜 이리 어깨 위로 올라가려는 게냐.”
“우어.”
올라갈 만해서 올라가는 거지.
……하지만 싫어하는데 굳이 올라갈 필요도 없나.
잠깐 인상을 썼던 나는 올라가는 걸 멈추고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본인이 왜 올라가냐고 해 놓고 정작 안 올라가니 좀 서운한 표정을 한 생물학적 아비가 늘어져 있는 나를 안아 올렸다.
“이제 슬슬 말문이 트일 때도 되지 않았느냐?”
“흐으응.”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 내가 고개를 돌리고 생물학적 아비에게서 벗어나자 지켜보고 있던 언니가 송구한 듯 입을 열었다.
“내의원에서 의관이 다녀갔습니다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였으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언니는 가끔 둘만 있을 때 어설픈 발음으로 엄마라고 부를 때 외에는 입을 떼질 않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엄마 소리를 들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과거 왕자녀에게 스스로 어머니라 칭했다가 내쫓길 뻔한 후궁도 있었으니 겨우 총애를 받기 시작한 궁녀 출신 후궁이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화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서 아바마마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구나.”
좀 찔리는데?
아빠 소리를 하기 싫었던 나는 못 들은 척 두 사람을 외면했다.
그래, 슬슬 둘만의 시간을 주기로 하고…… 나는 나가자.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일단 왕의 총애는 궐내에서의 둘도 없는 무기였다.
지금은 내가 막내딸이라 총애를 받고 있지만 사실 앞날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자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나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웅.”
바이바이.
이대로 나가려고 문가에서 손을 흔들어 주자 생물학적 아비가 뜻밖의 말을 했다.
“모처럼 왔으니 함께 걸어도 좋겠구나.”
“우엑?”
“시아는 이 아비가 싫은 것이냐?”
“으흐응.”
나는 조금 생각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 썩 좋아하는 건 아닌데. 요즘 갑자기 좀 친한 척하는 거 같아서.
“세자가 시아와 조금 더 함께 있어 주라고 하더구나. 정작 본인은 정무를 익히는 데 바빠 보러 올 수가 없다고 말이다.”
“오.”
“그래 네 오라버니 말이다.”
생명의 은인 기특해.
‘걔도 아직 어리지 않던가.’
아직도 여기 사람들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하지만 나보다 어린 것은 분명했다.
어린애가 기특하게 신경도 써 줬다고 하니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족 놀이라도 해 볼까.
왕이라고 꽤 딱딱하게 구는 편이지만 이런 거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한 손에 한 명씩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 아기씨.”
“괜찮다. 시아가 자라면 언제 또 이리 잡고 걸어 보겠느냐.”
나 때문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기울이고 걷는 두 사람은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그나저나 어딜 간다? 딱히 갈 데가 있는 건 아니고…….
목적지도 없이 막무가내로 두 사람을 이끌며 걷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경원군이 연못에는 가지 말라고 했지.’
위험하다고.
그 말인즉슨, 경언군 그 썩을 놈이 연못에서 하면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생긴 것이냐?”
“응!”
나는 기억을 더듬어 한동안 가지 못했던 그 연못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또 뜻밖의 인물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전하!”
“영빈. 이곳에는 어쩐 일이오. 산책 중이었소?”
아니, 뜻밖의 조우가 아니었다.
‘왕이랑 우연히 만났으니 기뻐하든가, 나와 언니가 동행하고 있으니 은근히 불쾌한 시선을 보내든가 해야 하는데 왜 저렇게 불안해 보이지?’
영빈이 저렇게 동요할 일이라면 아무래도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경언군이 지금 연못에서 왕이랑 마주치면 안 될 만한 짓을 하고 있나?’
영빈과 만나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나의 손을 놓은 상태였다.
나는 영빈을 피하는 듯 두 사람의 뒤로 슬쩍 물러났다. 내가 영빈을 싫어한다는 건 이미 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수준이어서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영빈과의 대화에 다들 주의가 흐트러진 걸 틈타 후다닥 연못 쪽으로 달려 나갔다.
“아니, 시아야?”
“저, 전하. 신첩이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예상대로 영빈은 왕의 발을 붙잡았다.
언니 역시 왕과 영빈이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몸을 빼지는 못하고 발이 묶였다.
‘그리고…….’
뒤를 따르던 궁인들 중에 나를 따라오는 이가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려갔다.
‘연못 근처에서도 그놈이 자주 가는 곳은 대충 알 만하지.’
그날 이후 그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우리 쪽 궁녀들이 필사적으로 정보를 알아내서 공유하는 걸 들었다.
연못 근처에서 자주 그런 짓을 하는 모양이지.
아무래도 동물들이 자주 모여드는 곳이었고 일을 저지른 후 뒤처리를 하기도 좋아서일까나.
“으.”
이걸 빙고, 라고 해야 할지.
안쪽, 사람이 잘 오지 않을 만한 구석에서 경언군은 예상한 그대로, 작은 동물을 붙잡고 있었다.
‘일단 붙잡기만 하면 저 작은 동물을 어찌하는 건 어렵지도 않을 텐데 저렇게 괴롭힌다는 건 인성 문제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신음 소리를 들었는지 손에 잡혀 있는 동물에게 집중하고 있던 놈이 이쪽을 돌아본다.
그런데 눈가를 안대 같은 걸로 가리고 있다. 눈병이라도 걸렸나.
“너, 너 이년 잘 만났다. 그날,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아느냐?”
경언군이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눈가를 가리고 있던 천을 벗겨 냈다. 그러자 경언군의 얼굴, 정확히는 눈가의 시퍼런 멍 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거 때문에 요새 잘 안 돌아다녔나? 근데 왜 나 때문……. 아.’
좀 어둡기도 해서 잘 몰랐는데 그날 내가 집어던진 식혜 그릇이 저놈의 눈가에 직격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그날 비명 소리가 요란하다 했어.
나도 모르게 예이~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데 다행히 경언군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저런 작은 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데 마침 잘도 나타나 줬구나, 이번에야말로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그야말로 미친놈 같은 얼굴로 다가오는 경언군에게서 거리를 두며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까 슬쩍 보니 내관이 잘 따라왔던데.
‘하지만 과연 그 사람이 이 현장을 왕에게 제대로 전달해 줄까?’
세자가 나에게 붙인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긴 했는데 역시 좀 불안했다.
안 그래도 왕자가 저지른 짓들을 적당히 묻어 주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니고.
게다가 괴롭힘의 대상은 기껏해야 동물. 이 시대에서는 제대로 죄로 여기지도 않을 거다.
‘물론 우리 처소에 동물 사체를 투척한 범인이라는 심증이 굳어지겠지만 왕자에 어린아이이니 큰 벌은 받지 않고 넘어가겠지.’
그렇게 고민하는 나를 보고 겁을 먹었다 생각한 걸까.
경언군은 자신의 멍 자국을 쓰다듬으며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눈은 웃고 있지 않은데 입가는 찢어지도록 벌리고 있었다.
“감히 내게 이런 치욕을 줘?”
그거야 네가 뿌린 대로 거둔 게 아닐까…… 라고 하면 불에 기름을 붓는 셈이겠지.
거기다 제일 위험한 건 나고.
상대는 힘없는 작은 동물을 주로 괴롭히는 악랄한 놈이니까.
‘슬슬 누군가 나를 찾아올 텐데.’
여전히 뒤로 물러나며 내가 온 방향을 확인하니 마침 저 너머로 내관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익숙한, 왕의 뒤를 따르는 내관들 중 하나였다.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이라니. 하늘이 널 버린 모양인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감히 날 무시하는 게냐?”
“응.”
“이 천한 것이 감히……!”
경언군의 손이 내 멱살을 잡았다. 나이에 비해 잘 달리는 편이라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마스터한 어린 아기의 몸은 9살짜리 어린 소년의 손에 어렵지 않게 들어 올려졌다.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애들이 잘 먹어서 그런가 힘이 좋았다.
‘조금 위험한 도박을 해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건, 이렇게 들려 있으려니 그날 이놈이 했던 패드립이 떠오른 탓이었다.
“야.”
“뭐?”
“너 대군이라도 댈 꺼 같지? 안댔지만 니 어미는 중전 못 댈 꺼고, 당연히 너도 대군 못 댈걸.”
아직 잘 굴러가지 않는 혀로, 가능한 한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뭐……라는 거냐.”
“너도 결국 첩자식이라는 뜻이지. 이 천한 첩. 자. 식. 아.”
내가 생각해도 좀 불꽃 같은 패드립이었다.
근데, 선빵은 니가 때렸다?
간택 후궁이고 승은 후궁이고 그 자식이 세자가 못 되면 취급이 뭐 얼마나 다를 거 같아?
‘내가 죽어도 너 세자 되는 꼴은 못 보겠어서 좀 막아 보려고.’
라스트로,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몸이 빙글 돌며 내 몸은 공중에 떠올랐다.
오늘은 하늘도 맑은, 아주 좋은 날이었다.
“시아야!!”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거 혹시 경원군 목소리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모든 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풍덩!!
물소리 사이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는데 이게 정말 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빨리 구해 주지 않으면 곤란한데…….’
큰일이네.
저놈이 너무 세게 던졌나 봐.
수면에 제대로 부딪혔는지 몸이 아파…… 못 움직이겠어.
수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옷 때문에 몸도 무겁고…….
조금 참고 가만히 있으면 떠오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타격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끌고 들어가는 방향으로 생각해 볼걸.’
근데 그건 현실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무리 같지.
그런 후회에 잠겨 힘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무언가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강한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푸하!”
호흡이 편해지며 갑자기 조용하던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멍하니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목소리에 점점 가까워졌다.
“시, 시아야!”
“쿨럭, 쿨럭, 응?”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떠 보니 경원군이다.
얼굴이 젖어 있는 게 물이라도 튄 건가 했는데 아무리 봐도 저건 운 거 같다.
‘어휴, 어쩌냐. 이런 어린앨 울려 버렸네.’
널 낚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왜 이런 데 있고 그래.
날 안고 있던 팔이 나를 연못 밖으로 가볍게 들어 올리자 경원군이 나를 받아 안았다. 그제서야 나를 구해 준 이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작은 탄성을 흘렸다.
“아?”
“그래. 오라버니란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사람 붙였다더니 진짠가 봐.
오랜만에 보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콜록, 콜록.”
“시, 시아야?!”
“하우.”
물에 빠지며 숨을 참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잠겨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물을 먹어서 숨쉬기가 조금 괴로웠다.
기침하며 괴로워하는 나를 보는 잘생긴 형제를 보니 좀 미안해졌다.
기운 없는 팔을 들어 머리를 툭툭 두드리자 경원군은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시아야! 세자! 무사한 것이냐!”
고개를 돌리니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의 생물학적 아비와 언니가 보였다.
그리고 저 뒤쪽에 주저앉아 있는 경언군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굳은 얼굴로 한쪽 볼을 부여잡고 있었다.
“콜록, 콜록…… 하아.”
“시아야, 정신이 드느냐!”
“아…… 응…….”
뭔가, 좀 더 확인하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이들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놓여서, 안도와 함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 뭔가…… 피곤해.’
물속에서 허우적댄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나. 몸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내 고생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아 그거 하나는 안심이었다.
그럼 뒤는 어떻게든 해 주려나.
“……아……바…….”
“시아야?!”
나는 마지막까지 집념으로 생물학적 아비를 향해 손을 뻗으며 그대로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