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19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95화(195/326)
물론 아무리 똑똑해도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그리고 아이는 뜻밖의 말을 했다.
“공부는…… 좋아하지만, 다들 일하고 있는데 저만 편하게 공부만 할 수는 없어요.”
“흐음.”
의외다.
‘염치가 있는 아이네.’
나는 머리가 좋고 똑똑하니까 특별 취급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한 때인데.
사실 공부만 해서 시험 통과하고 관리되는 놈들 문제가 그런 식으로 염치가 없다는 데에 있다.
주변에서 공부하는 거 뒷바라지해 줘서 시험에 붙으면 이제 자기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해 준 사람은 무시하는 법이거든.
그나마 붙고서 그러면 양반일 정도로, 그저 시험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하기도 하고.
‘너무 공부만 하면 공감 능력이 부족해지는 걸까.’
시영원에서는 한 가지만 진득하니 파는 수업이 드물었다.
체력 단련을 위해 무예도 조금씩 배우고, 글도 최소한 한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는 배우고, 산법(算法)도 배우고, 산에서 채집하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그 외 살림하는 것도, 기회가 있다면 어릴 적부터 일하는 것도 조금씩 도와가며 배운다.
특정 분야에 특화된 재능이 뭐에 있을지 모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공부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인정받고 있는 분야는 의학 정도.
아이들이 아직 과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수준으로 어렵다고들 하니까.’
아마 이 아이도 그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겠지.
‘아이들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기는 한데.’
이걸 괜찮다고 밀어주자니 그것도 좀 그래.
성적이 좋은 아이는 장학금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지.
물론 세상에는 타고나기를 남들보다 뛰어나서 일할 거 다 하고 시험도 합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천재들이 흔하지도 않고. 세상을 그런 천재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다들 의욕만 사라질 뿐이었다.
‘학자금 대출 제도라도 만들어 볼까.’
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빚을 지는 제도를 선뜻 이용할 거 같지는 않았다. 과거 시험이라니, 언제 붙을지도 모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인 셈이니까.
사기당하지 말라고 내가 철저하게 교육한 탓인지 애들은 쉽게 모험을 택하지는 않았다.
‘물론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만…….’
나는 뒤쪽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는 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세자에게 타진해 온 바가 있었으니까.
내 뜻을 알아챈 듯 생각에 잠겨 있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리 공부를 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예?”
“물론 너뿐만이 아니라, 시영원과…… 학당에 있는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거다.”
‘흐음.’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는 당황한 듯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별말 없이 웃으며 뒤로 물러나자 경계를 푼 듯 세자의 말을 경청했다.
세자는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며 조건을 걸고 있었다.
소년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일체의 금전적 지원을 보장하지만 세자가 제시하는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무난하네.’
세자가 제시하는 조건에 이상한 내용은 없었다. 말하자면 지극히 건전한 학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우선은 세자가 후에 시험을 통해 학력이 어느 정도일지를 확인할 거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배울 만한 것들. 그리고 나라에 충성하고 친구와 우애 있게 지낼 것이며, 키우고 가르쳐 준 시영원 사람들을 존중할 것.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세자에게 물었다.
“선비님께서는 저에게 어찌 이런 기회를 주십니까?”
“너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다. 말했지 않으냐. 시영원에 있는 학생들 중 재능이 있는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지원될 거라고. 그래도 되겠느냐?”
세자는 그리 말하며 뒤에 빠져 있는 나에게 확인 절차를 거쳤다.
자세한 사항은 이래저래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저 정도로 합격이라고 해 주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지요. 오라버니.”
“!!”
내가 옹주라는 건 이제 알 만한 아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뭔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다가 생각보다 금방 진실에 도달하곤 했으니 저 아이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옹주인 내게 편히 말을 하며, 내가 오라버니라고 부를 만한 사람.
눈앞에 있는 청년의 정체를 눈치챈 아이들이 사색이 되어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으려 하자 세자가 이를 막았다.
“소란 피우지 말거라. 오라비가 누이동생을 돕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예. 예에.”
아이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을 보며 세자는 자애로운 미소로 아이들을 현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백성들을 보살피는 것 역시 당연할 일이 아니겠느냐.”
“!”
아이들의 얼굴에 감탄이 떠오른다.
잘한다. 이게 바로 정치인의 바른 덕목이지.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세자와 그런 세자를 바라보고 있는 세화를 관찰했다.
그리고 약간 감격과 감탄 모드인 세자의 측근들도.
속으로 ‘아앗, 역시 우리 세자 저하!’라고 감탄하고 있을지, 아니면 ‘저하, 애들 잘 꼬시네요…….’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무척 훈훈하고 바람직한 분위기였다.
‘그럼 나는 이제 슬슬 빠져 보실까.’
감격스러운 풍경이었으나 내 측근들은 세자가 아닌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기에 내가 눈짓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슬그머니 움직였다.
아이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세자가 알아서 하겠지.
‘나중에 나와 조율하더라도 결국 시영원 실무자들 의견도 반영해야 하니까.’
나는 여전히 유일하게 우리의 이탈을 눈치챈 세자의 호위에게 조용히 하라고 웃으며 신호를 보내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우릴 눈치챈 건 동궁 장학생이 될 예정인 꼬마 아이들이었지만, 내가 웃으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역시 모르는 척 세자에게 집중했다.
‘똑똑한 애가 눈치도 빠르니 장래가 촉망되는구나…….’
그렇게 나는 학부형 데이트 모드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오라비랑 같이 다니면 너무 사람이 많아서 번잡해.”
“아무래도 좀 그렇죠. 평소의 2배는 넘는 인원이 함께 돌아다니니까요.”
날 안아 든 천호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에게 들키지 않고 빨리 움직여야 하다 보니 천호가 다시 나를 안아 든 상태였다.
‘뭔가…… 아빠한테 안겨 다니는 딸 같군.’
거리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많다 보니 그런 묘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부분 나보다 작은 아이들이었지만.
부왕은 아직도 가끔 나를 어린 시절처럼 저렇게 안아 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왕족의 체면이 신경 쓰여 그리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한 열두어 살 무렵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안아 들었던 거 같기도 한데.’
슬슬 그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이제는 내가 무거워지는 것과 비례해 부왕도 점점 연세가 들어가니 힘들겠지만.
나는 문득 아버지에게 매달려 있는 아이들과 나의 사이즈를 비교해 보곤 천호에게 물었다.
“나 이제 좀 무겁지 않아?”
지난 몇 개월 사이 제법 자랐으니 이제 전보다는 꽤 무거울 텐데. 딱히 체중계로 몸무게를 재지는 않으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란 것은 사실이니 무거워졌을 게 분명했다.
내 걱정과는 달리 천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야 전보다야 조금 묵직해지신 것 같습니다만 아직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저 힘 세거든요? 제가 들지 못할 정도가 되시려면 한참 더 자라셔야지요.”
“이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직도 성장 중인 젊음에서 나오는 거려나.
나는 속으로 자문자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호도 분명 얼마 안 가서 무거워서 못 들겠다고 할걸?”
“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짐 덩어리 커플도 따돌렸겠다, 이제 좀 평범하게 연등 구경이나 하며 돌아다녀 볼까.
나는 헉헉거리며 천호의 뒤를, 정확히는 나를 따라온 소이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안타까워했다.
“생각해 보니 소이도 굳이 안 따라와도 되었을 텐데.”
“지금은 다른 일로 한양에 없는 가이 언니는 물론이고, 송비 언니까지 오…… 아가씨 뒤를 꼭 따라다니라고 신신당부하셨는걸요.”
그건 송비가 예전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가이는 지금 또 일 때문에 다른 곳에 가 있지만 도성에 있었다면 분명히 따라오지 않았을까.
사실 그날 일 때문인지, 궐 밖으로 자주 외유를 나오는 나나 가끔 미행을 나오는 세자도 딱히 사월초파일에 밖으로 나온 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역시 세화가 조금 걱정스러웠다.
나나 세자야 뭐 그래도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세화는 그날이 가족과 헤어진 날인데.
하지만 이걸 내가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세화의 아버지는 그 전에 사망했던가.’
이걸 다행이라고 하기고 그렇고.
“괜찮으십니까?”
“응? 아. 응. 연등이 많으니까 잠깐 멍해졌나 봐. 괜찮아.”
“피곤하시면 무리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내가 생각에 잠겨 너무 넋을 잃고 있었나 보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천호가 나를 안아 올린 채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미안하군.
‘천호는 어디 산골에서 살았다고 했으니 한양에서의 사월 초파일은 처음일 텐데.’
다른 지방도 딱히 행사를 안 하지는 않겠지만 역시 서울이 다르지 않겠는가.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고.
‘생각해 보니 나는 오히려 지방엘 안 가 봤네. 나중에 가 봐야지.’
조금 규모 있는 도시 하면 볼거리가 좀 있을 것 같았다. 지역마다 조금씩 특색도 있는 법이고.
모처럼 금수저로 태어났는데 시대에 맞춰 즐길 거리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지.
“출출하지 않으세요? 저기 약과도 팔고 있는데.”
“아, 먹을래.”
그러고 보니 그때는 지화랑 수천이에게 줄 감란전병도 들고 다니고, 돈이 될 만한 물건도 적당히 사 모으고 정신없었는데, 지금은 달리 들고 다니는 짐도 없고 해야 할 일이 없어 압박감도 없어 마음이 편했다.
세화와 세자도 따로 보냈고 이제 그냥 마음 편히 즐겨도 되려나.
“자, 여기 드세요.”
소이가 값을 치른 과자들은 내 입으로 들어왔다.
왕실에서 고급 음식만 먹고 산 고급 입맛에는 안 맞을 것 같지만 이런 길거리 음식은 길거리 음식대로 나름의 맛이 있는 법이었다.
“천호도 나 내려 주고 좀 먹어.”
“하아. 너무 자라고 있어서 이제 좀 덜 먹을까 하고요.”
“뭐…… 아직은 괜찮아. 더 자라도.”
적당히 주전부리도 먹고 돌아다니려니 슬슬 날도 어두워진다.
‘그쪽은 잘 놀고 있으려나.’
아까 세화에게 중간에 헤어질 경우 만날 장소를 약속해 두었지만 과연 세자가 언제 세화를 보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 저쪽에 공연을 하나 봅니다.”
“오. 보고 가자.”
이렇게 밖에서 하는 공연은 시월각의 무대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재미도 있고.
“그러고 보니 오늘 시월각은 아니 가십니까?”
“거기 오늘 사람 미어터질 텐데 뭐. 내가 가면 괜히 자리 하나 뺏는 거지.”
“아하하. 앞으로 가서 보실래요?”
천호는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를 조금씩 헤치고 앞자리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보는 내내 나를 안아 들고 있기는 어려울 테니까.
이렇게 공연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때는 어린아이들이라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앞자리로 나갔었는데.’
“어흥!”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호랑이 탈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모르게 손이 튀어 나갔다.
퍽!
“악!”
‘어?’
내 손에 맞아 가면이 벗겨진 광대가 능청스럽게 바닥에 나뒹굴며 우는 소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