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0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03화(203/326)
“어? 정말?”
“그래. 하지만 아바마마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오라버니가 대리청정 중인데도?”
“그래.”
뭐든 다 내 맘대로 하면 그게 대리청정이냐.
세자는 그렇게 말하며 좀 더 보완해서 나중에 함께 아바마마께 가자고 했다.
내가 떠올린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TV나 라디오조차 없는 시대, 다른 지방 정보를 알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는가.
옛날이야기에서 지나가는 선비들이 괜히 대충 아무 집이나 잘 사는 집 문을 당당하게 두들기고 하룻밤 신세 지던 게 아니다.
물론 잘 곳 없다는 사람을 쫓아낼 수 없다는 인정(人情) 같은 이유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여행객들을 대접해 주는 집주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미주알고주알 전해 주는 것이 당연한 상도덕이었다.
현대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에서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니었다.
그것도 조정에서 나온 확실한 정보라면, 더더욱 궁금해하는 것이 인지상정.
과거시험을 노리는 지방 양반이나 관리가 아니더라도 조보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서 다들 어떻게든 구해다 읽곤 한다는 얘기를 지나가며 들은 적이 있었다.
‘이거 장사가 되겠다 싶었지.’
그건 내 얘기를 들은 세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째선지 부왕에게 건의하는 건 꼭 나한테 미뤘지만.
“그래. 시아가 또 뭔가 재미있는 생각을 해냈다고 들었다.”
얼마 후 또 간식을 만들어 부왕과 세자, 셋이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자 약간의 담소 후에 부왕이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예, 아바마마. 실은 소녀가 저자에서 듣기로 승정원에서 만드는 조보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일부러 돈을 주고라도 필사해서 읽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조보는 조정의 소식을 담은 것인데 민간에서 읽는단 말이더냐.”
“예. 지방에 있는 양반들도 조정이 돌아가는 소식을 알고 싶어 하니까요.”
“흐음.”
왕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에 살고 있는 양반들이라도 조정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고 살 수 없는 법이니까.
애초에 모든 양반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과거 합격이기도 했고.
“게다가 조보에는 조정의 일뿐만 아니라 여러 정보들이 함께 있지 않사옵니까. 특히 유생들은 전하께서 하명하신 내용을 통해 어심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요.”
“그래. 공부가 되기도 하겠구나.”
대충 눈치를 보니 그리 부정적으로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그래서 소녀 생각에는 아예 제대로 된 품질로 인쇄해서 배부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인쇄를 하겠다고?”
왕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예. 아무래도 초서체(草書體:획을 생략, 연결하여 빠르게 흘려 쓴 글씨체. 알아보기가 힘들다.)를 각 관아에서 나온 사람들이 각자 필사해서 보내는 것이니 필사하는 쪽이나 나중에 읽는 쪽이나 조금씩 틀릴 수도 있고, 실수로 빠트리는 것도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인쇄해서 배포한다면 그런 문제들을 줄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흐음. 기별청에서 굳이 인쇄를 하지 않는 것은 번거로움 때문이지.”
이 동네는 이게 문제다. 활자가 있어도 안 써.
정확히 말하면 활자가 있지만 그거 조합해서 짜 맞추고 인쇄하고 하는 거 귀찮아서 대충 손으로 쓰고 벽에 붙여 놓는다는 뜻이다.
승정원에서 그렇게 하겠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쩌겠는가.
읽고 싶으면 알아서 어떻게든 베껴 가는 수밖에.
‘진짜 살고 싶은 대로 대충 산다…….’
물론 돈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일거리 늘어나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다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저래서야 발전이 없잖아.
애초에 왕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승정원 관원들이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올라온 앞날이 창창한 관리들인 만큼 다른 직무와 겸업하는 경우도 많고 바빴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른 부서 관원들을 위해 노동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냐.
아무튼 그렇다.
“승정원에서 하기에는 번거로운 일이니 관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공무원이 귀찮아서 안 하는 일이지만 돈이 된다면 민간에서 할 수 있는 법.
“그리고 아시다시피 소녀가 이미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지요.”
“……네가 예전에 세자에게 활자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네 그걸로 세자를 소재로 한 소설책 찍어서 잘 팔고 있습죠.
“예, 근래에는 더 안정적으로 인쇄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소녀가 조보를 인쇄해서 팔면 어쩔까 싶사옵니다.”
“……팔겠다고?”
“예. 조정의 소식은 물론이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있으니 사실 글을 아는 이가 아니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다들 내용을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왕한테까지 그런 얘기를 전하지는 않는 법이니 부왕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차피 다들 돌려 보고 있다는 거 알 사람은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 크게 반대도 없을 것 같았고.
하지만 부왕은 아무래도 조금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 조정 내의 일이 너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이 아니냐.”
어차피 사관에게 스토킹 당하며 기록당하는 처지이니 이제 와 새삼 부담스러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백성들에게 너무 내부 사정을 다 보이는 것이 찜찜한 걸까.
어차피 기밀 사항 같았으면 그렇게 적당히 필사해서 배포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 최고 권력자께서 마음에 안 드신다는데, 타협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의무겠지.
“정 그러시다면 조보는 조보대로 보내고, 대량 생산해서 판매하는 것은 조보의 내용 중에 외부에 유출되면 곤란한 부분들을 미리 제하고 보내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말하자면 일반 공개 정보는 심의를 거치자는 뜻이었다.
왕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조보의 내용이 이래저래 알차다는 건 왕도 알고 있을 터였다.
“흐음.”
“게다가 근래에 한글을 아는 백성의 수도 점점 늘고 있으니 판매하는 것은 한역본으로 낸다면 일반 백성도 읽을 수 있으니, 목민관들을 통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전하의 어심을 바로 전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
왕의 뜻을 백성들에게 다이렉트로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왕도 솔깃한 모양이었다.
왕이 어느 정도 납득한 듯하자 나는 조금 속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게다가 조보를 찍어서 파는 것은 소녀가 사람을 시켜 진행할 일이나, 판매 수익금은 당연히 승정원의 지분이 있지 않겠사옵니까.”
돈도 낼게요.
물론 승정원이 일했다고 승정원이 따로 예산 더 받는 거 아니고 그냥 국가 예산에 작은 보탬이 되는 정도였다.
공무원이 하는 일이 원래 그렇다.
내가 그렇게 그럴듯한 사업 계획을 슬그머니 늘어놓자 부왕은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 아비가…… 옹주를 금전적으로 그리 부족하게 키운 기억은 없는데 왜 이리 장사에 밝은 아이로 컸는지 모르겠구나.”
“소녀가 먹여 살려야 할 식솔들이 조금 많사옵니다.”
“…….”
내 말을 들은 부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별다른 반대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왕의 허락이 떨어지고, 승정원에서도 딱히 반발하지는 않았다.
세자도 의외였는지 나중에 이런 말을 했었다.
“승정원에서 신경 써야 할 일이 조금 늘어나는 셈이라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구나.”
“그러게. 승정원 관원들에게 감란전병 한 상자씩 집에 보낸 것이 효과가 있었나.”
“…….”
“아니, 딱히 뇌물은 아니고오.”
“정말이냐?”
“그냐앙. 일도 많은데 신경 쓸 거 하나 늘린 셈이라 좀 미안하기도 해서 맛있는 거라도 좀 먹으라고 보냈지이, 아마?”
딱히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나는 세자의 떨떠름한 시선을 무시하며 협의해야 할 사항들을 하나씩 꼽았다.
사실 그동안에도 원래 일 많이 하는 부서에는 가끔 먹으라고 야식도 보내고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대부분 감란전병은 아니었지만.
‘아, 그동안 감란전병은 세자 측근들한테만 주로 보냈었나.’
그동안 나도 모르게 차별을 해 온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럭저럭 명분도 나쁘지 않았고. 세수 증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왕이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문제였으므로 이 일은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덕분에 나는 일복이 터져서 처소에서 반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거 좀 공기업 같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 혼잣말에 옆에 있던 소이가 이상한 얼굴을 하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미 세책방 운영을 통한 인쇄 기술은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필요한 건 조보를 빠르게 베껴 한글로 해석한 후 인쇄, 그리고 판매하는 거다.
‘유통이 조금 고민이네.’
한양이나 경기권까지는 지금 있는 인쇄소를 조금 더 확장해서 일단은 감당해 보고 규모를 키우면 될 거 같은데.
“일단 승정원이랑 기별청이랑은 얘기가 끝났으니까. 필요한 인원 충원에 관해서는…….”
“……소인은 옹주 자가께서 왜 이렇게 일을 사서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혼자 이것저것 보며 중얼거리고 있자 결국 소이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래?”
“예. 그냥 가만히 계셔도 평생 편하게 사실 수 있는 분이신데.”
“흠. 그야 돈 많은 백수의 삶이 안락하기는 하다만 사람이 너무 방바닥에만 붙어 있으면 못 써. 밖에도 구경도 좀 다니고 사람도 만나고 해야지. 너무 폐쇄적으로 살면 사람이 병드는 거야.”
아무리 이불 밖이 위험하고 방 안이 안락해도 집 안에만 있으면 말 그대로 건강부터 아작 나는 법이다. 게다가 대화할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피폐해진다.
그렇다고 집 안에서 가족들하고만 지내면 세상 물정이나 사람 대하는 법도 모르게 되는 경우도 많고.
평생 먹고살 걱정 없고, 돈 벌 필요도 없는 집 애들이 괜히 취미로라도 취직하고, 카페 하나 운영하고 이러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옹주 자가께서는 너무 일을 많이 하시는 듯하옵니다.”
“음. 좀 그런가.”
“예. 덕분에 소인들도 일이 너무 많사옵니다. 소인은 저희 언니가 전국 일주라도 하러 떠나는 줄 알았사옵니다.”
“글쎄, 그건 너무 골병 들것 같아서…….”
가이는 시영원 분원 문제 때문에 종종 자리를 비웠다.
나도 양심이 있어서 주로 봄과 가을에만 보낼 거라고. 물론 그게 여름과 겨울에 절대 안 보낸다는 뜻은 아니지만.
하지만 의좋은 자매를 장기 출장으로 생이별시켜 놨으니 미안한 일이었다.
“언니를 자꾸 빼앗아서 미안하네에.”
“아아니요, 그건 저언혀 안 미안해하셔도 되옵니다.”
투덜거리더니 또 질색한다.
‘뭐, 자매 사이에 저러는 것도 평범하지.’
“……그럼 다음부터는 소이가 갈래?”
“소인은 그런 어려운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
소이는 가이와 달리 담이 작아서 큰돈 오가는 일을 시키려고 하면 아직도 저렇게 뒤로 뺐다.
어째 이리 자매가 안 닮았냐.
‘사실 소이도 시키면 곧잘 하던데. 겁이 많아서 그렇지.’
동시에 전생에 나도 그다지 언니와 안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처음 화제로 돌아가기로 했다.
“글쎄…… 어어. 내가 이렇게 일하는 건 일단 나랏돈을 먹고 사는 의무라고 해 둘까.”
왕실 재산을 나랏돈이라고 하면 이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하지만 한 거 없이 가만히 앉아서 돈만 받아먹으며 평생 무위도식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이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하나.
‘귀족의 의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맞던가? 맞겠지?’
이제 떠올릴 일이 별로 없는 외국어는 단어가 헷갈렸다. 저게 프랑스어였나.
“옹주 자가께서는 그리 말씀하실지 몰라도. 다른 종친분들 중에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아무도 아니 계시지 않사옵니까.”
“남들이 안 하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게다가 대부분의 종친들보단 내가 더 신분도 높고 돈도 많은걸.”
그 논리대로라면 종친들이 다 싸패인 경우 나도 싸패처럼 살아야 하냐고.
“옹주 자가께서 남들보다 재산이 많으신 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셔서이지 않습니까.”
“아니, 오해하고 있는데 내가 재산이 많은 건 내가 일을 열심히 해서라기보다는 가이가 유능해서거든? 그리고 종친들도 나름 이것저것 할걸.”
가이가 아니었으면 사실 적자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종친들이 과연 순진하게 놀기만 할까. 걔들이 돈 되는 일을 전혀 안 할 거라고는 믿기 힘드네.
그래도 영천군 때문에 다들 이리저리 탈탈 털려서 한동안은 몸을 사리겠지만.
‘물론 돈 벌겠다고 노동을 하지는 않겠다만.’
게다가 내가 하는 일들은 원래 재산 증식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있었다.
시영원이 어떻게 수익 사업이야, 자선 사업이지.
그래도 어찌어찌 돈은 벌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지.
“뭐. 덕분에 보람찬 인생을 보내고 있잖아.”
“보람찬 인생이고 뭐고, 옹주 자가 몸살 나시겠어요. 아직도 가끔씩 꾸벅꾸벅 조시면서 무슨 일을 이리 열심히 하시는지.”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