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2)화(22/326)
죽어도 안 나올 거 같던 오빠 소리도 몇 년 지나니 그럭저럭 할 만했다.
‘세자는…… 생명의 은인인 데다 스윗하니 잘생겨서 오빠 소리가 어렵지 않다고나 할까.’
그냥 양심을 버리고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데 심지어 친오빠면 뭐.
‘작은애는 나 물에 빠졌을 때 수영도 못 하는 게 뛰어들었다던데 까짓것 오빠라고 불러 주자. ……나중에 좀 크면.’
정확히 말하면 오빠가 아니라 오라버니겠지만.
‘오빠’란 호칭은 본래 아기 때나 쓰는 유아어(幼兒語)이니 예의범절이 엄격한 왕실에서는 처음부터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쓰라고 가르치더라.
‘그러고 보니 현대에는 거의 ‘오빠’라는 단어가 성인들도 쓰는 일상어로 정착해 버렸지. 사실 ‘엄마’, ‘아빠’도 그렇지만 ‘까까’나 ‘맘마’처럼 아기 말인데.’
그렇게 보면 부부나 연인 간에 오빠라고 부르는 걸 질색하시는 연세 드신 어르신들도 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언어야 계속 변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나. 엄마 아빠 같은 유아어는 고대에서부터 딱히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지만.’
‘마마’, ‘아바’ 같은 표현은 고대에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수준이고.
시대는 중세 같은데 중세 국어를 쓰고 있지 않은 이상한 상황이니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만.
어쨌든 영원 대군도 오라버니라고 불러 줄 만한 게, 지금은 영원 대군인 경원군은 그날 심지어 눈이 돌아가서 경언군에게 달려들어 주먹질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날 내가 깨어났을 때 죄인 취급 받고 있던 이유가 그거였다.
물론 경언군이 한 짓이 밝혀지면서 동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 기특한 오라비로 재평가되었다던가.
‘그래도 주먹질은 안 된다고 훈계를 들은 거 같지만 딱히 혼낸 거 같지는 않지.’
세자의 무릎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자 세자가 오미자청으로 만든 원소병(元宵餠:꿀물이나 과일청 등으로 만든 음료에 찹쌀 경단을 띄운 간식)에서 동글동글한 찹쌀 경단 하나를 수저로 떠 나에게 내밀었다.
“시아야, 아~”
“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진짜 연상의 생물학적 남자 형제를 오빠라고 불러 주면 과자가 나오고 옷이 나오는데 못 불러 줄 것도 없지.
세자가 먹여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고 있는 나를 영원 대군이 못마땅한 눈으로 째려보았다.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
“응.”
“형님께선 요새 부쩍 시아에게서 떨어지질 못하십니다.”
“조금 더 크면 이렇게 못 할 거 아니냐.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지금도 썩 왕족다운 행동은 아니긴 합니다만…….”
왕족이라고 체통을 워낙에 중시하다 보니 어린아이들이라 해도 태도가 딱딱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딱딱한 건 몇 년 전 대군이 된 영원 대군이 제일이었다.
현 중전의 유일한 친자이기 때문인지 중전은 영원 대군에게 가장 엄격했다.
‘본래라면 얘가 세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소설 <이화의 연인>은 가상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궁중 로맨스 소설이었다.
‘아니, 궁중 암투 비중이 더 컸던가.’
아무튼 남자 주인공인 이화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영원 대군이었다.
참고로 영원 대군이라는 호칭을 흐릿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던 건 악역 왕자가 세자가 된 동생을 인정 못 하고 계속 영원 대군이라고 불러 대서였다.
그리고 대군이 세자가 되었다는 건 그 전까지 세자가 있었다는 뜻이고, 그 세자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영빈이 자신은 중전 자리에 앉고, 경언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의 세자인 이혜와 원작에서도 중전이 되었던 선빈을 죽인 거였지.’
정확히는 영빈만이 아니고 그 집안이 합심해서.
하지만 중전과 세자를 죽인 보람도 없이 왕은 다른 후궁을 중전으로 삼았고, 영원 대군이 세자로 낙점되면서 영빈은 결국 중전이 되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시켜 준 꼴이 된다.
그리고 경원군, 아니 새로운 세자와 중전 사이를 서로 이간질하고, 음해하고 살인 모의를 하는 둥 나쁜 짓만 골라 하며 세자를 위협하다 파멸하는 역할.
영빈과 경언군은 그런 악역이었다.
‘말하자면 소설에서 나름대로 최종 보스여야 했는데…… 여기서는 일찍 끈 떨어진 연이지.’
본래도 중전은 못 되는 스토리였으나 몰락이 극단적으로 빨랐다.
근데 걔네를 그렇게 밀어 버린 게 나라니.
‘그놈이 우리 모녀를 건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극단적인 전개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지.
물론 소설 내용을 생각하면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소설에선 옹주의 존재는 나오지도 않았다고.’
단지 경언군이 파멸할 때 어린 시절 어린 누이동생들을 해친 적이 있다는 증언이 지나가듯 나왔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나한테 했던 행동들만 돌이켜 봐도 정상적이라 할 수 없었으니 무슨 짓을 했을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세자는 너무 순해 보이는 게 걱정일 정도로 선량했고, 동생들과 사이도 좋았다.
왕 역시 그런 성격을 아는지 영빈과 경언군 일에는 가능한 세자를 배제시키는 듯했다.
영빈은 그나마 좌상의 체면을 생각해 숙원으로 남겨 뒀고, 경언군은 생모와 함께 처소에서 감금 생활 중이었다.
‘원한 좀 샀겠는데.’
게다가 결국 좌상까지 여식을 잘못 가르친 책임을 진다며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원작에서는 세자를 해쳤던 무리였지만, 지금은 어렵지 않을까.
‘설마 이 상황에서 또 무리수를 둘까.’
지금 세자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봐도 물러난 좌상과 경언군이 원한을 품고 세자를 해코지한 게 아니냐고 몰고 가기 딱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으니 뭘 꾸미려 해도 쉽지 않을 터.
덕분에 요 몇 년간은 평화로웠다.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세자빈이 몇 년 만에 세상을 뜬 것 빼고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사람은 착한데 왕실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던지 시름시름 앓는 날이 늘어나더니 결국…….
그 후로 안 그래도 조용하던 세자가 더 말이 없어져서 다들 걱정이 많았다.
요즘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요즘 영원 대군이 시아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천자문 몇 자 가르쳐 주는 정도이니 글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합니다. 시아는 공부를 싫어하기도 하고요.”
“하하. 재미가 없는 걸까?”
“아니야.”
뚱하니 대답하자 세자가 후후 웃으며 식혜를 내 앞으로 가져다 놓는다.
평생 수발 받고 살았을 세자가 왜 이런 눈치가 빠르담.
당연히 훈민정음은 뗐다.
물론 내 나이에 천자문 정도는 떼는 게 이 동네 세자들 기본 스펙이긴 하지만 공부에 목을 맬 이유가 없는 옹주의 교육에 그렇게 조급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바마마께서 직접 가르치고 계시니 금방 늘지 않겠습니까?”
없는데…… 생물학적 아비의 관심이 지대해서 그렇지.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하니 공부 자체야 싫지 않은데……. 어느 정도로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렇지.’
괜히 천재 타이틀 따고 싶지 않거든요?
물론 내가 천재 소리 듣는 것도 뭐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왕자면 괜히 견제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왕녀고.’
하나하나 따질수록 옹주로 태어나서 속 편하긴 하다. 세자의 견제 대상이 될 만한 동복 남자 형제도 없고.
“아바마마께선 시아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저 시아와 함께하고 싶으신 모양이더구나. 정무로 늘 고단하시니 시아를 보며 안식을 얻고 싶으신 거겠지.”
그렇게 말하는 세자의 시선도 멍하니 멀리를 바라보는 게 썩 정상은 아니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하긴 생물학적 아비와 함께 있으면서 자연히 이것저것 듣게 된 사실로 봐선 아무래도 할 일은 많고, 신하들은 성가셔 골머리를 썩이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힘들어?”
“시아랑 있으면 안 힘들단다.”
덥지도 않은지 나를 끌어안는 걸 봐선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참아 주고 싶었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더웠으므로 단호하게 밀어냈다.
“더워. 떨어져.”
“시아는 차갑구나…….”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영원 대군도 차갑구나…….”
힘없는 세자의 목소리에 나와 영원 대군은 실없이 킥킥 웃었다.
동생들 좀 보겠다고 시간을 쪼개 다과 시간을 만든 세자의 노력이 빛을 보고 있었으나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짧은 법이었다.
“세자 저하.”
“아.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구나.”
재촉하러 온 떫은 표정의 내관을 본 세자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잘 자라는 것만으로도 밥값을 하는 어린 동생들과는 달리 할 일이 많은 세자는 여전히 바빴고, 슬슬 다시 세자빈 간택 얘기도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비워 둘 수는 없으니까.’
내가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자 세자가 마지막으로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고 힐링하고 갔다.
이 더위에 일하러 가는 것도 좀 불쌍해서 등을 토닥여 주었더니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만발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잘생긴 얼굴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일하러 가 보마.”
“응. 열심히 해. 시아는 착하게 놀고 있을게.”
손을 흔들어 주자 세자도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남주의 얼굴을 가진 둘째는 그 모습을 보며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너는 여전히 세자 저하 앞에서는 내숭을 떠는구나.”
“엉. 피차일반이네에.”
“뭐가 어째?”
이런 투닥거림이 익숙한 궁인들이 못 들은 척하기 위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궁인들을 따돌리기 위해 과자를 하나씩 들고 몸을 일으켰다. 듣는 귀가 많아 잡담도 마음대로 못하는 곳이 궁이었다.
궁인들이 적당히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영원 대군에게 과자를 내밀며 장난스레 말했다.
“요즘 공부 열심히 하는 영원 대군. 과자 하나 먹자?”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듣는 거야.”
“궁 안에 비밀이 어딨어.”
내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는지 영원 대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참으로 어린아이답지가 않구나.”
“나 말고 어린아이를 언제 봤다고 그래.”
“어찌 이리 한마디를 지질 않는지.”
둘이서 종종걸음으로 연못가를 향했다.
흉흉한 과거가 있다 보니 내가 연못가에 가는 것을 불안해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연못가를 산책할 때는 가능한 한 영원 대군과 함께였다.
우리가 일부러 거리를 벌린 것을 알고 있으므로 다른 궁인들은 알아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리를 따라왔다.
아까 세자와 있을 때도 그랬지만 이 형제는 듣는 이만 없다면 내가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중전마마 때문에 그래?”
“……내가 형님을 따라 무예를 익히겠다 했더니 언짢아하시는 눈치더구나.”
“으음.”
나는 그간 궁에서 알게 된 정보를 토대로 대강 결론을 내렸으나 이걸 애한테 설명을 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왕실의 아이들은 철이 금방 드니 영원 대군이 아직 12세밖에 안 되었다는 건 그렇다 쳐도, 이제 겨우 6세밖에 안 된 내가 이걸 설명해 주는 건 좀 그렇잖아?
‘중전은 영원 대군이 세자 쪽 세력에게 괜한 견제 대상이 될까 봐 경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세자가 워낙 다정다감한 데다 잘해 줘서 영원 대군은 아직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후궁 내에서도 묘하게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중전 자리에 올랐지만 권력이 별로 없달까. 원체 몸이 약한 분이시기도 하고.
그나마 영빈의 일이 워낙에 컸던지라 다들 알아서 몸을 사리고 있어 내명부는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단 적당히 둘러대며 아이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중전마마께선 다칠까 봐 걱정도 되실 테고. 세자빈 간택 때문에 신경 쓸 곳이 많아 예민하신 게 아닐까.”
“그것도 그렇구나. 곧 세자빈 간택도 있으니.”
내 말이 그럭저럭 설득력이 있었는지 영원 대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경 쓰시지 않도록 한동안은 조용히 공부나 해야겠다.”
“적당히 해. 아직 한창 놀아야 할 나이야.”
“하하. 너야 그렇겠지. 하지만 형님께서 내가 공부하는 걸 기뻐하시니 그만두기가 어렵구나. 재미도 있고.”
공부를 이렇게 좋아하다니 이상한 애들이야.
‘나야 지금은 한자나 익히는 수준이니 상관없지만 나중에 아녀자의 도리 같은 거 배우라고 하면 책을 던져 버릴 거 같은데.’
실은 이미 아기 시절 던져 버린 전적이 있다.
지금보다 어릴 때, 나에게 쓸데없는 걸 가르칠 거 같아서 천자문 단계에서 대충 여(女) 자나 부(婦) 자 들어가는 책은 집어던지고 사(史) 자 들어가는 걸 집었더니 그간 겪어 온 내 성질을 잘 알아서인지 포기하고 치워 버리더라.
‘역사책이 차라리 낫지.’
난 대학 다닐 때도 자기계발서는 거들떠도 안 보던 사람인데.
아니, 애초에 어린애 앞에 논어 같은 거 들이밀지 말라고.
영원 대군은 한참 어린 동생에게 두서없이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다가 글 선생이 올 시간이 되었다고 가 버렸다.
“아기씨. 연못에 가까이 가시면 위험하옵니다.”
“응.”
내가 연못 근처에 혼자 서 있자 불안했는지 날 따르던 나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귀찮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별말은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트라우마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을 겪어서 그런가 걱정이 많네.’
지금 나를 따르는 이 나인은 예전 영빈의 나인이었던 조가이였다.
이것저것 다 토설해 내고 결론적으로 주인을 배신한 셈이 된 조가이는 결국 내 궁인으로 편입되었다.
뒤에는 여동생도 함께 있었다.
‘자매가 같이 있으면 좋지.’
작가가, 아니 부모가 이름 짓기가 귀찮았는지 동생 이름은 소이였다.
둘 다 이 시대에는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시들과 숨바꼭질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으음.”
조가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왕족으로 태어나 많이 편하긴 하지만 전생과 비교해 놀거리와 먹거리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생각난 김에.
“아바마마와 오라버니에게 간식이라도 가져다 드릴까.”
“기뻐하실 겁니다.”
“역시 약과가 좋을까.”
비교적 한과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역시 빵과 초콜릿이 그리워…….
하지만 카카오를 수입하자고 할 수도 없잖아.
‘카카오 주요 생산지가…… 아프리카였던가?’
이건 좀 어렵겠지?
그럼 빵은 어떤가. 조선 시대에 밀가루가 귀한 편이긴 하지만 일단 종자는 있다.
토종 밀도 종류가 다양하지만 보통 국수 만드는 용이라 빵을 만들면 폭신하지 않고 쫀득해진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딱히 가리는 편이 아니라 별로 상관은 없다.
‘하지만 어린애가 밀가루 반죽을 해서 빵을 굽는다고……? 이상하지?’
베이킹이 취미였던 언니 때문에 만드는 법은 그럭저럭…… 아직 기억하고 있지만 나 같은 어린애가 뜬금없이 밀가루 반죽부터 한다는 건 너무 이상한데?
어떻게든 핑계 대서 만들 만한 더 간단한 거 없을까.
“아.”
“?”
“생과방으로 가자.”
계란, 계란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