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3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36화(236/326)
“집 안의 가구나 벽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뭔가 중요한 걸 숨겨 놓는 것은 의외로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꽤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거든.”
“이미 다 뒤지고 갔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장롱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방심하고 가 버리는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지. 켕기는 게 있는 자들은 훨씬 집요하게 숨기는 법이다 보니.”
“하긴, 안 그래도 집이 넓을수록 뭔가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젊은 겸사복은 속으로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정말 이걸 치운다고 뭐가 있을까.’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오긴 왔다만. 지난 역모는 주모자들이 너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도 했고, 지방이라고 수색이 소홀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설마 정말 이런 곳에 있으랴 싶은 생각이 더 강했다.
물론 헛수고더라도 시키면 해야 하는 몸이니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장롱을 아예 치워 버리자, 성 겸사복은 벽을 일일이 손으로 두들기며 다른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잠시 뒤, 둔탁한 소리가 나는 부분의 벽지를 슬슬 뜯어내자 거짓말처럼 빈 공간이 드러났다.
“진짜 있었네…….”
역시 은퇴하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인간을 굳이 멱살 잡고 끌고 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
“어르신, 도박장을 접으신다는 것이 사실이십니까?”
“그래. 그렇게 되었네.”
“여기를 이만큼 키우는 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이리 쉬이 접으신단 말씀이십니까.”
사내는 대답이 없는 어르신에게 따지듯 물었다.
“옹주 자가 때문입니까?”
“그래. 어린 옹주가 제법 앙칼지게 사람을 찌를 줄 알더구나.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우리가 망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사내는 어르신의 말에 안도와 동시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분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눈치채셨네.”
“……그분께서 말씀이십니까. 어찌…… 아.”
질문과 동시에 답을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수영 옹주가 팔고 있는 신문 때문이겠지. 도박장에 대해 한두 번 실은 것이 아니니.”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영 옹주가 하는 일은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그것 한 가지는…….’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지?”
“송구합니다. 조금 억울해져서 분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선 무어라 하셨습니까.”
사내의 질문에 어르신은 한숨은 내쉬며 답했다.
“어찌 이런 무모한 일을 벌였냐고 꾸짖으셨네.”
“그렇습니까.”
하지만 어르신은 그다지 기운이 빠진 얼굴은 아니었다.
“한때는 이제 옛일을 모두 잊으신 건가 싶어질 때도 있었는데, 그리 역정을 내시는 것을 보니 도리어 반갑더군.”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도박장은 정리에 들어갔고, 관련된 증거들도 소각하고 있네.”
“아쉽지만 그간 벌어 놓은 재물이 적지 않으니…… 그분께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어, 그분께서는 시영원에 대해 어찌 말씀하셨습니까?”
“저런 하잘것없는 자들과 연루되어 보았자 더 이상 얻을 것은 없을 것이니 연관될 필요가 없다고 하셨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어르신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더 이상 이 도박장으로 얻을 이득이 없으니 접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옹주에게 잘못 보였으니 정말 도박장을 단속하러 나올 수도 있어.”
“차라리 지방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수익이 좀 나올 만한 지역은 죄다 저 시영원 분점이 먼저 자리 잡고 있으니 또 무슨 훼방을 놓을지 모르네.”
어르신은 골치가 아픈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매만졌다.
이번 일로 이렇게 단단히 엿을 먹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었다.
사실 시영원 꼬맹이들이 그렇게 옹주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해바칠 거라고도 생각 못 했고.
‘그걸 고해바치다니.’
집문서 들고 나르는 노름꾼들도 그렇게 입이 가볍지는 않을 건데 저놈들은 대체 얼마나 응석받이로 자랐길래 그걸 미주알고주알…….
시영원 안에 숨어 있는 모양인데, 그놈들은 걸리기만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가게는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까?”
“자네들이 장사를 하겠다고 나름 비싸게 데려온 자들이 아닌가. 적어도 본전은 뽑아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도박장은 흔적도 없이 치우고 기녀들과 요리 위주로 장사를 하며 앞으로 저희 가게를 도박장이라고 부르면 항의하도록 하지요.”
“그래. 이제 도박장이 없는데 이곳을 노름꾼들이 드나드는 곳이라고 폄훼해서는 곤란한 일이 아닌가.”
“아직 기녀들로 벌어들이는 돈이 제법 되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들은 그리 말하며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법이었다.
도박판을 닫고 이젠 거리낄 거 없다고 이제 아주 당당하게 장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큰일입니다!”
예상치 못한 폭풍이 불법 도박장 운영자들을 덮쳤다.
“오늘따라 건너편이 소란스럽네요.”
“그러게.”
나는 일부러 신분 노출 없이 방문한 고급 식당 쪽에서 식사를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개별실이라 편하게 식사하는 와중에 들려온 소음이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거 같기도 하고, 비명이 들리는 거 같기도 한데 괜찮은 걸까요?”
“괜찮아.”
귀가 밝은 천호 역시 몸을 일으켜 밖을 기웃거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젓가락으로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음. 맛이 괜찮네.’
고기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고급 식당은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역시 음식의 질이 좋아야지.
비싼 만큼 비싼 값을 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오늘 갑자기 여기 오신 것도 그렇고, 아기씨께서는 뭔가 알고 계신 거죠?”
“음. 그렇지.”
내가 신분을 숨기고 같이 온 덕분에 나와 똑같은 상을 받아 열심히 먹고 있던 천호가 조금 뚱한 얼굴로 물었다.
어지간한 일들은 천호도 늘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자기만 전혀 모르는 듯하니 조금 골이 난 모양이었다.
“설명해 줄 테니 앉아서 먹던 거 마저 먹어. 여기 맛은 있지?”
“……예.”
천호는 순순히 제자리에 앉아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말을 잘 들으니 귀엽군.’
역시 덩치가 커다란 만큼 잘 먹어서, 먹이는 보람이 있었다.
이따가 봐서 추가해 줘야지.
“지금 우리 건너편의 경쟁 업체 놈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 전부터 도박판을 접고 불법이 아닌 영업을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예.”
입 안에 있던 고기를 삼키느라 대답이 늦어진 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원래 불법 도박이 주 수입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비고, 실제로, 그리고 표면상으로 가장 돈을 벌고 있는 주 수입업은 따로 있었지.”
“…….”
천호는 답을 알고 있는 듯했으나 시선을 피함과 동시에 대답을 피했다.
답은 바로 기녀들이었다.
기녀들이 대부분 시월각으로 통합된 지금, 예전처럼 꽃단장을 한 여인들의 술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물론 술 시중만 받는 것도 아닐 테고.
“애초에 저쪽에 기녀들이 저렇게 많이 있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었지 말이야.”
“그건 저도 의문이었습니다.”
기방이 시월각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천호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내 옆에 거의 24시간 붙어 있는지라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소이는 말없이 제 앞에 있는 요리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이번 일을 나름 흥미진진해하는 모양이었다.
“기녀를 빼 가는 방법이야 사실 별거 없거든. 돈으로 어린 여자아이를 사서 그 기녀 대신 기적(妓籍)에 넣는 거지.”
이 방법의 문제점은 결국 재주 있는 기녀들이 사대부들 첩으로 빠져나간다는 데에 있었지만, 예쁜 첩을 가지고 싶은 높으신 분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맞았으므로 그럭저럭 유지되는 편이었다.
“근데 그걸 내가 시월각 만들면서 은근슬쩍 뭉개 버렸거든. 그 과정에서 돈만 내고 기녀들을 첩으로 빼돌린 사람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정식 관리도 아니고 기적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라서 나중에 알기도 했고.”
“그건 알겠는데 왜 저 가게에…… 아?”
기녀들을 첩으로 들이는 게 드문 일도 아니라서 잠시 의아해하던 천호도 내가 왜 이 말을 꺼냈는지 금방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저기 있는 기녀들이 서류상으로는 누군가의 첩으로 되어 있는 겁니까?”
“정답.”
나는 짝짝 박수를 치며 답했다.
천호는 어이없는 소릴 들었다는 듯 정색을 하며 젓가락을 놀렸지만.
‘음. 생각해 보니 아직 어린아이한테 해 줄 얘기는 아니었군.’
덩치만 컸지 아직 한창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인데.
그래도 이제 와서 설명을 멈추기는 애매했으므로 말을 이어갔다.
“너무 당당하게 장사를 하고 있어서 오히려 생각도 못 했지 뭐야. 기녀들이라 다들 예명(藝名)을 쓰니까 새로 예명을 만들어 쓰면, 얼굴을 알던 사람이 아니면 알 수도 없고.”
이걸 알게 된 건 역시 지아의 공이 컸다.
‘그동안 돈을 쓰며 파락호 행세를 하고 다닌 보람이 있었지.’
아무래도 여색(!)에 빠질 염려도 없고, 지난번 몰래 잠입했을 때 도움을 주었던 기녀가 지아를 신뢰해서 이것저것 가르쳐 준 덕분이었다.
‘허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도 어떤 식으로 빼돌린 건가 조금 의문이었는데 진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해결은 쉬웠다.
“그 사실을 오라버니한테 알려서 조사했지.”
세자 역시 그 얘기를 듣고는 질색하며 조사를 명했고, 그 결과 사라진 기녀들의 이름이 서류상으로는 모두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그곳에서 기녀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기서 기녀로 일하고 있는 여인들은 법적으로 기녀가 아니라 유부녀라는 뜻이지.”
“그, 러면 안 되지 않나요?”
천호가 상식이 무너진 얼굴로 물었다.
물론 자기 첩을 술자리에서 술 시중을 들게 하는 일이야 있지만, 그건 보통 첩의 집에 손님을 초대했을 때의 얘기고, 저렇게 돈벌이를 하는 것은 논외였다.
첩의 집에 손님을 초대한다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방 같은 데 가지 않고 개인적인 술자리를 만드는 건 첩, 소실(小室)의 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적모의도 소실의 집에서 종종 이루어지고, 그러다 걸리면 거기가 피바다가 되기도 하고 그렇다.
“그야 안 되지. 저어기 대륙에서야 주요 여배우들이 죄다 극단 주인의 첩인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지만.”
“헐.”
밥 잘 먹고 있던 천호의 얼굴이 다시 한번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차, 내가 또 천호의 나이를 잊고.’
아무튼 조선은 그렇게까지 막 나가지는 못했다. 물론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러고 보니 저놈들도 그거 벤치마킹했나.’
나는 내가 한 말을 다시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건 죽어도 안 배우면서 안 좋은 건 꼭 배우고 싶어 하니.
“첩으로 들였다고 해 놓고 기녀로 공연시키고, 게다가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상대로 술 시중까지 들게 했으니 당연히 문제가 되지.”
“그렇군요. 그럼 저기서 일하던 기녀들은 어찌 되는 겁니까?”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와야지.”
거기까지 말한 후, 나도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세자와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으니까.’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일은 딱히 없는걸.
내 앞에 있던 음식들을 흡입하며 옆을 보니 어느새 천호 앞의 접시들이 텅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무쇠도 씹어 먹을 청소년…….
“아, 천호 벌써 다 먹었어? 요리 하나 더 먹을래?”
“네? 아, 음. 그래도 될까요?”
“내가 너 하나 먹여 살릴 정도는 된다.”
네가 얼마나 잘 먹는지 다 아는데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그리고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이가 사람을 불러 음식을 추가 주문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천호는 숙부님 아래서 자랐다고 했지?”
“예.”
“숙부님께서 예의범절에 엄격하셨나 봐.”
“예?”
내 말이 의외였는지 천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욕하는 것도 아니고 칭찬하는 건데 놀라긴.
“전부터 생각했는데 식사할 때 소리를 내는 법이 없더라고.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거야 뭐 잘 먹어서 그렇겠지만.”
“아. 그런가요?”
“응. 소리를 내지 않고 먹는 게 반가의 예절이니까. 민 상궁도 시영원 아이들한테 식사 예절을 엄격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하는데 아무래도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모양이더라고.”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어 시영원 아이들은 대부분 식사 예절이 좋은 편이었다.
어딜 가도 몸에 배어 있는 예절이 그 사람의 평가를 좀 더 좋아지게 하는 법이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젠체한다는 말을 듣는 일도 있다는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그렇습니까.”
내 말에 천호는 뭔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것은 어릴 적부터 몸에 배는 것이니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착호군이라 거의 사냥꾼 생활을 했다는데 원래 양반 가문이 맞나 보네. 저런 예절까지 신경 써서 가르친 걸 보면.’
하긴, 천호는 평소에도 딱히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은 없었다.
소이나 다른 궁인들이 지적하는 일도 별로 없었고.
‘역시 나중에는 좀 더 출세할 길을 찾아주는 게 나으려나.’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천호의 숙부가 모처럼 잘 키워 놓은 조카를 내가 부려 먹기만 한다고 얼마나 원망할지 눈에 선했다.
‘졸릴 때 봐서 그런가, 얼굴은 좀 흐릿하지만.’
새로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건너편의 소란은 한동안 이어졌다.
오락장을 찾았던 이들도 궁금했는지 나가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소문은 무성히 퍼질 것 같았다.
곧 기녀들의 명단을 적은 장부와 관계자들이 줄줄이 끌려갔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당연히 대충 넘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기녀를 첩으로 들인 후 다시 기녀로 일하게 하며 풍속을 문란하게 했다는 명분은 제법 셌다.
무엇보다 이 일의 발단은 그곳에서 일하는 기녀의 발고(發告)였다는 점에서 더 명분을 얻었다.
물론 발고한 기녀는 당연히 지아와 내통하고 있던 기녀 난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난향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의 부도덕한 현실을 발고하며 ‘부끄러워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썼고, 지아가 손님으로 방문한 척 그 글을 받아서 나를 통해 발고한 셈이었다.
‘기녀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강요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까지 쓰고, 혹시라도 도망이라도 갈까 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지.’
기방에서 생활할 때도 안 좋은 대우를 받은 적은 많았지만 그렇게 학대당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고.
난향이의 발고 덕분에 그에 대한 감사(監査)에 들어가면서 결국 그곳에 있던 기녀들의 소속이 원래 있어야 할 위치, 시월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월각으로 가기 싫다고 빠져나갔다가 험한 꼴만 보고 돌아온 셈이라 다들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원래 기녀들이란 거부권이 있는 인생이 아니었다.
‘그거 좀 없애 주겠다고 한 일인데 그걸 거부하니 어쩔 도리가 없네.’
어리석다고 욕하기보다는 측은한 일이었다.
그래도 원래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던 이들도 있어 나름 친근하게 맞아 주었다.
내가 미리 언질을 준 것도 있었고,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만남을 반가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난향!”
“아! 선…… 지아 님!”
“님은 무슨. 편하게 부르라니까요.”
남장한 지아를 선비님이라고 불렀다더니 여장한 지아가 영 어색한 모양이었지만 둘이 손 붙잡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주변과 괴리감이 있어서 그렇지.’
일손 필요해서 시월각에 와 있던 아영이와 익숙한 시영원 아이들이 두 사람을 보고 별꼴 다 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반대로 난향이의 동료 기녀들은 뭔가 배신감 섞인 얼굴이었다.
‘저쪽은 지아를 남자로 알고 있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지.’
어찌 보면 이상적인 남성상이지 않았을까.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못되게 굴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고 다정하고, 똑똑해 보이고.
‘거기다 돈까지 많고 말이지.’
잠입 수사용 공금이었지만.
“아기씨. 저 사람들도 앞으로 시월각에서 일하는 것입니까?”
“글쎄, 조금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한동안은 이쪽에 머물면서 분위기를 좀 익힐 거야.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봐야 할 테고.”
“알겠습니다.”
“적응할 시간 정도는 주자고.”
“예, 아기씨.”
사실 본래대로라면 괜히 저 기녀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역시 기생들이라 문란하니 어쩌니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아를 통해서 기녀들이 붙잡혀서 핍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므로 미리 선처를 받아 낼 수 있었다. 막말로 기녀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정조(貞操)가 그렇게 중요하면 애초에 기녀가 생기지 않았겠지.
세자는 내 말에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물론 세자를 탓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세자는 기방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었으니 걔를 탓해서 뭐 하겠는가.
지금도 반대를 억누르느라 꽤 무리하고 있는 것이 보여 조금 안쓰러웠다.
‘세화한테 좀 잘 돌봐 달라고 해야겠다.’
세자는 세자고.
도박장에서 일하던 기녀들은 이리저리 얼굴이 팔린 것도 있고 바로 시월각에서 일하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한동안 보호한 후에 일단 지방 분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전속 담당자 비슷하게 되어 버린 지아가 그 사실을 전하자 다들 안도했다고 한다.
“옹주 자가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알면 다행이지…….”
그놈들 망하게 하겠다는 목표도 있었지만 기녀들 빼내느라 나름 신경 쓸 게 많았다고.
“다른 지방으로 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나는 조금 쓸쓸해 보이는 지아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찔러 보기로 했다.
“섭섭해 보인다?”
“제가요?”
“응.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어.”
내 말에 지아가 툴툴거렸다.
“아니,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물론 들키지 않고 접선하려고 그런 척을 한 적은 있습니다만…….”
“오…….”
그런 척도 했었구나.
“왜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보시는데요.”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그 난향이라는 친구 말이야.”
“네.”
“혹시 연극 해 볼 생각은 없대?”
“네?”
“지금은 어차피 무대에서 가면 쓰잖아.”
내 말에 지아는 깨달음을 얻은 얼굴을 했다.
“!”
“담력도 있겠다. 그놈들 속일 정도의 연기력도 있겠다. 적성이 맞아 보이는데 아깝잖아.”
원래 특기 분야는 뭔지 모르겠지만, 연기에 재능이 있지 않을까?
물론 연극에서 하는 연기랑 생활 연기는 좀 다를 수도 있겠다만.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런 방법이 있지.”
“타진해 보겠습니다.”
“음. 잘해 봐.”
사실 요새 가게 새로 오픈한 데서도 공연을 했더니 연극 쪽 인력이 좀 부족하다더라고…….
그렇게 삥 뜯어 온, 아니, 돌려받은 기녀들의 문제를 정리하느라 우리가 바쁜 사이, 남은 주력 상품을 빼앗긴 (구)도박장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내가 가 본 것은 아니지만 안 봐도 뻔하지.
그 소란이 나고, 기녀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나마 있던 고객들마저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나마 남아 있던 유일한 돈줄마저 날아가고 남은 것은 식당 사업뿐.
그나마 그들에게 다행인 것은 시영원이 아직 재료 수급까지 끊어 버리는 잔인한 짓은 안 했다는 정도였다.
애초에 압력을 넣어 그것부터 끊어 버렸으면 쉬웠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수영 옹주가 경쟁 업체를 핍박한다는 말을 굳이 증명하고 싶지 않아서도 있었지만.
‘어차피 못 이긴다 이거지.’
음식의 질이나 가격 어느 면에서도 도박이나 여자로 장사하던 놈들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저쪽의 주력 메뉴였던 것들과 비슷한 듯 보여도 더 고급인 메뉴로 팔고 있으니, 굳이 더 비싼 돈을 주고 더 맛없는 요리를 먹으러 올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구)도박장은 얼마 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폐업했다.
나는 자축할 겸 다시 식당을 찾아 개별실에서 특식을 즐겼다.
덕분에 다시 포식하게 된 천호가 황량해진 반대편 건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옹주 자가를 자극한 대가를 치렀군요.”
“내가 죄 없는 놈들 핍박한 것처럼 말하지 마라.”
내 말에 천호는 피식 웃었다.
“옹주 자가를 아는 사람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걸요. 물론 모르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박장이라는 걸 믿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
“그건 그렇지.”
원래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법이니까.
“사실 도박장을 그렇게 빨리 포기할 줄은 몰랐지. 분명 수입 좀 떨어져도 미련 떨며 질질 끌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박장에 대해 법의 철퇴를 못 내려친 게 좀 아쉽네.”
“도박장 주인도 서류상으로는 또 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못 잡았다니. 이번 일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덕분에 엄청 찝찝하게 끝나 버렸다.
그 얼굴에 점 있는 아저씨, 귀찮으니 이제 그냥 점남(点男)라고 부르자.
점남 아저씨 잡아서 대체 뭐 하는 놈인가 확인했어야 했는데.
“잠복해 있다 납치라도 할 걸 그랬나.”
모처럼 덩치 좋은 부하도 있겠다. 물론 본인은 거부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뭔가 좀, 너무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고나 할까.”
“옹주 자가께서는 허무하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주변은 안 그렇거든요? 이번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소문이 났는지 시영원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옹주 자가한테 피의 보복을 당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헐? 아니, 세상에 나처럼 선량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흉흉한 소문이?”
“……일단 무서워하는 거죠.”
내가 그놈들 망하게 하는 과정에서 누가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닌데.
물론 노름꾼들이 우리 오락장에서 사기 치다 멍석에 말린 적은 있지만 그건 자업자득이고.
아무튼 죄 없는 사람들이 상한 것은 없었는데 억울했다.
‘하지만 너무 호구 같은 이미지가 잡히는 것보다는 좀 무서워하는 게 나으려나.’
자기 사람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는다 정도는 뭐 그렇게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저기도 건물이 매물로 나오면 살까 했는데 의외로 매물로 안 나오네.”
구조가 들통날까 봐 그런가.
너무 이래저래 타이밍 좋게 잘 빠져나간 게 솔직히 아쉬웠다.
“하, 세무 조사 넣고 싶었는데…….”
“???”
사실 나라에서 상업 장려를 안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세금 걷기가 성가시다는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상업이 잘 발달하고 있지 않던가.
얼마 전부터 아예 내가 협력해서 상단, 가게들 세금 걷는 방법을 체계화 중이었다.
아니, 상업을 장려하고 세금을 걷어야지 뭔 발전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가이가 운영하는 상단도 반강제로 협력하는 대신 세금을 깎아 주는 혜택을 받기로 했다.
형평성을 위해 다른 상단들에도 같은 조건으로 협조를 요구해 보았지만 모두 어찌저찌 다 회피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는 걸로 되어 있지만.
‘상업 발달하고 있으니 빨리빨리 체계를 잡아서 세금을 뜯어야지.’
아마 다들 옹주의 돈을 뜯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거다.
내가 상단을 가지고 있으니 다들 ‘여차하면 옹주가 우리들의 방패막이로 대신 싸워 주지 않겠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나 같은 경우는 적당히 협조해 주고 그 대신에 혜택받는 게 낫거든.’
저놈들 세무 조사받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도 맞아서 좀 아쉬웠다…….
세무 조사로 도박장까지 잡아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적절하게 문 닫고 튀었나, 쳇.
적절한 사이다를 먹지 못하고 다시 일만 죽어라 해야 하는 나는 살짝 울분을 삼켰다.
사실 그놈들 때문에 이리저리 심력을 쓴 덕분에 할 일만 많아지지 않았던가.
이제 한동안은 궁궐에서 꼼짝없이 일해야 하게 생겼다.
조금 우울하게 앞에 쌓여 있는 문서들을 살피고 있는데, 귓가에 익숙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옹주 자가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
“마음먹은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 조금 떨떠름하신 게 아닐까요…….”
“거기 두 사람, 사람 앞에 두고 쑥덕거리지 말라고.”
소이와 천호도 그간 내 옆에서 붙어 다니며 많이 친해졌는지 가끔 저렇게 둘이 대놓고 내 흉을 볼 때도 있었다.
‘내가 너무…… 관대한가.’
그런 내 의문에 약을 들고 왔던 세화는 ‘저는 옹주 자가께서 관대하셔서 좋은걸요.’라며 내 환심과 뒤에 있는 두 사람의 원성을 동시에 샀다.
물론 세화는 차분하게 권력자의 편을 들며 훌륭한 사회인을 모습을 보였다.
세화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나는 대충 그 이유를 알았으므로 작게 속삭였다.
“오늘 오라버니랑 나가지?”
“예?”
세자가 한동안 내가 떠넘긴 도박장 관련 일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바쁘긴 했지만, 사실 그게 온전히 나 때문에 바쁜 것은 아니었다.
‘세화와 반나절이라도 데이트를 할 시간을 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
덕분에 체력 단련 시간도 좀 줄였다던가…….
“잘 놀다 와.”
“……예.”
“오라버니가 못되게 굴면 얘기하고.”
“……지난번엔 옹주 자가께서 데리고 나가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아니, 그게 벌써 언제야. 분명 사월 초파일이었는데?
그땐 봄이었고 지금은 이제 겨울인데 설마 그 뒤로 둘이 데이트 한번 안 한 건 아니지?
세상에, 분기별 데이트도 아니고 연 2회 데이트하는 남자 따위 내가 남주로 인정 못 해!
내심 폭주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세화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데리고 나간 거라 내 책임도 있으니까. 오라버니가 이상한 짓은 안 했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니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