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4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40)화(240/326)
그런 생각을 했으나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지난 세월 지켜봐 온바 중전은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감정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별다를 것은 없었다.
아마 세자랑 내가 갑자기 정적이 되어서 피 터지게 싸우지만 않으면 나와도 싸울 일은 딱히 없을 거다.
“이제 세자가 후계만 봐준다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그 과정이 험난한 것이 문제죠.
“소녀도 이제 잘 자라고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리 말하면서도 중전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뭐 그런 주의이신가.
덕분에 중전과는 적당히 얘기 마무리하고 나올 수 있었지만.
중궁전에 있다 나오면 아무래도 좀 몸이 찌뿌드드한데 사람들 앞에서 스트레칭을 할 순 없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다. 역시 독립을 해야 해.
‘음…….’
중전의 반응이 좀 떨떠름하지만 중전만 저러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만치 자랐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내가 완전히 나았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건 또 여자라 불편하군.’
남자였으면 그냥 키가 어느 정도 자랐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을 텐데.
여자들은 신체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근거가 아무래도 좀 확실했다.
‘달거리(월경, 생리)가 시작할 때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거지.’
시작할 때까지는 혼인하라고 들볶지는 않을 거 같아 그건 좋은데.
애초에 귀찮다고.
‘사실 안 자라서 좋은 점 중 하나가 생리 안 하는 건데 말이지.’
세상에 신경 써야 할 일이 천지인데 또 그런 걸 매달 신경 써야 하다니! 귀찮아 죽겠네!
아직 안 해서 다행이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 자라는 걸 봐서는 늦어도 내년쯤에는 시작할 거 같았다.
‘세화의 의술을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주인공이셔서…….’
다만 이쪽도 약간…… 연애는 안 하고 일만 하는 거 같아서 약간 장르적 위협이 느껴진다.
문제는 세자도 직업상 워커홀릭 같아서, 정말 정기적으로 세화가 진맥하는 시간이라도 없으면 저 둘이 썸 타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지 걱정이었다.
‘치료를 좀 늦출 수 없냐고 해 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오빠 결혼하는 게 싫은 브라콤 여동생으로 비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 처소로 돌아오니 언제 온 건지 천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
“예. 옹주 자가.”
나 없는 사이 끝내주는 식사를 했나 본데. 잘 먹었는지 얼굴이 반들반들하군.
‘우리 처소가 밥이 잘 나오기로 유명하기는 하지.’
천호가 가지고 온 온갖 소식들을 받아 확인하며 가볍게 식후의 차를 마셨다.
천호는 오는 길에 세화와 마주쳤다고 했다.
“뭔가 바빠 보였습니다.”
“오늘 일찍 퇴궐할 예정이거든.”
“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건가요?”
“응.”
“미리미리 잘 보여 놔야겠네요.”
얘도 참 눈치가 제법 빠르단 말이야.
천호는 내 앞에 종류별로 서한을 분류해 놓고 뒤로 물러났다.
“천호랑 세화, 이미 사이좋지 않아?”
“적당히 예의 차리며 안부를 묻는 사이이니 혹시 모를 오해를 부를 만한 표현은 좀 피해 주시겠사옵니까? 옹주 자가.”
“알았다, 알았어.”
내가 여기저기로 올라온 보고를 확인하며 바쁜 사이 천호는 궁녀들이 가져온 차와 과자를 음미하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엽긴 한데…… 뭔가 잘못된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물론 내 앞에도 당연히 차와 과자가 있었지만 저놈이 더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나는 두뇌 회전에 필요한 당을 충전하며 천호에게 물었다.
“천호 네 생각에, 건전한 성인남녀가 둘이 함께 나가면 어디로 갈 거 같아?”
“예? 으음. 가 봤자 시월각이나 갔겠죠.”
모처럼 나가는데 또 시월각이야?
그거 그냥 영화관만 가는 데이트 같지 않아?
물론 개별실이 있는 곳이니 평범한 영화관 데이트라고 하긴 어렵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가끔 대화를 하다 보면 피로와 체력 부족을 호소하시곤 해서.”
“아……. 그건 세자도 비슷하긴 하지.”
게다가 데이트할 시간 만들겠다고 무리한 거 같기도 하고.
“물론 오락장도 가능성은 있지만, 거긴 너무 트여 있는 공간이라 세자 저하나 세화 의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요.”
“시월각은 입구에서만 조심하면 다른 사람과 거의 마주치지 않고 개별실로 들어갈 수 있으니 확실히 그쪽이 밀회를 즐기기에는 좋겠구나.”
덕분에 불륜 커플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너무 썩은 걸까.
“물론 두 분 다 오락장에 가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지만요.”
“아무래도 세자 저하의 얼굴이 알려져 있다는 게 크지.”
오락장에는 젊은 관료들도 많이 드나드니까. 젊은 공무원들이 일 안 하고 왜 거기에 있냐고 하면 참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세자가 왜 거기에 있느냐고 하면 그것 역시 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여간 신분이 남다르니 평범한 데이트도 힘들었다.
그럼 그냥 어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둘이 손잡고 산책을…… 하이고.
“어휴.”
“어찌 그러시옵니까?”
두 사람의 거북이 기어가는 진도를 생각하니 속이 답답해서…… 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다른 적당한 구실을 댔다.
보고서를 보다 보면 자연히 드는 생각이었으므로 어색함은 없었다.
“아니. 역시 올해 작황이 안 좋은 곳이 많았구나 싶어서.”
“벌써 추석도 지나고 초겨울인데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셔 봤자 아닙니까.”
“음…… 지역에 따라 소출이 줄어든 게 확 눈에 들어오니까.”
저것 때문에 좀 고생했지.
안 그래도 바쁜데 농사를 망쳤다고 하니 신경 쓰느라 조금 머리가 아팠다.
해당 지역에 구황 작물이나 대체재에 관해서도 가르쳐 주고, 곡식도 다른 지역에서 가져와 팔거나 나누고.
교통수단이 미비한 시대라 아무래도 많이 힘들었다.
“남들은 이렇게 작황이 안 좋을 때 돈을 가진 사람이 돈을 번다는데 옹주 자가는 왜 도리어 돈을 잃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굶고 있다는데 거기서 돈을 받기도 그렇잖아. 그럼 돈 없으면 굶기리…….”
“옹주 자가께서는 참…… 훌륭하십니다.”
너 지금 하루 5끼 먹고 꼬박꼬박 간식까지 먹는 사람한테 하는 말 맞지?
“하지만 너무 일을 많이 하시면 건강이 염려되니 조금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할 일이 많아서 그럴 수가 없어.”
“이제 옹주 자가께서 일일이 보시지 말고 사람을 좀 쓰세요.”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니까. 사람이.”
그리고 원래 최종 결정권자가 바쁜 법이었다.
물론 천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 갔다.
옆에서 소이를 비롯한 궁녀들이 천호를 응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고 보자, 너희…….
“지금까지 옹주 자가께서 시영원에서 키운 그 많은 인력은요?”
“다 일하고 있지. 심지어는 지금 태반이 지방 근무.”
“아. 그렇네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도박장에 잠입할 인재가 없는 이유가 나름 있더라.
그리고 눈앞에 유력한 인재 하나가 놀고 있는 것을 보니 좀 아쉬워졌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유난히 홀로 평화로워 보이는 게 조금 마음에 안 들었…… 다기보다는 아까워서인지 내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천호도 해 볼래?”
“예? 저같이 겨우 글자와 종이 구별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무리죠.”
천호는 뻔뻔하게 부정했다. 나는 어느 정도 훑어본 보고서들을 정리하며 추궁했다.
“너 한자로 된 책 읽는 거 봤는데.”
“어, 언제요?”
“시영원에서. 아이들한테 책 읽어 준 적 있었지?”
천호는 부정할 방법을 찾는지 잠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듯하더니 결국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어…… 제가 그랬던 적이 있었나요?”
“거짓말이야.”
“저기요. 옹주 자가?”
“읽어 주는 게 아니라 글 가르쳐 주고 있었잖아?”
“…….”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한 천호가 잠시의 침묵 후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책은 읽을 수 있지만 누굴 가르친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옛날부터 무과를 보라는 말을 하도 들어서 공부는……. 강제로 했으니까 책 정도는 읽을 수 있습니다.”
한글도 아니고 한자로 된 경서나 병서들은 찾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글을 익히는 게 쉽지도 않았을 텐데.
“호오. 지역에 따라서는 책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건 어찌어찌.”
“숙부님이?”
“……예에. 뭐.”
“와. 천호네 숙부님, 교육열이 높은 분이시네. 그런데 왜 그렇게 무과 안 본다고 고집을 부려.”
“저랑은 안 맞는다니까요.”
“그래 뭐, 시간은 많으니까. 아무튼 빼지 말고 천호도 일 돕자.”
“옹주 자가께서 하시는 일은 글을 아는 정도로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과 시험 공부를 하라는 거지.”
“…….”
천호가 말없이 질색하는 사이 나는 소이를 불러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좀 나가야 할 거 같아.”
“세자 저하 때문에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아까 중전마마 때문에 좀 답답하기도 해서 나가고 싶어졌다.
내가 이러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이제는 익숙하게 적아까지 데리고 밖으로 나서는 중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천호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천호. 그럼 신문도 읽어?”
“옹주 자가의 일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눈에 들어오는 일은 있습니다.”
“그럼 소설은? 연재하고 있는 소설도 읽어?”
“소설이요? 글쎄요. 저는 소설은 딱히요…….”
“저런, 재밌는데. 아무래도 천호 또래의 남자들은 잘 안 읽을까?”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런 건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요.”
천호는 의외로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다.
‘음. 이 나이 때 남자애들 취향은 아닌가. 어쩌나.’
나는 내심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소설, 분명 꽤 인기 있어서 매출이 잘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제 또래 남자들은 안 읽어도 읽는 사람이 많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에 소설을 읽으면서 깨달은 건데, 아무래도 세화가 소설 내용에 은근히 자기 동생과의 에피소드를 넣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