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44)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44)화(244/326)
천호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으나 활을 쏘는 뒷모습밖에 볼 수 없으니 누군지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 저 사람?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아까 너 나올 때 따라 나오던데 너 아는 사람 아냐?”
“모르는 분 같은데요. 그나저나 자세가…… 제대로 훈련받은 것 같네요.”
“얌마. 딱 봐도 양반님네이신데 그런 소릴 하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천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궁에서 본 자세랑 비슷한 거 같은데.’
본의 아니게 훈련에 함께한 적이 있어 몇 번이나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설령 자신이 본 게 맞다고 해도 그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궁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피곤하기도 하고.’
물론 숙부가 궁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곧 알게 되겠지만 자신이나 옹주 자가에 대한 정보까지 여기저기 퍼트려서 좋을 건 없었다.
‘고르고 골라 뽑힌 데다 엄격하게 훈련까지 받았을 테니 활을 잘 쏘는 것도 당연한가.’
그런데 무관이면 이런 데서 상금 받으면 안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 쌍의 남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천호의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그 뒤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익숙한 사람들까지.
“아.”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사람 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둘 다 천호가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시월각으로 가지 않을까 했는데 이쪽으로 오셨나 보네. 옹주 자가랑 빨리 사라져 줘야겠다.’
저쪽이든 이쪽이든 양쪽 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굳이 마주쳐서 좋을 것도 없었다.
옹주 자가께서도 저 두 사람이 빨리 이어지길 바라고 있으니 괜히 분위기 깨서야 좋은 게 없지 않은가.
물론 저쪽도 단둘이 있기는 틀린 것 같지만.
천호는 일부러 두 사람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리고 아저씨에게 마저 작별 인사를 남긴 후 후다닥 그 자리를 떠났다.
옹주 자가가 있는 곳과 반대편이라 다행이었다.
천호가 후다닥 아기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전직 착호군 사내는 쯧쯧 혀를 찼다.
“저놈 저거, 아기씨 앞에서는 은근히 얌전 떠네.”
아이들에게는 다정하지만 어른들에게는 오히려 틱틱대고, 한번 눈 돌아가면 자기보다 연상이든 뭐든 봐주지 않던 놈인데.
‘그야 화나게 한 놈들이 잘못하긴 했지만.’
물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다.
주의를 제대로 듣지 않고 활을 들고 장난을 치다 실수로 마을 어린아이 하나를 상하게 하고 도망친 놈을 저놈이 어떻게 했더라.
“와아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내는 갑자기 들려온 탄성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환호를 받던 청년 말고도 다른 청년 하나가 나타나 활을 쏘고 있었는데 그 청년 역시 쏘는 족족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히고 있었다.
“허어.”
천호가 한양에도 활 잘 쏘는 사람은 많다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주변에서도 새로 나타난 명사수(名射手)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와, 대단한데?”
“아까부터 활을 쏘고 있던 저 친구도 대단하지만 지금 새로 온 친구도 보통은 아니야.”
“그런데 왜 둘 다 얼굴을 가리고 있지?”
“글쎄? 군관(軍官)인 거 아냐? 잘못 쐈다가 아는 사람 만나면 민망할까 봐 얼굴 가리고 오는 사람도 제법 되기는 하던데.”
“얼굴 가릴 거면 왜 오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이곳에는 과녁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으니 여러 사람이 동시에 활을 쏠 수 있었지만 너무 대단한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의욕을 잃고 구경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와아! 또 관중(貫中)일세!”
“이쪽도 마찬가지야!”
언젠가부터 얼굴을 가린 사내 둘만 남아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떨어져 있었지만 둘 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활을 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다 뒤로 물러나고 둘만 남았는데 서로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좀 특이한 사람이 아닐까.
“누가 이길 것 같나?”
“글쎄. 하지만 나는 이쪽 형씨를 응원하지.”
“왜?”
“저쪽을 봐. 저쪽 형씨 옆에는 여자가 있잖아.”
“헐.”
누가 보아도 청년과 친밀해 보이는 여인 하나가 함께 있는 것을 본 몇몇 사내들은 먼저 와 있던 청년 쪽을 응원했다.
“둘 다 젊어 보이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어찌 압니까?”
“손이 주름도 없고 깨끗하잖아.”
“아.”
왜 그런 걸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의외로 섬세한 관찰력에 주변 사람들이 감탄했다.
그렇게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사내, 현직 세자인 이화의 속도 조금 시끄러웠다.
‘세화 앞에서 조금 잘난 척이나 해 볼까 했는데 저런 사내와 마주칠 줄이야.’
솔직히 활쏘기에는 제법 자신이 있는 편인데 이렇게 자신과 호각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이상하게, 자세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세화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단순하게 호승심이 생겼다.
삐릭-
시아가 장인을 시켜 만들었다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세자는 다시 활을 쏘았다.
“관중이요!”
그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런 희한한 것들을 만들어 낸단 말이지.
오늘 방문한 이곳 오락장 역시 마찬가지다.
도박장 때문에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식당의 음식이 생각 외로 훌륭하기도 했고, 이 오락장의 구성 역시 제법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신기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신분에 관계 없이 함께 바둑을 두고, 활을 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는 여인까지 섞여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세화가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관중이요!”
여인들은 이곳의 건물이나 정자(亭子) 중 하나를 빌려 책을 읽거나 시를 짓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경계를 서는 이가 있어 다들 안심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제 도성 인근에서 유행을 좀 안다고 하는 이들 중에 이곳에 와 보지 않은 이가 없다는 것뿐.
그리고 그건 시월각도, 시영 공원도, 시아가 이전에 만들었던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수영 옹주가 만든 곳에 와 보고 싶어 했다.
사실 이쯤 되면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 아닐까?
“관중이요!”
세자가 동생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팔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양쪽의 점수판은 아직까지 둘 다 명중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유리한 것은 먼저 와 있던 청년 쪽이었다. 이미 흔들림 없는 점수가 기록되어 있으니까.
20발 이상 쏘았으면 멈출 법도 한데 상대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내가 벌써 20발이 넘어가는데, 그럼 저쪽은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시간을 내기 위해 훈련 시간을 조금 줄였다지만 평소 단련되어 있던 세자는 걱정을 담아 옆을 곁눈질하는데, 상대도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쪽도 얼굴을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는데, 손을 멈추고 있는 사내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은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쉬는 건가.’
직원이 벽에 기록 중인 기록판을 보니 자신이 아직 한참 더 활시위를 당겨야 할 것 같았다.
세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듯 옆에 있던 세화가 말을 걸었다.
“조금 쉬시지요. 너무 무리하시면 아니 됩니다.”
“……저쪽이 나보다 무리한 셈인데 그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무리하지 않을 테니 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분을 숨기고 있으면 어쩐지 세화에게 자꾸 존댓말이 나왔다.
세화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였으나 더는 말리지 않았다.
주변의 분위기가 너무 달아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여기서 그만두는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아까 내가 걸었던 녀석은 사라졌다고!”
“제대로 동률로 겨뤄야지!”
승부의 끝을 보길 원하는 이들이 이대로 세자를 보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이 불이 붙은 모양이니 세화가 막을 방도는 없는 듯했다.
‘옹주 자가라면 어찌 막으셨을까.’
아직도 종종 어린아이같이 구시는 분이니 투정이라도 부리며 팔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화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옹주 자가가 있는지를 찾았지만 당연히 옹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오면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스러우면서도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옹주 자가가 계셨다면 ‘오라버니, 지금 안 멈추면 여기 세자 저하 있다고 소리 질러 버린다?’ 정도는 하셨을지도.’
옹주 자가를 보고 있으면 아직 자신에게는 그 정도 깡이 없는 듯해서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신분의 문제도 있었지만 세화는 역시 아직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세자가 활만 쏘고 있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옹주 자가가 그리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주변에는 남자도 여자도 활을 쏘러 왔다 지금은 구경꾼이 되어 물러난 이들뿐이었다.
“오늘 대체 무슨 일이야? 아까도 대단했는데 이젠 명중만 나오네?”
“그런데 왜 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그래도 다들 활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그래.”
“이거 좋은 구경하는구먼. 앞으로 과녁을 더 멀리 갖다 놔야 하는 거 아냐?”
직원들조차 흥분한 얼굴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활을 관리하던 직원 하나가 안절부절못하며 먼저 활을 쏘던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세화는 활을 쏘는 세자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고 그쪽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지?’
직원이 뭔가 설명하는 듯했지만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사내가 다시 활시위를 당길 때였다.
띵!
파공음과 함께 사내의 활줄이 끊어졌다.
끊어진 활줄이 사내의 뺨을 스치며 면사로 가려져 있던 사내의 얼굴이 일순 드러났다.
‘어?’
일순간이지만 세화는 사내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