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5)화(25/326)
“회임이요?”
“그렇습니다. 아기씨. 아기씨께도 아우님이 생기시는 거예요.”
궁녀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이화의 연인>에서 다른 후궁이 아이를 낳았다는 언급은 없었어.’
영원 대군의 나이가 12세.
곧 소설 속에서 남주와 여주가 만나는 시점에 가까워진다.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만나기 몇 년 전에 이미 지금의 세자가 살해당하고, 남주인 영원 대군 역시 이후 독살의 위협을 받는다.
그로 인해 인간 불신이 된 영원 대군은 세자빈 간택에 대한 귀띔을 듣고 소녀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려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상대가 세자인 걸 알아채고도 숙이지 않고 조곤조곤 제 할 말을 다 하는데…… 당연히 호감을 가지게 된다는 얘기다.
‘정작 성장해서 다시 만난 여주를 못 알아보지만. 어쨌든 과거 부분에서 말하길 어린 옹주들 사후로 더 이상 왕손은 없었다고 했지.’
그 옹주들은 길어야 서너 살밖에 살지 못하고 어릴 적에 모두 죽었으며, 그 죽음은 경언군 모자와 관계가 있었다는 언급도 있었다.
그러니 만약 세자가 무사히 살아 있는 지금 나에게 동생까지 생긴다면 정말 확실히 소설의 전개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비극적인 전개는 피한 거야.’
물론 아직 의료 수준이 떨어지는 시대라 다들 어떻게 재수 없이 한 방에 갈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어찌할 수 없는 범위였고.
“아기씨께서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응. 직접 가서 축하드려야겠다.”
워낙에 민감한 사안이니 아마 본인과 시중드는 이들은 좀 더 일찍 알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나한테도 말을 안 해 주다니.’
어쩐지 전에 푸딩 처음 먹을 때 좀 이상했어. 혹시 그게 입덧이었나.
아예 아기 소리를 들을 적에는 방심해서 이것저것 말해 주던 사람들이 내가 조금 세상 물정을 알 만한 나이가 되자 조개처럼 입을 다물기 시작한 게 조금 아쉬웠다.
물론 민원 사항은 제외지만.
“세자궁 사람들은 왜 그렇게들 성미가 까칠한지 모르겠습니다.”
“또 뭐라고 해?”
“어휴, 전 제가 무슨 세자 전하를 위협하는 대군 대감이라도 모시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요. 저희한테도 이러는데 정말 대군 모시고 계신 쪽은 어떨지 원.”
“영문을 모르겠네.”
“세자 저하께선 정말 좋은 분이신데 어찌 저리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내 옆에 있는 나인들은 아무래도 세자를 자주 보니까 칭송도도 높다.
세자궁 궁인들 입장에서는 세자빈도 들이기 전에 궁녀 출신 후궁부터 들이게 될까 경계할 만도 하다만…….
‘지금 본인이 별생각 없다는 걸 모시는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궁녀 출신이든 뭐든 일단 후궁이 세손을 생산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세자에게 힘이 되는 건데 왜 저렇게 까칠한지 원.
어쨌든 그 일은 내가 나서서 정리하는 게 나았다.
“나중에 오라버니에게 귀띔해 둘게.”
“감사합니다, 아기씨!”
어차피 다들 회임 축하하러 찾아올 테니 내 쪽에서 찾아갈 필요도 없을 터였다.
‘세자라면 밝은 얼굴로 오지 않을까.’
동생들을 그리 좋아하는데.
어린 데다 뒷배도 없는 후궁 출신이니 태어나는 아이가 남동생이어도 딱히 위협될 일도 없을 테고.
생각할 게 많아 성가시긴 하지만 이렇게 궁중 생활도 익숙해지는 거지.
그런데 정말, 이 나이에 할 걱정은 아니었다.
***
“오라버니!”
“시아야.”
그날, 밝은 얼굴로 나타날 거라 생각했던 세자는 뜻밖에도 어두운 안색으로 나타났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안 좋아.”
“잠을 좀 설쳐서…… 시아 눈에도 안 좋아 보이니? 큰일이네. 숙의는 좋은 것만 봐야 하는데.”
“잠을 설쳤어도 잘생겼으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우리 시아는 어쩌면 이렇게 예쁜 말만 할까.”
회임 축하 선물을 들고 온 세자의 상태가 오늘따라 영 좋질 않았다.
하긴 세자도 왕만큼이나 만성피로를 달고 사는 직종이었다.
“맛있는 거 줄게. 이리 와.”
“응?”
내가 인사를 마치고 나온 세자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질질 끌고 가자 여전히 날 마뜩잖아 하는 세자궁 놈들의 시선이 영 좋질 않다.
니들이 그럼 어쩔 건데?
내 아랫사람들은 들볶을 수 있지만 나한테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것이 신분제 사회의 현실이었다.
‘신분 내세우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쟤들이 우리 애들 괴롭히는 것도 세자가 나보다 권력자라 그런 거지.’
정작 그 세자는 동생들한테 약했지만.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다과상이 마련되어 있는 방으로 세자를 인도했다.
“자, 먹어. 아? 아니다. 내가 먼저 먹어 봐야 하나.”
“아니, 시아야. 누가 너에게 그런 걸 가르쳤느냐?”
세자 앞에 푸딩을 내놓으며 그리 말하자 세자가 정색하며 물었다.
나는 나대로 당황해서 세자는 기미를 안 하는 거였나,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어? 아닌……가?”
“오라비가 어찌 시아가 주는 것을 의심하겠느냐.”
“음, 아니, 그래도 조심해야지.”
만에 하나 뭔 일 생기면 우리 처소가 풍비박산이 날 텐데.
“이거 중전마마께도 드렸는데 좋아하셨어. 단 음식은 피곤한 사람한테 좋대!”
“와. 지난번에 할마마마와 중전마마께 드렸다는 그 과자로구나. 아니, 계란찜이라던가?”
대비전에서도 평은 좋았는데 어느새 소문났나.
“이름은 아무래도 좋고. 이거 부드러워서 먹기 좋아. 숟가락으로 먹는 거야.”
내 강권에 수저를 든 세자가 조금 밝아진 얼굴로 푸딩을 떠먹었다.
“아, 정말이네. 식감이 부드럽고 달달하니 맛있구나.”
“맘에 들어?”
“응.”
다행이다. 세자한테 주려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 정말 단 걸 먹으니 조금 기분이 좋아지는 거 같은데…… 아바마마께도 드렸느냐?”
“아니, 아직.”
“하하. 그럼 내가 시아가 만든 요리를 아바마마보다 먼저 먹었구나. 그런데 왜 아바마마께는 아직 드리지 않았느냐?”
“아바마마한테 드리는 건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달까.”
주재료가 계란이라 은비녀로 찔러도 황변이 되고 말이지.
“시아는 어린데도 생각이 많구나.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섭섭해하시지 않겠느냐.”
“으음. 하지만 내가 너무 체통 없이 지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대.”
“……누가 그런 말을 한다더냐?”
“음. 여기저기서?”
실은 동궁의 지밀상궁이 우리 쪽 지밀나인에게 웃전을 잘 모시라고 한 소리 했다던데.
내가 말을 망설이자 뭔가 눈치를 챘는지 세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혹, 임 상궁이 너에게 뭐라 한 것이냐?”
“어? 아니, 아무리 동궁 지밀나인이라도 나한테 직접 뭐라고 하지는 못하지.”
“직접 말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어찌 감히 웃전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린단 말이냐.”
대충 눈치챈 세자가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동궁 지밀인데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별로 없겠지.’
사실 이렇게 세자한테 다이렉트로 말하는 것도 좀 좋은 방법은 아닌데.
어찌할까 조금 고민하고 있는데 기껏 맛있는 것 먹고 좀 펴진 듯했던 세자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랫것들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어찌 내게 세자의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니, 무슨 그런 말을. 그동안 오라버니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그런 말을 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문득, 어제 헤어지기 전 세자가 취영당에 들렀던 것이 생각났다.
“혹시 어제 취영당에서 무슨 일 있었어? 또 그 모자가 괴롭혔어?”
“으음.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구나.”
“또 괴롭혔구나.”
기껏 찾아가서 챙겨 줘도 좋은 말은커녕 찾아온 사람한테 소리나 질러 댔겠지.
에구, 불쌍해라.
지쳤는지 축 늘어진 세자의 어깨를 토닥토닥했더니 세자의 입에서 ‘푸흐흐.’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좋은가 보다.
“하하. 시아가 없으면 오라비가 어찌 살았을까?”
“허허. 빨리 아기 낳아서 군주(郡主:세자빈이 낳은 왕세자의 적녀)나 현주(縣主:세자의 후궁이 낳은 딸)에게 위로받도록 하세요.”
동생 끌어안고 있지 말고 빨리 아기 만들어서 안고 있으라는 농담 섞인 말에 세자가 힘없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우리 막내가 매정하구나.”
“이제 막내 아니거든요?”
“아하. 그것도 그렇구나.”
그렇게 까르르 웃고 있으려니 세자도 조금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
“음. 하지만 시아의 말도 맞구나. 확실히 다시 세자빈을 맞아야겠지.”
“아직 기분은 좀 그렇지?”
“그래. 그 사람이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부인을 맞는다니 내키지는 않는구나. 세자빈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또 새로운 세자빈이라니…….”
게다가 듣자 하니 이번에는 아예 후궁도 함께 들일 모양이라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피차 거부권은 없는걸. 뭐.”
“하하. 그것도 그렇지. 그래, 잘해 주고 싶구나. 이번에는…….”
언제나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 후회만 남는 법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옛날에 비슷한 얘길 들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라버니도 가락지 같은 거 선물해 주면 어때?”
“응?”
“아바마마는 아직도 세자 시절 빈궁마마께 선물했던 가락지를 가지고 계시던데.”
“……정말이더냐?”
“응. 미복잠행(微服潛行) 나갔을 때 사 온 거라고.”
분명 아기 시절 보고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어마마마께 가락지를…….”
“?”
몰랐나?
하긴 이 동네 부모 자식들이 대화가 부족하긴 하더라.
조금 기쁜 듯 복잡한 얼굴을 한 세자는 다시 나를 꼭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아니 정말, 강아지를 키우든가 아기를 낳든가 해라…….
“……우리 시아는 어찌 이렇게 똑똑할까?”
“타고나길 똑똑해서?”
“푸후훗.”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들은 말에 이제는 담담하게 대답할 수준이 되었으나 세자한테는 들어도 들어도 재밌는 모양이었다.
하긴 세자는 잘생긴 노잼 인간이었다. 공부만 그렇게 파 대니 자연스럽게 노잼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이렇게 세자는 나도 모르게 자꾸 실드 쳐 주게 되는 걸까.
“이 외로운 곳에 또 가엾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니 시아 말대로 잘해 주어야겠구나.”
“오라버니 외로워?”
“하하. 결국 궁에 남는 건 오라비 혼자뿐이니 시아까지 하가(下嫁:공주, 옹주가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하면 외로워지겠지? 그때쯤이면 영원 대군도 없을 테고.”
“내가 자주 놀러 올게.”
“그래. 자주 오렴. 부마가 말을 안 들으면 오라버니한테 꼭 말하고.”
“응. 마음에 안 들면 혼자 살지 뭐.”
여섯 살짜리 애한테 별소리를 다 하네.
하긴 세자는 첫 혼인도 많이 늦은 편이었다.
왕족의 혼인은 보통 꽤 어린 나이에 이루어지니 내가 태어났을 무렵에 세자가 이미 혼인한 상태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세자빈 역시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혼인하는 셈인데, 세자빈이 되면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궁에서 지내야 하니 외로울 법도 했다.
게다가 혼인 후 사가를 받아 독립하는 왕자나 왕녀와 달리 세자빈은 엄격한 왕실에 들어와 층층시하 시부모(왕, 중전), 시할머니(대비)를 모시며 하드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가끔 재수 없으면 시증조모(대왕대비)까지 모셔야 했으며, 중전이 왕의 친모가 아닌 경우는 그쪽도 챙겨야…….
‘심약한 사람이면 돌연사할 거 같은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중전은 별 잡음 없이 잘 버티고 있는 편이었다.
“혼자 산다니. 남편은 어쩌고 혼자 살려고?”
“나 왕녀인데? 왜 혼자 못 살아? 나 혼자 살면 돈 안 줄 거야?”
“아니, 그야 물론 아바마마께서 옹주에게 집과 전답(田畓)을 주실 테고, 오라비도 시아에게는 얼마든 줄 수 있지……. 하지만 남편이 있는데 혼자 살면 아니 되지 않겠느냐.”
“남편이 죽으면 왕녀도 혼자 살아도 되지?”
“그야…… 아니, 그러면 꼭 남편을…….”
의도한 건 아닌데 죽이겠다는 말로 들렸나.
“안 죽이는 방향으로 노력해 볼게.”
“……시아야아.”
그 말의 어디가 재밌었는지 모르겠지만 세자는 또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웃었다.
“시아가 하가할 때는 부마를 정말 잘 골라야겠구나.”
“아니, 대충 고를 생각이었어?”
“아니아니잇, 그건 아니지마안.”
정색하고 미간을 찌푸린 내 항변이 또 뭐가 웃겼는지 한참을 헐떡이며 웃던 세자는 겨우 웃음을 멈추더니 조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아. 시아는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있어!”
이미 바꿨는걸.
소설에서는 어린 옹주들의 사망 이후 왕이 절망해 더 이상의 왕손은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아이가 생겼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결정되어 있던 소설 전개와는 달라진 셈이었다.
“하지만 오라비와 시아는 왕족인데도?”
“으음. 내가 혼인하기 싫다고 혼례 전날 재물 챙겨서 금강산 관광이나 가겠다고 도망치면 그게 운명을 바꾸는 거지.”
“우리…… 시아는…… 왜 이렇게 극단적일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자는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한참을 내 머리만 쓰다듬었다.
더워서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영 상태가 안 좋은 듯해 그냥 힐링하라고 내버려 뒀다.
궁 안은 너무 크고 힘든 일이 많아서 그런가, 나만 보면 힐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넘쳤다.
한참 후,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나를 풀어 준 세자는 웃으며 나를 처소까지 바래다주곤 이렇게 속삭였다.
“……혹시 나중에 부마가 맘에 안 들면 그냥 오라비들한테 얘기하자, 시아야?”
“봐서.”
“금강산도 그냥 오라버니가 보내 줄 테니까 부마랑 함께 가고. 응?”
“생각해 볼게.”
“생각해 주시옵소서. 아기씨.”
장난기 섞인 말투로 그렇게 속삭인 세자는 손가락으로 내 코를 가볍게 툭 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면 뭔 생각을 하는지 말해 줬을까?
하여간 이놈의 집구석(?)은 누구 하나 속이 편한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정말 출궁할 때가 되면 다들 개나 고양이 한 마리씩 키우라고 해야지.’
하도 이 사람 저 사람 쓰다듬어서 반질반질해진 것 같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