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6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60)화(260/326)
손에 쥔 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커다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쥐고 있던 것은 그 손과 이어지는 누군가의 팔뚝이었다.
그리고 그 팔의 주인은 당연히 천호였다.
그러니 손을 따라간 시선은 자연스럽게 천호에게로 향했다.
내 시선을 따라온 듯한 천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까 내내 천호의 품에 매달려 있던 것이 떠올랐다.
덕분에 조금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놀라서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얼른 천호의 옷에서 손을 뗐다.
‘아니, 나 미쳤나 봐.’
물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워낙에 무서운 상황이었으니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보다 어린애한테 의지했다는 게 좀 민망해서 그렇지.’
물론 천호가 나보다 어려도, 피지컬의 차이는 나이로 치면 아이와 할아버지뻘의 차이가 있었다.
내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호는 별말 없이 조용히 자리끼 쪽으로 손을 뻗어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아. 고마워.”
방 안이 따뜻해서 그런가, 물은 미지근해서 마시기 편했다.
그러고 보니 의식을 못 해서 그렇지, 목이 좀 말랐어.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천호는 왜 여기 있어? 나보다 더 피곤할 텐데 가서 상처 치료하고 쉬지 않고.”
내 말에 천호는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내가 이상한 질문이라도 했나?
“그게, 옹주 자가께서 저를 꼭 붙들고 계셔서…… 아, 상처 치료는 했습니다.”
“……내가?”
“예.”
그럼 혹시 아까 내가 천호의 팔을 붙들고 있던 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아니, 괜찮습니다.”
“나 힘센데. 팔에 멍들지 않았어?”
어쩐지 꿈에서 악력 얘기가 나오더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지 않습니까?”
“음. 튼튼해 보여.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야…….”
“푸훗. 괜찮습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궁녀들이 깰까 봐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대화하고 있었기에 천호는 작은 소리로 킥킥 웃었다.
‘어우, 민망해.’
그래도 내가 놀란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 그걸 위안 삼…… 는 건 좀 이상하지?
주변을 보니 우리 궁녀들이 지친 듯 잠이 들어 있었다.
다들 편히 잠들지 못하고 내 잠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조금 측은해 보였다.
‘다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잠도 편히 못 자서 어쩌나.’
한동안은 속 썩이지 말아야지.
아까 정신을 잃기 전에 확인하기도 했고, 일단 겉보기에 다친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나 싶어 천호에게 물어보았다.
“다친 사람은 없고?”
“군사들 중에는 있겠습니다만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천호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아까 일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옹주 자가?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 괜찮아. 역시 조금 놀랐나 봐. 오싹오싹하네.”
날이 추워서 그런 건지, 충격받아서 이런 건지.
생각해 보니 추운 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춥다는 생각도 못 해서 그렇지.
“의원을 불러올까요?”
“아니……. 됐어. 조금 쉴래.”
내가 일어났다고 하면 지금 선잠을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들 일어나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씻지도 못하고 옷도 그대로네.
‘그럴 여유도 없으니 됐나.’
그래도 방 안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아까 의원을 부르러 일어나다 말고 그대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는 천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천호도…… 옷이 어떻게 된 거야?”
“예? 아, 아까 피가 많이 튀어서 그냥 잘라서 버리고 닦고 치료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천호는 맨살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긴 채 겉옷을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팔 말고도 다쳤어?”
“예에, 뭐.”
나는 천호가 몸통을 다칠 만한 일이 뭐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다 떠올렸다.
“혹시 그, 두 번째 놈이 나 덮칠 때 다친 거야?”
“아, 등을 좀 긁혔는데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아까 뭔가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음.”
천호의 악의 없는 추궁에 나는 말을 망설였다.
“그, 천호도 좀 더 여기 있으면…… 안 되겠지?”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언제 또 감히 옹주 자가의 처소에서 밤을 보내 보겠습니까?”
“와. 불순하게 들려.”
“세자 저하께서도 오늘은 그냥 곁에 있으라고 허락하셨는걸요.”
“헤에. 오라버니가?”
“예. 많이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아, 맞아. 아바마마도 오라버니도 걱정하셨겠네…….”
천호는 약간 기운이 빠진 듯 웃었다.
“왜 웃어?”
“아까 무서운 기세로 호랑이를 향해 활을 쏘시던 분은 어딜 가셨나 하고요.”
“음…… 운이 좋았지.”
“평소에도 잘 쏘셨잖습니까.”
“움직이는 걸 쏠 일이 별로 없었는걸.”
솔직히 빗나갔으면 다른 사람이 위험해졌을 수도 있었다.
“좀 더 힘이 있었으면 쉽게 끝났을 텐데.”
“그런 말씀 마세요. 오히려 저 때문에…….”
“왜?”
“그 호랑이가 거기까지 따라온 건 제 피 냄새 때문일 테니까요. 옹주 자가를 지켜야 하는 제가 도리어 옹주 자가를 위험에 빠뜨린 셈입니다.”
비관성 발언에 나는 천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호랑이가 천호를 따라오게 된 건 처음에 나나 다른 궁녀들을 도망가게 하기 위해 천호가 호랑이와 홀로 대적했기 때문이지?”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천호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나…… 소이나 궁녀들은 그때 호랑이에게 변을 당했을 수도 있어. 안 그래?”
“…….”
내 말에 천호는 침묵했으나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천호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야. 그걸 후회하지는 마.”
“……예.”
촛불 하나만으로는 너무 어두워서 천호의 표정을 읽기는 힘들었지만 어쩐지 기뻐하는 것 같았다.
“옹주 자가도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모두 걱정하십니다.”
“그 상황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그대로면 누군가,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도리어 방해가 됐을지도 모르지만.”
“방해라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러니까 나는 비슷한 상황이 오면 또, 할 수 있는 일은, 할 거야. 이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까. 예전과는 달리.”
“……옹주 자가.”
나는 아까 꾸었던 이상한 꿈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다치면 안 돼. 성원 오라버니처럼…….”
“저는 조금 긁히기만 했지, 하나도 안 다쳤습니다.”
“그걸 조금 긁혔다고 할 수 있어?”
나는 정신을 잃기 전에 본 천호의 상처를 떠올리며 지금 붕대가 감겨 있는 천호의 팔을 확인했다.
“아, 아니, 멀쩡하다니까요.”
“정말?”
“예. 옹주 자가 덕분에 멀쩡합니다. 게다가 내의원 의원들한테 치료도 받았고요.”
“하하. 다행이다.”
“……이제 주무세요.”
“응.”
역시 좀 더 자야 할 거 같아 이불로 기어들어 갔지만 묘하게 눈이 감기질 않았다.
이유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또, 오진 않겠지……?”
“……걱정 마십시오. 밖에 군사들도 지키고 있고, 저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서 옹주 자가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천호는 내 손등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한 방에 제압은 못 할지 몰라도 혼자 호랑이랑 1대1 데스매치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확실히 좀 든든했다.
“응…….”
나는 설핏 웃으며 천호의 손을 잡았다.
“?”
“고마워.”
어쩐지 이번에는 이상한 꿈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잠드셨나?”
“예, 잠드셨어요.”
옹주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나고 얼마 후, 자는 척을 하고 있던 궁녀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대충 깨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저러는 거 보니 좀…….
‘좀 무서워.’
애초에 주상 전하나 세자 저하가 아니어도, 저분들이 천호가 옹주 자가와 같은 공간에서 밤을 보내게 둘 리가 없지 않은가.
이번에는 옹주 자가께서 너무 놀란 것 같으니 곁에 있어 주라는 뜻일 것이다.
자고로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딱히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수영 옹주가 잠든 것을 확인한 여인들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호는 그런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깨어 계시면서 왜 굳이 다들 잠드신 척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안 자고 깨어 있다는 거 아시면 걱정하실 것이 아닌가.”
‘……제가 깨어 있는 건 괜찮다는 뜻인가요.’
하긴 뭐, 다른 사람들보다는 아직 젊고 튼튼한 자신이 밤을 새우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무서운 일을 함께 겪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더 터놓고 얘기할 수도 있는 법이고.”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옹주 자가께선 어릴 적부터 너무 무서운 일들을 많이 겪으셨으니…… 곁에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시면 더 안심이 되시겠지.”
“음. 제가 듣기로 시영원에서 무예를 익힌 여아들이 있다는데 옹주 자가 호위로 들여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천호의 말에 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가하시면 그때 생각해 보아도 괜찮겠지.”
“계속 그렇게 생각하며 미뤄 오긴 했습니다만…….”
“주상 전하께서 아니 정하신다면 세자 저하라도 무언가 언질이 있으시겠지.”
“세자 저하께서도 아직 국혼을 올리지 않으셨으니 언제 하가하실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천호의 말에 가이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허튼 생각하지 말게.”
“안 합니다.”
천호는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아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옹주 자가와 처음 재회했을 때처럼 그대로 계속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면 이렇게 경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게다가 작고 가벼우니 아마 품에 안고 뛰는 것도 훨씬 수월했겠지.
오늘 옹주를 안고 달린 것만도 사실 시간과 거리로 치면 꽤 과하긴 했다.
‘하지만 반대로, 활을 쏴서 나를 구해 주지는 못했겠지.’
어떻게 그 순간 그렇게, 활을 쏴서 호랑이의 입과 눈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었을까.
옹주가 그런 대범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호랑이를 향해 활을 쏘던 그 모습은 천호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나 참. 무슨 옹주 자가가 그렇게 용맹한지.’
하긴 그 어릴 적부터, 저 옹주 자가는 범상치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저렇게 조그마…….
‘어? 아닌가? 이젠 그, 렇게 조그맣지는 않은가?’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는 옹주 자가는 이제 또래의 다른 여인들과 비교해도 그리 작은 체구가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어린아이였는데.
그 작던 옹주 자가가 너무 갑자기 자라 버린 것이 천호는 조금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그것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