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64)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64)화(264/326)
뜻밖의 말에 천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자가 누구인지 신원은 밝혀졌사옵니까?”
“아니. 하지만 의외로 양반 행세를 하던 자인 듯싶더군. 정말 양반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렇다면…….”
“정말 반가의 자제라면 실종자를 조사해 보면 금방 신원이 밝혀지겠지만 자네 생각에는 어떨 것 같나.”
세자의 말에 천호는 부정의 답을 내놓았다.
“신원이 밝혀지긴 어렵겠군요.”
“그래.”
배가 고파진 호랑이가 민가까지 내려오는 일은 조선 시대에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성원 세자의 일이 있었기에 현 조정에서는 수년간 호랑이 사냥을 비교적 열심히 해 왔다. 근래에는 한양에서 호랑이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궁에까지 들어오다니.
“우연이라기에는 절묘하고, 누군가 꾸며낸 일이라기에는 얼토당토않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쉬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
아마 천호 자신이 말하지 않더라도 세자 주변에는 착호갑사 출신의 무인들이 있을 터, 그러니 세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숲과 맞닿아 있는, 호랑이가 들어온 곳으로 추정되는 곳의 담벼락이 허물어져 있더군. 내부에 내통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높으니, 고의성이 엿보이는데 이게 노림수라면 목표는 하나뿐이다.”
세자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나를 노리는 거지. 성공하든 실패하든 손해 볼 것도 없을 테니까.”
“……저하.”
급격히 무거워진 분위기에 천호도 괜히 긴장했다.
“아, 오해하지 말게. 이런 걸로 나를 해치기 어렵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들은 아닐 거야. 정확하게는 나한테 흠집을 내고 싶은 거겠지.”
“?”
천호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자 세자는 웃는 얼굴로 주변에 있던 이들을 물렸다.
“?”
“천호 자네는 어리니 예전 일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에 호랑이 때문에 장가도 못 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여전히 의아한 얼굴의 천호를 보며 세자는 피식 웃었다.
“자네가 시아보다 한 살 어리니 알기 어려운 옛날 일이겠군.”
“그렇……사옵니까?”
“근데 그렇게 말하면 좀 나이 먹은 기분이란 말이야.”
하지만 세자도 천호나 시아 같은 어린애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모처럼이니 생각을 정리할 겸 간단하게 설명해 주지.”
세자는 천호에게 사약을 받은 경언군과 얽힌 일들을 가볍게 설명했다.
“옹주 자가께서 독 때문에 자라지 않으신다는 건 알고 있었사옵니다만 이런 것까지는 몰랐습니다.”
아마 어렸을 적에 들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듣고 보니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는 정도? 아마 당시에도 누님은 알고 있었겠는데.’
세자빈 후보였으니 말할 것도 없이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미신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신경도 안 썼을 거고.
“그 때문에 내 국혼이 미뤄졌던 건 사실이지. 다들 미신을 참 좋아한단 말이야.”
“그렇사옵니까.”
맞장구밖에 칠 수 없는 처지다만 천호도 동감이었다.
사냥꾼들도 미신은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천호는 그보다도 누님에게 맞아 가며 주입당한 쪽이 더 강렬했기에 미신을 그다지 믿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세자 저하께서도 누님을 세자빈으로 들이고 싶을 만했겠는데.’
당시에는 몰랐던 것들이었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이후에는 간신히 정한 세자빈 후보의 집안이 갑자기 역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또 혼사가 무산되었지. 내가 아직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건 그 때문도 있지.”
“예에.”
양인들이라도 대부분 혼인을 했을 나이인데 아직까지도 혼인을 하지 않은 세자에 대해서 여러 구설이 있다는 건 천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한테 안 좋은 소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
“그리고 이번 일 또한 전혀 상관없는 사실인데도 소문을 내기에 따라서는 그런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법이거든.”
“아니, 그건…….”
조금 지나친 생각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려던 천호는 문득, 자신의 집안이 역모로 몰린 것도 어쩌면 같은 흐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세자의 생각이 허황된 것이라면, 지금 자신의 생각도 허황된 것일 테니까.
“하지만 별로 걱정할 건 없네.”
“예?”
“오히려 시아가 궁에 침입한 호랑이를 활로 쏘고, 자네가 호랑이를 잡았으니 그런 말이 나올 틈이 있겠는가.”
“그렇사옵니까?”
그럼 좋은 일 아닌가?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한번 묻겠는데.”
“?”
“여전히 수영 옹주 밑에 있는 걸로 만족하나?”
“예?”
“이번에 자네의 활약에 대해서는 익위사뿐만 아니라 궐내에서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천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무 대단한 활약을 한 덕분에 어서 빨리 데려오라고 주변에서 온통 난리들이야. 언제까지 옹주의 소꿉장난에 인재를 낭비할 거냐고 말이지.”
“높이 평가해 주심은 감사하지만 저는 그렇게 포부가 크지 않습니다.”
“시아…… 수영 옹주에게 듣기로는 문자도 안다고 하던데.”
“옹주 자가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니 과대평가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옹주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자네가 출중한 인재라는 것은 사실인데?”
“제가 겁이 많아서 출세는 좀 무섭습니다.”
“……호랑이랑 맞장 뜬 놈이 겁이 많아?”
“……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서 대답이 늦어졌지만 잘 생각해 보니 이거랑 그거는 엄연히 다른 일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은 관직에 뜻을 둘 수 없는 몸 아닌가.
‘잘못해서 정체를 들켰다간…….’
역당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지금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할 테니까.
“정말로?”
“예, 정말입니다.”
세자는 천호의 말을 썩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넘어가 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치 않는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자네는 아직 어리니 좀 더 생각해 보게.”
“송구하옵니다.”
다행히 세자는 인재 영입에 거절당했음에도 그리 마음 상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부를 했을 뿐.
“솔직히 말해서 지금 당장 빼 오는 건 좀 양심 없지. 안 그래도 시아가 이번 일로 많이 놀랐을 테니 한동안은 자네가 잘 붙어 있게. 범이랑 붙어서 안 밀리는 호위라니 흔치 않지.”
아까보다는 조금 장난기 섞인 세자의 말투에 천호도 슬쩍 웃으며 답했다.
“예.”
“호위를 더 늘리겠다고 하면 싫어할 테고. 그렇다고 궁녀들이 붙어 있어도 안심이 되진 않겠지.”
세자의 말을 듣던 천호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
“옹주 자가께서는 궁녀들에게 보호받기보다는 당신께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시는 듯하니까요.”
“……그런가. 그 아이가 원체 좀 어린아이 같지 않은 면이 있었지. 지금 옹주를 보필하는 궁녀들은 워낙에 오래전부터 충성해 온 사람들이니 애착이 있기도 할 거야.”
생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거의 궁녀들 손에 자랐으니 애착이 있는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보통은 그래도 자신을 보호해 줄 대상으로 여기지 않나?’
생각해 보면 시영원 사람들을 대할 때도, 옹주 자가는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느낌이 강했다.
천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세자가 물었다.
“수영 옹주의 곁에 언제까지 있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예?”
“지금이야 주변에서도 아직 어린아이 같은 인상이 강하니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부마를 맞고 하가하게 되면…… 자네같이 젊은 사내가 곁에 있는 것을 부마가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
“옹주 자가께서는 그런 것을 신경 쓰실 분이 아닌 듯하옵니다.”
“옹주는 신경 쓰지 않더라도 부마는 신경을 쓸 거네. 그리고 그로 인해 다툼이 생긴다면 옹주가 곤란해질 테지.”
“그건…… 그렇사옵니다.”
“뭐, 좀 더 생각해 보게.”
“예. 저하.”
“그리고 저래 보여도 옹주가 불안해할지도 모르니 한동안은 궁에 머물게. 상처도 치료해야 하니 그게 낫겠지.”
뜻밖의 권유였으나 천호도 거절할 이유가 없어 감사히 받아들였다.
‘역시 옹주 자가가 걱정되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말해서 궁에서 지내면 난방 걱정 없겠다, 식사도 꼬박꼬박 나오겠다, 치료도 무상으로 받겠다,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자에게서 겨우 풀려난 천호는 자신이 혼인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도망친 역도의 자식이 혼인에 목을 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주변에서 본 사냥꾼들도 뭐 때맞춰서 혼인하고 그러진 않았으니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물론 혼인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서울로 상경하고 나서는 시영원을 드나드는 일이 많아서 혼사와 거리가 멀었고.
거긴 혼인 얘기가 잘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다들 자기 공부와 일을 하느라 바쁜 데다, 혼인을 할 수 없는 궁녀들이 꼭대기에 있으니 누가 감히 혼인해야 한다는 재촉도 없는 거 같고.’
무엇보다 옹주 자가께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혼전(婚前)이 아니던가.
시영원에서 감히 ‘혼인도 못 하는’이라는 비하 발언을 잘못 꺼냈다가 몰매 맞는 광경을 목격했던 천호는 입단속의 중요성을 깨우쳤더랬다.
***
나는 산책을 한번 다녀오고 이불 위에 다시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성장을 하니 이런 게 안 좋네…….’
작은 몸일 때는 어지간해서는 ‘근육통 그게 뭐임, 먹는 건가.’ 하고 뛰어다닐 수 있었는데.
팔다리 좀 길어졌다고 이렇게 힘이 들다니.
‘아. 그러고 보니 부왕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어쩌지.’
뒤늦게 생각난 사실에 몸을 일으켜야 했으나 역시 움직이기 싫어서 그냥 누웠다.
어차피 나는 지금 호랑이랑 마주쳐 죽을 뻔한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아니던가.
좀 아픈 척한다고 벌을 받을 거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뜨니 옆에 송비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부왕은 왔다 가셨나…….’
주상 전하가 오신다고 하면 저렇게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우리 처소 궁녀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다들 피곤하겠지만…….
다시 잘까 물이라도 마실까 고민하는데, 밖에서 소곤소곤 까르르하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건 대전 나인 목소리다.’
아무래도 아바마마가 내가 잠들어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오지는 않고 나인들 편에 뭔가 보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