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7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73)화(273/326)
어린놈이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아무리 제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었다고 말을 해도 믿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는 얼굴이고.
아무래도 형님께서 함경도에서 새로 가족을 꾸린 것 때문에 더욱 그러는 것 같았는데 사내가 그런 것을 신경 쓰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큰일을 할 놈은 아니었다.
상처(喪妻)하고 여러 해가 지나지 않았던가. 게다가 외근직으로 임명받아 집을 떠나 있는 처지에 살림을 보살필 여인을 두는 것이 그리 흠이 될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이가 키우다시피 했다더니 그 영향이 남았던 걸지도 몰랐다.
세자의 측근이 되면 출세는 물론이요, 잘만 하면 김선익 대감의 일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천호는 세자의 측근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옹주 자가가 평범하게 또래 소녀였으면 저놈이 여인에게 홀렸으리라 생각했겠는데, 언젠가 한번 보게 된 수영 옹주는 정말로 소문 그대로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측은한 마음이 안 들 수가 없겠지.’
어릴 적에 만난 적이 있는 데다가 별안간 역당의 자식이 되어 도망칠 때 도움까지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닐 터였다.
사실 그간 키워오며 봐온 것이 있으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라도 천호가 그 누가 봐도 어린 소녀에게 불측한 생각이라도 품고 있던 거라면, 김선익 대감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제 손으로 정리하려 했는데 다행히 그런 불순한 생각은 아니고 곁에서 지켜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사이 치료도 받아 자랐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어차피 지금의 천호와는 신분의 차이가 너무 컸다.
‘김선익 대감이 역적이라는 누명을 벗기지 않는 한은.’
다행히 천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세자 저하께서 당시의 일에 대해 다시 조사를 한다는 말을 천호를 통해 들었다.
천호는 다 옹주 자가 덕분이라는 무슨 팔불출 같은 소리를 했다.
평소 같으면 흰 눈을 뜨고 보았겠지만 김회엽도 그 일만큼은 수영 옹주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양에 와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수영 옹주에 대한 평이 무척 좋다는 것과, 정말로 수영 옹주가 꽤 좋은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천호가 그리 따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은, 잘못하면 천호가 옹주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안하다. 천호야.’
천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옹주 옆에서 있었던 일들을 잘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천호가 성 겸사복이 김선익 대감을 역모로 고발했던 이들에 대해 다시 조사한다는 사실에 대해 숙부인 김회엽에게 알린 것은, 김선익 대감의 누명이 벗겨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나한테 세자 저하나 옹주 자가를 괜히 적대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었겠지.’
가까이서 보는 만큼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 해도 권력자들이란, 언제든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세자 저하도 당시에는 아직 어렸을 터이니 그 일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겠지만, 주상 전하가 김선익 대감을 버렸다는 소문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론 김선익 대감을 역모로 고발하고 호의호식했다는 자들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지만, 이미 지난번에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니 그가 따로 그들에게 복수를 할 일은 없어진 셈이었다.
‘역시 옹주 자가께서 여러 사람에게 두루 추앙받을 만한 분이긴 하군.’
당시 반역의 증좌를 잡은 것이 옹주 자가라고 하지 않던가.
천호도 옹주 자가를 모시다 뜻밖에 그 일을 도왔으니 그간 옹주 자가를 물심양면으로 보필한 보람이 있었다.
그도 김선익 대감을 고발한 자들에 대해서는 궁에 들어와서야 겨우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당시 일을 알 만한 당사자들은 이미 대부분 그 일에 휘말리거나 휘말리지 않기 위해 행적이 묘연해졌고, 지방에서는 반역 사건이라 해도 오래전 일을 그리 잘 아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궁궐에는 아무래도 근속이 긴 이들이 많았고, 적당히 친해져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어색하지 않게 원하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원통했던가.
그런 데다 천호를 통해 마침 세자가 그때 일을 다시 조사하기 위해 몰래 사람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정황상 조사를 위해 파견된 건 누가 봐도 성 겸사복이었다.
세자와 옹주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체탐인 출신의 겸사복.
김회엽은 아직도 세자 저하와 대화 중인 그를 멀리서 흘끔 바라보았다.
대화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대충 세자 저하가 그에게 뭔가 일을 더 시키려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므로 일단은 희망이 있어 보였다.
‘천호 그놈의 안목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천호는 세자 저하 역시 그 일에 의혹을 가지고 있고, 김선옥 대감의 일이 누명이라면 벗겨주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그렇기에 김회엽 역시 무모한 도박을 하기로 했다.
뜻하지 않게 불똥이 튈지도 모르는 천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만일 그리된다면 부친의 오욕(汚辱)을 씻으려 하지 않은 불효자에게 내리는 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 천호 네 말대로의 인물이라면, 네가 형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는 한 너를 내치지는 않겠지.’
천호의 숙부, 김회엽 역시 감히 세자의 앞을 막아서려 마음먹은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것도 있다.’
김회엽은 얼마 전 천호가 말을 전해 줘서 오락원에서 만났다던 예전 착호군 동료를 떠올렸다.
한양으로 오기 전, 당시 북병영에 있던 사람을 만날 수 없는지 동료들에게 수소문을 부탁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부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성 겸사복이 보고를 끝내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김회엽은 감히 세자의 시야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세자 저하! 소인 김회엽, 감히 세자 저하께 올리고 싶은 말씀이 있사옵니다.”
“?”
성 겸사복이 떠나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세자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했지만, 세자를 대신해 무례하다고 화를 내는 측근들을 막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처음 결심했을 때부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이미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정리했건만, 세자 저하 앞에 무릎을 꿇으니 기대와 불안으로 가슴이 뛰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 이리 갑자기 나에게 할 말이 무엇이냐.”
세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자와의 대화는 김회엽에게 처음이 아니었으나, 이토록 두려운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엎질러진 물이었다.
김회엽은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
‘지금 대체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지.’
세화는 오랜만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세화, 아니, 지화의 아버지인 김선익 대감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걸까.
세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설령 얼굴이 보인다 해도 세화 자신이 아는 사람일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고작해야 친척들 정도인데. 그나마도 대부분은 워낙에 본 지가 오래되어서 이젠 만난다고 해서 알아볼 수가 있을지…….’
역적 집안으로 몰려 몰락하기 전에도 친척들이 굳이 김선익 대감도 없는 집에 지화와 수천을 보러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작해야 어린 오누이를 걱정해서 종종 찾아와 주는, 오래전 혼자가 되시고 비교적 가까이에 살고 있던 대고모(大姑母, 고모할머니)님 정도였고.
‘지금은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원래도 친척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그나마 있던 친척들도 당시 금군의 손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지화가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침 사월초파일이라고 관등을 보러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자네가 북병영에서 김선익 대감의 밑에 있던 사람이라니, 그 말이 사실인가?”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그래,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안다는 뜻이겠지.”
세자의 차가운 목소리는 세화의 가슴을 찔렀다.
안 그래도 마친 자신이 비슷한 고백을 하러 온 참이 아니었던가.
늘 다정하고 조금은 귀엽기까지 한 세자가 자신에게도 저렇게 차갑게 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결심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세화는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들키면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르지만, 이미 들어 버린 이상 듣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세화에게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역모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퇴직하였다고는 하지만 소인은 북병영에서 김선익 대감의 측근 중 하나였습니다.”
사내의 말에 세화는 숨을 삼켰다.
‘아버지의 측근이라고?’
그건 곧 역적의 측근이었다는 말이니, 목숨을 건 위험한 발언이었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김선익 대감과 자신은 서로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는 의형제 사이라고 했다.
세화가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에 영문을 몰라 하고 있는 사이 세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이리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지?”
“소인은 북병영에 있던 당시 아끼던 부하 하나를 사고로 잃고, 허탈한 마음에 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건 김선익 대감께서 역적으로 몰리기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떠나고 싶어 하는 의형제를 안타까워하면서도 힘들 때는 언제든 찾아오라고 보내 주었던 김선익 대감의 얼굴을, 그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반역의 기미가 있었다면 제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대감을 고발한 자들은 평소에도 대감께 불평불만이 많은 데다가 종종 문제를 일으키던 자들로 대감의 신임을 잃고 있었습니다. 모함이 틀림없습니다.”
간절한 목소리였으나 세자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