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7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75)화(275/326)
‘이자를 믿어도 괜찮을까.’
호랑이를 잡고 동궁 호위로 불려 올 때 이미 실력 테스트도 했었으므로 분명 실력 하나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역심을 품었다면 벌서 세자에게 위해를 가했을 것인데 이자는 단순무식하게도 자기 목숨을 걸고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 똑똑한 편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런 부하의 신임을 받았다면 김선익 대감의 인생도 허무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정말 김선익 대감의 누명을 벗기고 싶을 뿐인가?”
“그렇사옵니다.”
“김선익 대감의 신원이 회복된다고 해도 자네에게 이로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도 말인가.”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어찌 이런 청을 하겠사옵니까.”
하긴 그냥 입 다물고 궁에서 일하는 편이 더 나을 테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세자는 계속 물었다.
“하지만 만약 조사 결과 여전히 누명이 아니고 역모의 주모자들 중 하나라면 어찌하겠느냐.”
“감히 세자 저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어리석은 소인의 목을 베십시오. 다만…….”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베라 말했으면서 갑자기 뒤에 망설임이 따라붙었다.
“다만?”
세자가 확인하듯 되묻자 심호흡을 한 사내는 다시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청했다.
“저 멍청한 조카 놈은 소인과 상관없는 놈이니,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살게 해 주신다면 죽어서도 그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천호는 이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냐.”
“아무 관계도 없는 놈입니다. 그저 일찍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된 데다 키워 준 숙부도 이런 놈인 불쌍한 녀석일 뿐이지요.”
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천호에 대해서도 새삼 의심할 여지도 없다.
세자의 곁으로 올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이나 주었는데 내키지 않는 듯 옹주의 곁에 붙어 있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옹주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호랑이와 대치하기도 했고.
물론 하나뿐인 숙부가 잘못된다면 어찌 될지 모를 일이지만.
‘이자 역시 역적의 잔당이라면 이런 짓을 할 것이 아니라 나를 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목숨을 걸고 나서다니…….’
물론 성 겸사복의 보고를 엿듣고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목숨이 아깝다면 엄연히 아직은 역적으로 못 박혀 있는 이의 일에 이렇게 당당하게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세자는 마음의 정리를 하고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 일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를 할 예정이었으니 자네가 이리 나타날 필요는 없었네.”
“저하.”
시커먼 아저씨가 그리 감격한 얼굴로 쳐다본다고 그렇게 기쁜 일도 아니었으므로 세자는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자네를 계속 이곳에 둘 수는 없겠군.”
역적의 의형제를 궁 안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근신하고 있게.”
“예.”
“……확인을 위해 자네를 부를 수도 있으니 기다리고 있게.”
“……! 예, 저하!”
들뜬 얼굴로 허리를 숙인 사내는 확연한 기대감을 품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가 동궁을 나서기 위해 향한 곳은 하필이면, 아니, 당연하게도 세화가 있는 쪽이었다.
누군가가 그림자 뒤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내는 놀란 듯 소리쳤다.
“누구냐!”
“아.”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당황해 굳어 있던 세화는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사내 역시 도망갈 기색도 없이 앞으로 나온 세화를 보고는 그대로 멈춰 섰다.
“저, 접니다. 세자 저하.”
“세화? 자네가 어쩐 일인가. 이런 시간에.”
오늘은 이미 한 차례 진맥도 마쳤고, 별다른 일도 없었으므로 세자는 세화의 방문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자네는 그만 가 보게.”
“예.”
사내는 세화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비웠다.
세화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아버지의 의형제라니…….’
자식인 세화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니,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북병영에 계신 동안의 일 같은 것은 당시 아직 어리던 지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씩 보내는 서신에는 가족의 안부를 묻는 말뿐, 어린 딸에게 그런 일을 미주알고주알 전해 주는 아버지는 아니었으니까.
‘이젠 기억도 흐릿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냥 무뚝뚝한 분이셨다는 기억밖에 없으니.’
그래도 유일한 아버지였다.
세화가 공부를 하는 것도, 의술을 하겠다는 것도 말리지 않으셨던.
옛 생각을 해서일까, 세화의 낯빛이 썩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챈 세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 자네가 어쩐 일인가. 이리 찾아오는 일이 없는 사람이.”
“바쁘실 터인데 공연히 시간을 뺏은 듯하여 송구하옵니다. 하온데…….”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던 세화는 결국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아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혹 대화를 들었는가?”
“송구합니다…….”
숨겨도 소용없는 일이니 세화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신이 언제 여기에 들어왔는지는 바깥에 지키고 있던 이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저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내 생각은 여전하네. 죄가 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억울함이 있다면 풀어 주어야 할 것이야.”
“그럼 죄가 있다면 천호의 숙부는 벌할 것이옵니까?”
세화의 말에 세자는 빙긋이 웃었다.
“역모에 대해 몰랐던 이를 벌하고 싶지 않다. 나는…… 피를 좋아하지는 않아.”
“그럼 역당의, 자식들도…… 말씀이십니까?”
망설이면서도 세화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조금 민망한 듯 웃으며 답했다.
“역모에 한해서는 연좌제가 잘못되었다고까지 말하기 어렵겠지만…… 김선익 대감의 자식들은 그때 무척 어렸던 데다가 부친과는 오래 떨어져 있었지. 그들이 그 일에 연루되었을 리는 없네. 심지어 그때 나는 그들을 직접 만났지. 그들이 역모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저하.”
“아무것도 모르는 이를 처벌하는 것을 좋아할 만큼 비뚤어지지는 않았거든. 하물며 그 상대가 장차 혼인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으니…….”
조금 괴로운 듯 웃는 세자의 얼굴은, 만약 다른 여인을 생각하며 짓는 표정이라면 질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까워 보였다.
“이런 말을 하면 자네도 조금은 투기를 해 주려나?”
세화는 세자의 소매를 붙들었다.
본래라면 감히 일개 의원이 해서는 안 되는 불경한 일이었으나 세자는 세화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세화? 어찌 그러는가?”
‘말씀드려야 해.’
세화는 자신이 도망쳤던 그날을 떠올렸다.
관등놀이로 주변이 온통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때, 서로의 어린 동생들이 쉴 수 있도록 두고 온 세자와 세화는 처음보다 조금 마음을 열고 편하게 속내를 터놓고 있었다.
세자와 함께 풍등을 날리러 가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함께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흔들리던 지화의 꿈을 깨운 건 집에서 부리던 하인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환청이라도 들은 것일까 고민하며 멈춰선 지화는 곧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가씨!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지, 집이 지금 난리가……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대감마님께서 글쎄!’
평소에도 사내에게는 관심 부스러기도 없던 지화가 설마 사내와 함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하인은 옆에 있던 세자를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주의하게 입을 놀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께서 어찌 되셨단 말이야.’
‘어휴,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끌려가시면, 관비, 아니, 어찌 될지 모릅니다요.’
아마 하인이 지화를 찾아왔을 때, 세자의 귀에도 분명 그 대화는 들렸을 것이다.
‘송구합니다. 저, 저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알겠소.’
하지만 세자는 지화가 유모와 함께 도망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세화가 무심결에 돌아보았을 때, 따라왔던 내관이 무어라 하는데도 고개를 젓던, 자신을 보곤 마치 빨리 가지 않고 무얼 하냐는 듯 눈짓하던 그 소년.
그때의 그 소년이 이리 훤칠한 사내가 되어 재회하였는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끊어진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다시 만나 이리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로 이대로 끊어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세화는 처음 결심한 대로 세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도 했다.
오히려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있었으나 이대로 거짓된 관계를 이어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그 사내와의 대화 때문인지 아직까지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화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저하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잠시만 단둘이서만 말씀을 나눌 수 있겠사옵니까.”
“내게 말인가?”
“예. 지금 꼭.”
뜬금없는 세화의 말이 의외였던지 잠시 침묵하던 세자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설마 드디어 내 부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아니옵니다.”
세화의 단호한 부정에 세자의 뒤를 지키던 이들이 “아앗…….” 하고 아쉬운 한탄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특히 송 내관의 얼굴이 무척 안타까웠는데, 방금도 웬 놈이랑 독대하신다고 하셔서 가슴을 졸였는데 또 뭐냐는 얼굴이었다.
‘평소에는 안 그랬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