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7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76)화(276/326)
세화가 세자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세자의 측근들은 세화에게 대체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세자 저하가 사내로서 취향에 뭐 문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줘서 고맙다는 감정과, 왜 세자 저하를 빨리 안 받아 주냐는 원망이었다.
의원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세화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냐 싶었지만 저들은 원래 세자 저하가 우선인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세자 저하가 좋다고 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냐는 게 궁궐에서의 상식 같은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세자라도 궁녀의 소속에 따라서는 쉬이 건드릴 수 없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세화의 경우는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옹주 자가같이 생각해 주실 분은 없는 거지.’
그러니 세화는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방심하면 궁 안에는 언제든 동궁의 침실로 세화를 밀어 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자 저하 역시 옹주 자가와 마찬가지로 세화의 대답을 기다려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아할 수 없었겠지.’
세자는 뭐가 좋은지 묘하게 웃는 낯으로 측근들을 물러나게 했다.
“세화가 할 말이 있다니 드문 일이라 조금 떨리는군. 그럼 자네들은 방해하지 말고 좀 떨어져 있게.”
“저하, 아니 되옵니다.”
“괜찮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화 의원이 아닌가. 나에게 해를 입히려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지.”
세자가 그리 말하며 히죽 웃자 송 내관이 도리어 당황해 세화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 궁 안에서 가장 인정받고 있는 의원에게 밉보이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저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저희가 그렇게 세화 의원을 불신한다는 뜻이 아니옵고 그저 법도가…… 법도가 그러하지 않사옵니까.”
“응. 됐으니까 좀 떨어져 있게. 방해하지 말고.”
송 내관은 억울하고 서운하다는 얼굴이었으나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어릴 적에는 저러지 않으셨는데 언젠가부터 옹주 자가의 영향을 받으신 것 같다는, 세자가 들으면 질색을 할 생각을 하면서.
“이제 되었는가?”
“조, 조금 움직이시지요.”
세화 본인이 아까까지 남의 말을 엿듣던 처지라 괜히 더 민망했다.
하긴 누군가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내용이라는 건 아까 그 사내나 세화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천호의 숙부라고 했지.’
역당의 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천호 역시 좋을 것이 없는데. 아무리 친조카가 아니라고 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닐까.
아무래도 천호와는 알고 지낸 세월이 있다 보니 아버지의 누명도 누명이지만 천호의 앞날에게도 마음이 쓰였다. 그야말로 동생 같은 아이가 아닌가.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지금 현실도피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하. 사실은 저하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게.”
그렇게 말하는 세자가 너무 다정하게 웃었기에 세화는 더욱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저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말씀드려야 하는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게.”
“저는, 저는…….”
“…….”
언젠가부터 벌벌 떨고 있던 손에 세자의 손이 겹쳐졌다.
마치 이제 놓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느껴져서 세화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저하. 저하께서는 저를 ‘세화’라고 부르시지요.”
“그렇네.”
“하지만, 사실 제 이름은 세화가 아니옵니다.”
“…….”
뜬금없는 말인데도 세자는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저는 그동안 감히 저하를 속여 왔습니다. 저하뿐만이 아니라 옹주 자가께도, 주상 전하께도 거짓을 고해 왔지요.”
세화는 거기까지 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의외로, 세화의 손을 잡고 있는 두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저하?”
“계속 말해 보게. 그래서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
이상한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마치 세자는 세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그 다정한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세화는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이름은 지화예요. 세자 저하.”
“…….”
“세자 저하의 혼약자였고, 부친이 역모로 몰리고 도망친, 김지화가 사실 저예요. 세자 저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세화는 질끈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
“어찌 부르셨사옵니까?”
“성 겸사복이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맛있는 거랑 몸보신 좀 해 줘야지.”
내가 그리 말하자 강원도에서 돌아와 며칠 만에 다시 궁에 나온 성 겸사복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간 밖에서 고생을 많이 했는지 떠나기 전과 비교하면 영 걱정스러운 상태였다.
“역시 소인을 챙겨 주시는 건 옹주 자가밖에 없사옵니다.”
“맛있는 거 좀 먹여 줬다고 그렇게까지?”
“옹주 자가 처소 음식이 맛있다는 건 궁 안에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옵니다.”
“그랬나…….”
사실 음식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베이킹뿐만 아니라 요리까지 섭렵한 송비가 늘 고생해 주고 있었다.
“빵이나 간식은 몰라도 음식은 다른 처소가 더 잘하지 않나?”
“아무래도 각 처소 주인의 성품에 따라서 궁인들이 잘하는 분야가 달라지지 않겠사옵니까.”
“으음.”
오너의 심기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야, 뭐야.
나는 성 겸사복의 몫까지 식사를 내오도록 지시하고 다른 것들을 물었다.
“참, 성 겸사복. 시영원에는 갔어?”
“예? 아니요. 아직 가 보지 않았습니다.”
“저런, 아이들이 걱정하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요즘에는 거의 신경을 안 쓰고 있었지만 원래 성 겸사복은 시영원을 만들기 전부터 나를 모셔 온지라 시영원 사람들도 오래된 이들은 다들 성 겸사복을 알고 있었다.
나 때문에 자주 방문하기도 했기에 아이들은 익숙한 성 겸사복을 삼촌처럼 반가워하면 따랐다.
‘놀이기구를 그럭저럭 잘 돌려 줘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애들이 돌려 달라 그러면 지쳐서 포기하기 전까지 전력으로 돌려 주니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생각해 보니 처음에 시영원에 만들어 둔 한두 개 빼고는 다 시영공원 같은 곳에서 돈 받고 돌려 주니 아이들은 좀 아쉬운 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이들도 갈수록 많이 차분해지는 거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성 겸사복도 묘하게 아이들에게 거리를 두는 듯했다.
하긴 늘 사람한테 시달렸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이제 규모가 있는 곳에서 대부분 시영원의 지방 분점이 있어서 제가 늘 그곳에 들러 서신을 보내곤 했습니다. 옹주 자가 덕분에 무척 편하게 다녔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네. 중요한 나랏일 하러 간 건데 춥고 배고프고 졸리면 서럽고 불쌍하잖아.”
“하하하.”
내 말에 느껴지는 바가 있었는지 성 겸사복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거기서는 늘 서신이 오가는 것처럼 보여서 다들 옹주 자가께 저에 대해 보고하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옹주 자가께서도 그래서 제가 온 것을 알고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성 겸사복이 나한테 곧 돌아갈 거라고 연락을 보냈었으니까 이제 올 때가 됐다 싶었던 거였는데, 성 겸사복 입장에서는 또 그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성 겸사복이 매번 성실하게 일일이 편지 보내는데 걔들이 굳이 또 소식을 전할 건 뭐야.”
“아, 제가 보내는 편지를 미리 읽어 봤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역시 전직 체탐인다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영원 애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오는 걸 함부로 건드리겠어?”
“그건…… 확실히 그렇겠군요.”
“물론 내 편지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 편지를 함부로 읽으면 안 되겠지만.”
편지 담당업무 하는 애들 교육은 더 철저하게 하라고 확실하게 전해 줘야겠다.
“그야 그렇지요. 다들 서신을 보내는데 다른 사람이 내용을 몰래 본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요.”
“앞으로 우정 사업은 계속 확장할 건데 좋은 인상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
그렇게 우리가 하하 호호 하는 동안 계속 옆에 있으면서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은 이가 소리 없이 차만 드링킹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딱한 기분에 말을 걸었다.
“그런데 요즘 천호는 왜 그렇게 너덜너덜해?”
“요즘 주변에서 다들 저를 괴롭힙니다…….”
반쯤 송장 같은 상태로 처량하게 흘러나오는 천호의 목소리에 성 겸사복이 발끈했다.
“괴롭히기는 인마,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조언해 주는 것인데!”
“아니, 저는 옹주 자가의 호위가 아닙니까……?”
성 겸사복의 꼰대 같은, 아니, 그냥 꼰대 발언에 천호가 나름 반격을 했으나, 지친 머리로 꼰대를 이기기는 어려웠다.
“옹주 자가를 지키려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예? 아니, 세자 저하도 아니고 옹주 자가인데요……?”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요?
생략된 뒷말이 저절로 귓가에서 재생되는 듯했다.
맞는 말인데 왜 찔릴까.
하지만 아무래도 성 겸사복의 의견은 천호와 다른 모양이었다.
“너 옹주 자가 지키다가 호랑이랑 싸웠다며.”
“…….”
“…….”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팩트로 때리다니.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찌 알겠느냐. 운동하고 힘 좀 더 키우거라.”
“……예.”
천호는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얼굴이었으나 결국 반박하지는 못했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그리고 그런 천호와 대조적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세화는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 그렇게 보이시옵니까?”
“응. 그렇게 보여.”
얼굴이 아주 싱글싱글해서 환하네. 그냥.
‘밖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온 성 겸사복 어디 상한 데는 없나 진맥 좀 하고, 보약도 좀 지어 달라고 세화를 불렀는데.’
오늘따라 얼굴이 왜 저렇게 밝은지.
‘내의원에 뭐 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세자랑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런 거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