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78)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78)화(278/326)
하지만 활을 쏴서 호랑이를 맞힌다거나 하는 건 보통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남자 주인공의 활약상 아니던가.
좀 멋있는 모습을 부각시켜야 하니까.
‘아무리 남주라도 궁에서 곱게 자란 세자가 호랑이를 잡는 건 좀 무리수 같지만 화살 쏘는 정도는 어떻게 해 볼 만하잖아?’
본의는 아니지만 실제로 나도 했고.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세자는 활약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비교적 자유로운 나와는 달리, 운신의 폭도 좁고 궁 안에서는 늘 주변에 사람을 몰고 다녀야 하는 몸이 아니던가.
어지간해서야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세자가 직접 호랑이에게 활을 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다면 세자 주변 사람들이 일을 안 한 거지.’
사실 성원 세자의 일이 있어서 그런가, 세자의 안전에 관해서는 주변의 반응도 신경질적인 편이고.
물론 내게 워낙 사건 사고가 많았던지라 내 안전에도 제법 예민한 편이지만.
‘지금 세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청 성가셔지거든.’
세자에 대한 호불호와 상관없이 정말로 역심이라도 품고 있지 않은 한 그런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진짜 역심 품은 놈들이 어디 있다는 거고.
“역당이 군사까지 키우고 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구나.”
“소인이 옹주 자가께 괜한 말까지 전한 것 같사옵니다.”
“아니, 알아는 둬야지.”
아마 세자를 통해 아바마마께도 전해졌겠지.
그리고 이걸 빨리 해결하려면 아무래도…….
“성 겸사복이 좀 더 고생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역시 그렇게 되겠지요……?”
성 겸사복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또 한 번 갔다 와야 일의 실마리가 잡힐 것 같으니까.
‘문제가 그것만은 아니긴 한데 그건 세자가 또 알아서 하겠지.’
물론 내 생각이야 어쨌든 직접 움직여야 하는 사람의 의견은 다른 법 아니겠는가.
내심 가지 말라고 해 주기를 바랐던 모양인지 성 겸사복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소인도 이제 좀 쉬고 싶사옵니다. 팔팔한 젊은 놈들이 널리고 깔렸지 않사옵니까.”
“이제 와서 다른 사람 시켜 봤자 성에 차지 않을 테니 어쩌겠어. 그리고 아직 그런 말을 할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이제 쉬어도 된단 말입니다.”
오구오구, 그래써요?
나는 적당히 성 겸사복의 투정을 받아 주었다.
어휴, 고생하고 와서 다시 고생하러 갈 건데 이 정도는 들어준다.
“이번 일은 끝내야지 어쩌겠어. 그래야 이번에야말로 퇴직하지.”
“네…….”
사표를 반려당한 이 시대의 공무원에게는 퇴직의 자유도 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흔들며 성 겸사복을 위로했다.
“이번에도 퇴직 안 된다 그러면 내가 가출할게.”
그 말을 들은 성 겸사복은 포기한 듯 허허롭게 웃었다.
“……그건 그냥 옹주 자가께서 하고 싶으셔서 하시는 게 아니신지요……?”
“에이. 그럴 리가.”
쳇.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그런가. 성 겸사복은 날 너무 잘 파악하고 있군.
“뭐, 나도 이제 나이도 있으니 슬슬 독립을 해야지.”
“그렇사옵니까. 옹주 자가께서 나가시면 그때야말로 저도 퇴직할 수 있겠지요.”
“일단 이번 일 끝나고. 세자 저하 가례도 올리고 그러면.”
“예. 그렇겠지요.”
대충 내 뜻을 알아들은 성 겸사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한테 가 본 지도 오래된 거 같으니 한번 가 봐야겠는데.”
“옹주 자가의 얼굴을 보시면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근래에는 자주 찾아가지는 않았다곤 하지만 그래도 간식 보급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내가 많이 자란 데다가, 이번에 호랑이 일도 있어서 너무 돌아다니는 건 조금 자중하고 있었을 뿐
‘그날 이후로 한동안 몸이 좀 안 좋기도 했었고.’
적당히 산책 정도는 했지만, 몸이 안 좋다는 건 거지 같은 일이다.
이건 젊어도 소용이 없다니까?
‘음. 송비한테 말해서 간식 준비하고, 부왕한테도 한번 가고, 세자한테도 한번 가 봐야지.’
사실 부왕은 살짝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게, 날 볼 때마다 이제 빨리 시집보내야지 하는 얼굴이라 좀 부담스러웠다.
물론 내 앞에 막혀 있는 놈이 있어서 아직 그렇게 노골적으로 굴지는 않으시지만 대화하다 보면 은연중에 느껴지는 압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물론 그보다 지금은 호랑이 일로 내가 많이 놀랐을까 걱정하고 계시기도 하고.’
다들 걱정하는데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도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원래 맹수보다는 사람이 무서운 법인걸.
***
“그 천호라는 아이를 시아의 곁에 둔 세자의 판단이 옳았더구나. 옹주가 무사한 것은 세자의 덕이기도 하다.”
“어찌 소자의 판단 덕이겠사옵니까. 옹주가 데려온 아이이니 옹주의 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근래에 세자는 궁 안의 소란을 정리하느라 바빴으나 부왕과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대리청정 중이라고는 하나 아직 왕은 부왕이었고, 젊은 세자는 수년간 왕위를 지킨 군왕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정무에 관해서는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잃지 않는 부왕은 존경할 만한 왕이지만 그것이 종종 냉엄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 부왕의 옥음(玉音:임금의 목소리)에 유독 감정이 담기는 때는 수영 옹주나, 죽은 성원 세자를 입에 올릴 때였다.
“그 아이가 잃은 것이 많은 만큼 얻은 것도 있어야겠지…….”
“아바마마…….”
왕실의 아픈 손가락. 본인이 들으면 그만하자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겠지만 세자는 부왕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게 제 몸을 살피지 않는 충성심은 드문 법이다. 장래가 기대되는 인재가 옹주를 지키고 있다니 왕으로서는 아깝지만, 아비로서는 기꺼운 일이로구나.”
“소자의 생각도 아바마마와 같사옵니다. 그 재주가 아깝기는 하오나 천호가 옹주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소자도 적잖이 안심이 되옵니다.”
세자의 말에 부왕이 작게 웃었다.
옹주가 없을 때에는 보기 드문 웃음이었다.
부왕께서 세자와 옹주를 차별하시는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둘만 있을 때는 그다지 웃을 일이 없었다.
‘일하다가 웃는 것도 이상하지.’
가끔 세자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을 때에도 설핏 미소를 지으시는 정도다.
어릴 적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젠 어린아이도 아니니 이제 와 그런 것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면 어린 나이에 생모를 잃고도 외로운 기색을 보인 적 없는 어린 누이에게 민망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어마마마께서 옹주에게 신경을 써 주시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친 모녀처럼 살갑게 지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세자 본인도 어마마마께서 중전이 되신 후 한동안은 법도를 지키느라 이전과는 달리 거리를 두는 것이 제법 어색했었으니, 시아는 더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옹주의 궁녀들도 그러했었지. 아무래도 옹주가 인덕이 있는 모양이구나.”
“옹주가 어릴 적부터 아랫사람을 잘 챙기지 않았사옵니까.”
“하기야 옹주가 늘 인덕을 베푸니 따르는 자들도 많은 것 같더구나. 하긴 궁 안에서 그 아이의 덕을 본 자들이 적지 않다지.”
“소자도 그리 들었사옵니다.”
명백하게 동생을 기특해하는 세자의 얼굴을 본 부왕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세자, 나중에 세자가 빈궁을 맞았을 때 시아가 빈궁과 맞선다면 세자는 어찌하겠는가?”
“예?”
세자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지만 다행히 부왕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찌하겠느냐는 말이다.”
“시아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세자빈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누구를 세자빈으로 맞을 것인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세자도 부왕께서 전혀 모르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머리가 꽃밭은 아니었지만, 과연 세자의 생각대로 허락해 주실지는 또 모를 일이었다.
“그래. 하지만 그것은 세자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일을 겪느냐에 따라 변하는 법.”
부왕은 세자에게 다가와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당부했다.
“세자가 누이동생을 총애하는 것도, 여인을 은애하는 것도, 세자빈을 신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세자가 국본(國本)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예. 아바마마.”
아직 다가오지 않은, 하지만 곧 세자가 맞이하게 될 무거운 이야기였다.
“하긴 아직 세자가 빈궁도 맞지 않았으니 대체 언제 이런 고민을 하게 될지 모르겠구나.”
“송구하옵니다.”
“잊지 말거라. 네가 조선의 하나뿐인 국본이라는 것을.”
이제는 네가 아닌 누구도, 감히 당당하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을.
그 사실을, 세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원치 않았던 자리였다고는 해도 형님의 자리였던 이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양보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젠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이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세자를 보며 왕은 또 다른 걱정을 했다.
“세자도 걱정이지만 시아 역시 걱정이구나. 시아의 짝은 세자를 지지해 줄 만한 자들 중에서 괜찮은 자를 골라야 할 터인데…….”
“소자가 열심히 할 테니 시아는 편하게 놔주시지요.”
동생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세자는 애써 말을 돌렸다.
아무래도 그 아이의 맘에 드는 사내를 찾는 것이 쉬울 것 같지가 않은데, 뭔가 맘에 안 들면 정말 혼례 전날 도망치겠다고 나설지도 모를 아이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시아 옆에 있는 천호의 존재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 세자가 이대로 잘만 한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송구하옵니다.”
“내가 어찌 세자를 탓하겠느냐. 나의 부덕함이기도 한 것을. 하지만 최선을 선택해야 했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이 군왕의 도리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왕의 시선은 멀었다.
그리고 세자는 이제 대충 부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아직도 형님을 떠올리고 계시겠지.
어깨가 딱딱해지는 지루한 시간이 끝나고, 다시 제 일터로 돌아오니 익숙한 얼굴이 세자를 반가이 맞았다.
“아, 오라버니.”
아까까지 부왕과의 대화에 오르내린 그 하나뿐인 누이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