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8)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8)화(28/326)
세자의 장례는 국장(國葬)이 아니라 예장(禮葬)이라고 한다.
이걸 이번에 처음 안 건 아니다.
세자빈의 장례도 예장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런데 정말 살면서 가장 알고 싶지 않은 정보 중 하나였다.
‘눈이 안 떠져.’
아무래도 또 울다가 그대로 잠든 날 누군가가 처소에 데려다 놓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눈가가 시원한 걸 보니 눈 위에 물수건을 올려 줬나 보다.
잠은 깼지만 움직이기 싫어 그대로 따끈한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렇게 멍하니 누워 있으니 부모님의 장례식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렇게 도중에 잠이 들었던가.
아니, 그때는 무슨 장례식장 정하고 이런저런 절차에, 나중에는 문상객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길었고.
어느 순간부터 자연히 알게 되니까. 더 이상은 안 될 거라는 걸.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는 오히려 차분했던가.
아, 생각났다.
엄마 아빠 장례 때도 장례 준비하는 동안은 담담하다가 입관 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지.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데 여기서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장례가 착착 진행되니까 나는 계속 울다 잠들다 울다 잠들다만 반복했던 것 같다.
덕분에 그동안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시신도 온전하지 않으시다고.”
“쉿, 조용히. 아기씨 들으실라.”
문밖에서 어린 궁녀들이 소곤소곤 세자에 대한 소문을 떠들어 대는 것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함께 있던 시위들도 다 죽고 다치고, 어휴 어떡해.”
“좌세마만 사지 멀쩡하게 살았다며.”
“그 사람이 호랑이를 잡았다잖아.”
“사람 다 죽고 나서 호랑이를 잡은 거야?”
“글쎄, 한 마리가 아니었다나 봐.”
“예전에는 호랑이가 궁궐에까지 뛰어든 적이 있다더니 세상에.”
그냥 재밌다고 가십을 떠드는 거면 나가서 혼을 내겠지만 지금 저 궁녀들은 정말 무서워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것저것 쉽게 알았고.’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여섯 살 어린아이에게 세자의 죽음에 대해 말해 주는 얼간이는 없었지만, 정신없는 사이 여기저기서 속닥이는 소문으로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은 가능했다.
하지만 역시 제대로 들어야 했다.
‘좌세마를 만나러 가 봐야겠다.’
세자의 마지막을 본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고 남은 시신은 불태운다며, 호랑이가 찾아올까 봐.”
“하지만 정말 여기까지 쫓아오면 어떡해? 왜,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잖아. 호랑이 발자국을 봤다느니, 귀신이…….”
벌컥-
“에구머니나.”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흉흉한 얘기 중이던 궁녀들이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린 궁녀 하나는 부랴부랴 다른 나인들을 부르러 달려갔다.
아마 그들도 어딘가에서 세자 이야기를 하며 몰래 울고 있지 않을까.
“아기씨, 기침(起寢)하셨사옵니까?”
“응. 좀 갈 데가 있어.”
“……물부터 좀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다짜고짜 나가려 하자 이미 내 성질에 익숙해져 있는 나인들은 나를 말리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일단 수발부터 들었다.
“좌세마가 어디 있는지 알아?”
“네?”
나인들의 날 선 시선이 내 잠자리를 지키고 있던 어린 궁녀들을 향했다.
아마 저 애들은 나중에 혼나겠지. 다들 말할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른다고만 하기에 나는 그냥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기로 했다.
***
내가 찾아간 곳은 내의원이었다.
“아기씨, 이런 시간에 어인 일이시옵니까.”
“좌세마를 만나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알아?”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사옵니까?”
나를 알아본 의관이 마침 먼저 말을 걸어 온 덕분에 좌세마를 찾는 것은 쉬웠다.
마침 치료를 받고 있었으니까.
‘사지가 멀쩡하다더니.’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더라.
좌세마는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 얼굴의 반쪽만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피고름이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크게 다친 사람이었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게 사지가 온전히 붙어 있다는 뜻이라면 맞는 말이겠다만.
“괜, 찮은 거야?”
“왕녀 아기씨?”
“일어날 거 없으니 누워 있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세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가 좌세마는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미안, 몸도 편치 않은데. 그래도 좌세마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정확할 거 같아서.”
좌세마의 모습을 보니 세자의 마지막이 어땠을지 저도 모르게 상상하게 되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그런 내 상태를 알아챈 듯 좌세마도 말을 아꼈다.
“듣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들어야겠어.”
“……세자 저하께선 아기씨 고집을 이길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
세자 이야기가 나오자 또 눈물이 나올 듯해 나도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세자 저하께선…….”
“호환(虎患)이란 건 알고 있으니 숨기지 말고.”
사람이 호랑이에게 죽은 이야기다 보니 어린아이에게 해 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좌세마도 역시 난감한 듯 더듬더듬 말을 고르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 후 갑자기 쏟아진 눈 때문에 세자 저하와 저희 시위들 몇 명만 낙오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날, 눈발이 잦아들 것을 기다리던 세자 일행은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도리어 눈길에 말이 미끄러지며 세자는 낙마를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세자가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말 대신 좌세마의 말에 타려는 그때, 기다렸다는 듯 호랑이가 나타났다.
피 묻은 옷 때문이었을까.
호랑이는 가까스로 말에 오른 세자를 집요하게 쫓았다.
시위들이 시선을 분산시키며 세자를 호위하는 동안 좌세마는 목숨을 걸고 호랑이와 대치했다.
“늙은 호랑이였습니다. 움직임이 둔했기에 간신히 강궁(强弓)만으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습니다.”
착호갑사라고 해도 혼자 호랑이를 잡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호랑이의 습격으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 말을 내버려 두고, 눈길에 남은 흔적을 쫓아 도망친 세자 일행을 찾았다.
하지만 당연히 무사히 도망쳤으리라 생각했던 그들은…….
“송구합니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호랑이는 대부분 단독행동을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무사할 거라 생각했던 이들은 또 다른 호랑이의 습격에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좌세마는 방금 전 호랑이 한 마리를 잡느라 화살도 다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 지친 몸으로 또다시 호랑이를 마주했다는 건 살아서 돌아갈 가망이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남은 건 허리에 차고 있던 칼 한 자루뿐.
상처를 입히는 데에는 겨우 성공했으나, 호랑이 앞발이 머리를 스치니 그 순간 의식이 날아가 쓰러지고 말았다.
아마 피하는 게 조금만 더 늦었어도 그대로 즉사했으리라.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이미 흐릿해진 눈앞에는 호랑이의 송곳니가 다가와 있었다.
틀렸다는 생각에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은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좌세마의 숨통을 끊어 버릴 것 같았던 호랑이가 갑자기 몸을 비틀며 울부짖었다.
호랑이의 옆구리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화살이 호랑이에게 박혔다.
동시에 이미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날 쫓아와라!’
그대로 도망쳤다면 좋았을 것을.
바보 같은 세자 저하는 멍청하게 제 시위를 구하겠다고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안 된다고 말려야 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살아남은 것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다친 몸을 이끌고 호랑이의 흔적을 찾아 따라가니 상처 입고 헐떡이고 있는 호랑이와 그동안 잡아먹은 듯한 온전치 못한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남아 있는 옷과 소지품 등으로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구별이 가능했다. 특히 세자의 의장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은 동료의 검으로 호랑이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고, 긴장이 풀린 것인지 그대로 다시 의식을 잃었다.
군사들에게 발견되고, 응급처치를 받은 후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세자 저하께선 대군 대감과 왕녀 아기씨의 그림을 품에 넣고 계셨기에…….”
“……오라버니답네.”
시신을 확인했다는 좌세마의 말에 나는 쓰라린 눈가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쳤어야지.
바보같이.
하지만 세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너무나 세자 오라버니다운 마지막이라,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 아픈 사람을 괴롭혀서 미안. 어서 쉬도록 해.”
“송구합니다.”
좌세마는 왕에게 세자를 지키지 못한 죄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원망스럽지만 이 사람을 벌하면 세자가 죽은 것도 무의미해지잖아.’
분명 세자는 그런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밖으로 나섰다.
이야기가 길어져서인가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기씨. 날이 차옵니다. 어서 돌아가시지요.”
“응. 좌세마, 나올 거 없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픈 사람이 따라오면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아무래도 죄책감이 있는 듯해서 그냥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
날이 어두워서인가 궁녀들은 오히려 든든해하는 것 같았다.
‘궁녀들이 외간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곤란한데.’
여기 있는 내 궁녀들은 어차피 내가 하가할 때 대부분 사가로 같이 나갈 사람들이니 크게 탈 날 건 없겠지만.
그런데 문득 한 명의 시선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의아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아, 송구하옵니다. 아는 얼굴이 보인 듯하여 그만…….”
“아는 얼굴?”
“영빈, 아니 홍 숙원 처소의 나인인 것 같아 조금 신경이 쓰였사옵니다.”
조가이는 영빈 처소의 나인이었다 보니 그쪽 소속 궁녀들을 훤히 꿰고 있었다.
나를 배웅하러 나온 의원이 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 저하의 예장으로 취영당 궁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워진 탓인지 근래에 내의원 방문이 잦습니다. 숙원 마마님은 원체 심화(心火)가 깊은 분이신지라 그동안도 탕약을 자주 들이곤 했사옵니다.”
“흐음. 그런가.”
홍 숙원이 세자의 예장 소식을 듣고는 저하께 받은 은혜의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하고 싶다며 마지막 길에 인사를 올리게 해 달라고 통곡을 해 댔다던가.
덕분에 일시적으로 허락을 받았다고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이제 세자가 없으니 그들을 보살펴 줄 이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럭저럭 참아 줄 만했다.
하긴 경언군 모자야 자업자득이지만 우울증이 생길 환경이긴 했다.
궁녀가 내의원에 오는 것 자체야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내 입장에서는 썩 보기 좋지도 않았지만.
“가자.”
“예, 아기씨.”
나는 천천히 걸으며 좌세마와 대화를 나눴다.
“다른 익위사들도 사고사가 되겠지?”
“세자 저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전하께서도 그들을 외면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응.”
늘 세자를 뒤따르던 세자익위사 관원들도 대부분 아는 얼굴이었기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역시 아는 사람의 죽음 같은 건 겪고 싶지 않다.
“세자익위사는 어떻게 되지?”
“새로운…… 세자 저하를 모시기 위해 재편성될 겁니다.”
새로운 세자라.
당연히 나와야 할 얘기였지만 남의 입으로 들으니 씁쓸했다.
“좌세마는?”
“소인은…… 더는 자격이 없으니 관직을 그만둘 생각입니다.”
“세자 오라버니는 원하지 않을 텐데도?”
좌세마는 몰락 양반 출신으로 목숨을 걸고 착호갑사가 되고, 세자와 연이 닿아 좌세마까지 힘들게 올라왔다 들었다. 그런데 그만둔다고?
“수년간 세자 저하를 모셔와 놓고 이제 와 새로운 주군을 모실 염치가 없습니다.”
“응…… 그래도 그만두기 전에 한번 찾아오도록 해.”
“예, 아기씨.”
세자가 아끼던 사람인데 뭐라도 줘서 보내야지.
본래라면 왕이 퇴직금을 챙겨 줄 거 같긴 하지만…… 그럴 정신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날도 추운데 그만 들어가. 세자 오라버니가 살려 준 목숨이잖아. 소중히 해야지.”
“……예, 아기씨.”
내 말이 의외였는지 좌세마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팔을 붙잡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심호흡하듯 숨을 들이마시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께선, 아기씨가 어떻게 성장할지 무척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총명하고 현명한 분이라고.”
“……그래.”
“부디 귀체 보중하십시오.”
“응. 좌세마도 몸조심해.”
중문 앞까지 따라온 좌세마를 돌려보내고 처소로 돌아가는 길은 어둡고 적막했다.
이 밤중에 제등 불빛에 겨우 의지해 다니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다시 태어나서 지난 수년간 궁이 이리 삭막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상중(喪中)이니 당연한 일인가…….’
객관적으로도 성실하고 온화한 성품의 세자에 대한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낙마로 인한 사고사로 되어 있지만 알음알음 소문은 퍼져 있을 터.
얼마 전에도 호식(虎食)이니 창귀(倀鬼)니 떠들어 대던 입 가벼운 궁녀들이 걸려서 끌려갔다.
아까 궁녀들이 말하던 소문은 나 역시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호랑이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느니, 죽은 세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느니 하는 낭설들.
“창귀라…….”
“아기씨, 그런 흉한 말씀은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응. 가이도 그게 뭔지 알아?”
창귀란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혼이 자신의 지인들을 불러 호랑이 먹이로 갖다 바치는 노예가 된 것을 말한다.
박지원의 호질 덕분에 수험생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단어였다.
확인차 물어보자 조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얼굴로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아기씨, 혹시 아기씨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도 절대 대답하시면 아니 되셔요.”
“그런 속설을 믿어?”
창귀가 된 영혼은 지인들의 이름을 불러 꼬여 낸다고 한다.
이제 궁 안에서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젊은 남자는 없으니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야말로 창귀의 소행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아야.
스산한 겨울바람 소리에 섞여 날 부르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