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8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82)화(282/326)
세자의 뜬금없는 말에 김회엽은 내심 뜨끔했지만, 별다른 내색은 없이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은 북병영에서 김선익 대감을 알게 되었고, 천호와 만나기 전까지 함경도에서 벗어난 일이 없는 몸이 아니던가.
당연히 역모 사건 당시 한양에 있던 천호와 천호의 누이는 만나 본 일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 세자도 과거 한양에 있던 수천에 대해 묻는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이리 대답하는 것도 거짓은 아니었다.
“아니요. 만난 적은 없사옵니다.”
“그럼 얼굴도 모르겠군.”
“그렇사옵니다.”
천호가 사실 김선익 대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김선익 대감의 역모 누명을 벗긴 다음의 일이었다.
물론 김선익 대감이 당시 함경도에서 지내며 얻은 아이들이 있었다고 들은 바는 있었지만, 워낙 연치가 어리기에 만나 본 적은 없었다.
‘그 아이들이야말로 생사가 묘연한데…….’
찾아보려 했으나 당시의 일을 알 만한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 죽었거나 소식이 끊긴 상태였다.
당시의 천호보다도 더 어린 아이들이었으니 아마 역당의 자식이라 해도 죽이지는 않았을 터.
누군가가 데리고 도망이라도 쳤다면 자신의 출신도 모르고 양인으로 살고 있을 수도, 혹은 노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찾는다 해도 어찌할 것인가.
천호 한 놈 어찌 키워 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현실이었다.
친혈육인 천호조차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생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꺼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슬쩍 지나가는 말로 흘렸을 때도 그저 복잡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하기야 천호 본인도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되어 난생처음 본 아저씨에게 몸을 의탁한 처지였다.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이복동생을 어찌 찾아달라고 할 만큼 염치가 없는 아이도 아니었고.
‘그런데 저하께서 왜 이런 것을 물으시는 거지.’
김회엽의 의문에 답해 주는 듯, 뜻밖에도 세자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했다.
“방금 자네에게 약을 전해 준 이가 누구인지 아는가?”
“예? 잘…… 모르겠습니다.”
복식을 보면 분명 내의원 의원이었다.
‘이런 곳까지 와 있는 것을 보면 세자의 신임을 받는 의원이겠…… 아, 혹시?’
그리고 세자의 신임을 받는 여의라고 한다면 생각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 김회엽의 마음을 읽은 듯 세자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수영 옹주의 불치병을 고친 의원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있겠지?”
“예, 예에.”
“지금 여기 있는 의원이 바로 그 장본인일세.”
“…….”
조선 팔도에 수영 옹주를 고친 의원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유명한 의원이건만 수영 옹주의 손에 의해 발간되는 신문 덕분에 그에 대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간자(間者)들조차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의 신뢰를 받고 있는 세화와 성지라는 두 여의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세자가 총애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 거 같은데, 그렇다고 굳이 이런 곳에까지 불러들여 직접 약을 전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김회엽은 아직 세자의 옆에 서 있는 세화를 의아한 얼굴로 힐끔거렸다.
이번에도 그의 마음을 읽은 듯한 세자가 답을 내려 주었다.
“여기 있는 세화 의원이 실은 김선익 대감의 여식이네.”
“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던 김회엽은 얼른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자신에게 묵례를 하는 세화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 닮은 것 같은데.’
세화의 얼굴에서는 자신이 기억하는 김선익 대감의 얼굴도, 근래에는 좀 보기 힘들어졌지만 수년간 매일같이 봐 왔던 천호의 얼굴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 편이 나은 건지도 몰랐다.
‘아니, 그래도 잘 뜯어보면 어딘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든 익숙한 얼굴을 찾아보려 세화의 얼굴을 뜯어보았으나, 세화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니 그 역시 자중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과년한 여인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은 그도 충분히 잘 알았다.
그리고 슬쩍 세자의 눈치를 보았다.
세자가 그 사실을 알고도 세화를 곁에 두고 건강을 맡기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 걱정할 거 없네.”
“저, 저하…….”
“자네가 김선익 대감의 누명을 벗겨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는 걸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떠나기 전에 알려 주는 것이네.”
“지금 그 말씀은…….”
세자가 지금 김회엽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세자는 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그가 뜻밖의 사실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명했다.
“이대로 궁을 떠나 서대문 앞에서 성 겸사복을 만나 떠나게. 여정에 필요한 것은 그가 준비해 두었을 것이네. 그의 얼굴은 알고 있을 테지?”
“예, 예에. 저하.”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네.”
그렇게 말하고 세자는 그가 인사하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가 버렸다.
세화 역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그대로 세자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아니, 아니, 이게…….”
세화를 붙잡아야 하는데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세화는 돌아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세화를 붙잡고 천호에 대해 얘기한다는 건, 세자 저하께 거짓을 고했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털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중에 밝혀질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신뢰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자 저하께서 명하시었는데 뭘 하고 있는 것이오. 어서 가 보시오.”
“아, 예.”
그런 그를 마뜩잖게 보던 송 내관이 다가와 다그치자 김회엽은 일단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
그 유명한 세화 의원이 김선익 대감의, 형님의 딸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대체, 이래도 되는 건가?’
본인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인 것이 억울한 정도로 김회엽 혼자 혼란스러웠다.
대체 세자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건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두 사람이 범상치 않은 관계 같다던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천호 그놈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아니, 그런데 정작 천호는 모르고 있는 거잖아?’
거리가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궁 안에 있으니 만나서 세화가 누나라는 사실은 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서대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성 겸사복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리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고…….
“아, 천호라면 지금 궁 안에 없을 거요.”
“예?”
물어물어 찾아간 옹주 자가의 처소 앞에서, 김회엽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옹주 자가를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옹주 자가께서 궁 안에 아니 계시다고, 옹주 자가를 호위하고 있는 천호 역시 궁 안에 없다는 말이었다.
원래 놀러 나가는 일이 잦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근래에는 조용히 궁 안에만 계신다고 들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이렇게 엇갈릴 수가.
‘물론 옹주 자가께서 비원(秘苑)같은 데로 산책을 가셨으면 마찬가지로 못 만났겠지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다른 사람을 통해 따로 말을 전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말을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죄다 궁인들이지 않은가.
세화가 내의원에 있는 것을 보면 신분을 속였을 터인데, 만약 말이 잘못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세화와 천호 둘 다 위험해질 수 있었다.
김회엽은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직도 궁 안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 들켰다가는 또 뭔 소릴 들을지 몰랐다.
‘젠장.’
이리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동안 오누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니.
세화가 유명한 것과 별개로, 그는 세화에 대해 여러 가지 들은 것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호가 가끔 궁에서 세화를 만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었으니까.
심지어는 둘이 제법 말을 텄는지 전에 회엽이 몸이 안 좋다고 했을 때, 천호가 ‘숙부. 몸이 좀 안 좋으면 세화 누…… 의원님한테 부탁해서 진맥이라도 받아 보실래요?’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워낙에 바쁜 사람이지만 그 정도 편의도 봐줄 수 있는 사이라고 했던 걸 보면 제법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는데.
‘반드시 증거를 찾아와 누명을 벗기고 남매가 만나게 해 주어야지…….’
누이가 그리 가까이에 있었는데 지금껏 그것도 몰랐다니.
천호 그놈이 아닌 척하면서도 잃어버린 누이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타지에 계시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나이 차가 나는 누이밖에 없었을 어린아이가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누이와 헤어져 시커먼 아저씨들과 살아야 했다.
‘하나도 티를 안 내서 그런 생각조차 안 해 봤는데…….’
애초에 자신도 그리 살가운 성격이 되지 못하니 아이를 그리 잘 보살펴 주지는 못했었다.
주변에서 천호를 보며 안쓰러워하는 것을 보며 뒤늦게 그런 것에 생각이 미쳤지만…… 넉살 좋아 보이는 아이는 누군가에게 쉬이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내가 키웠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도 많고.’
도망칠 당시 하인이 배신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어린놈이 속을 내보이지 않게 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그 일이 없었고, 계속 누이의 손에서 자랐다면 훨씬 솔직한 성격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서대문이었다.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성 겸사복과 관리로 추정되는 이 하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성 겸사복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천호가 유난히 옹주 자가를 따르는 것도 역시 그때의 기억 때문이겠지.’
한양에서 도망친 그날.
천호의 도주를 도와준 것은 어린 옹주 자가였다고 들었다.
입고 있던 옷을 천호에게 입혀 여자아이로 변장까지 시켜가며 도망치게 했다고.
그러고 보니 천호의 말로는, 그때 천호의 누이는 세자 저하와 함께 있었다고 했다.
어린 천호는 어째서 둘이 함께 있었는지도 잘 몰랐겠지만, 한양에 올라와 궁에서 일하며 듣게 된 것들이 있었다.
세자가 믿어 주지 않는 것은 야속하다 생각했지만, 어쩌면 세자야말로 그날 일이 누명이기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바라고 있지 않을까.
지금 세화의 존재는, 떠나는 김회엽에게는 일종의 족쇄였다.
그가 정말 김선익 대감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그 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증좌를 찾아내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