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8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85)화(285/326)
“혼례복을 말씀이시옵니까?”
“응.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들어가는 옷이니까. 그래도 평생에 한 번……. 음, 아마도. 아무튼 그런 귀한 옷인데 좀 공들인 옷을 입고 싶지 않겠어?”
내 말에 민 상궁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리해 주신다면 모두 기뻐할 것이옵니다.”
“흠. 한 벌 만드는 데 얼마나 들려나.”
“예산을 올리겠습니다.”
혼례복은 관아에서 대여해 주기도 한다는 얘기도 들은 거 같은데.
‘시영원에 사람이 많으니 여기는 우리가 자체적으로 해결해도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나 여기 와서 전통 혼례 본 적이 별로 없네.
‘사실 남의 혼사 얘기할 때가 아닌데…….’
누구보다 혼인이 절실하신 세자 저하를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니야, 다 잘되고 있어.’
세자가 빨리 세자빈을 맞아야 했다.
성 겸사복도 함경도로 떠났으니 뭔가 단서를 찾아 돌아올 것이고, 그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도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럼 나도 독립이야.’
놀러 나와서 번거롭게 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가로 가서 편히 쉬면 되는 것이다.
“오. 아, 아기씨. 저 좀 도와주세요.”
“애들이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남의 일이라고 너무하세요.”
천호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데 괜히 우는소리를 하며 도망쳤다.
본인이 다 큰 걸 모르는 대형견 같달까.
민 상궁은 천호 몫의 차까지 내려 주었다.
“곧 혼사가 있을 거 같다는데 그때 또 구경이나 나오자.”
“그럼 좋지요. 저도 혼례를 제대로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어, 그래?”
“예. 돌아다니면서 본 적이 있긴 한데…… 아, 자매와 형제가 함께 혼례를 올리는 거 본 적 있어요.”
“와, 합동결혼식.”
생각해 보면 합동결혼식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신부들은 옷이 무거워서 잘 움직이질 못하니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여럿이 있는 게 긴장도 안 되고 나을지도.
옷 때문에 못 움직인다니 차별이다 싶을 수도 있지만 서민들에게는 평생에 유일하게 원삼(圓衫) 같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을 수 있는 날이었다.
나는 옹주라서 예복으로 입…… 아, 많이 커서 새로 지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혼례 때는 활옷(*공주나 옹주가 가례(嘉禮, 혼례) 때 입는 대례복) 입어도 되던가.’
신분제 사회답게 차별도 엄연히 있지만, 적어도 혼례 날 하루 기분 내는 것에 인색한 세상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복식 조사해서 기록에 남기라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 지역마다 몇 벌씩 좀 만들게 할까?
“생각해 보니 대여업도 괜찮네…… 수모(手母:전통 혼례에서 신부의 수발을 드는 전문직 여성)도 있으면 좋고.”
카탈로그 만들어서 양반가에 뿌려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양반가는 가난해도 체면은 챙기는 편이라서 수요가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원래 혼례복은 죽을 때 무덤까지 가져가던데.’
평생의 한 벌뿐인 가장 화려한 옷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어느새 아이들에게서 풀려나 겨우 돌아온 천호는 내가 또 사업 계획을 생각하는 걸 보곤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얘기가 거기로 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나도 모르겠다. 이젠 그냥 병이 아닐까??”
나랑 천호가 헛소리를 주고받고 있는데 옆에 있던 민 상궁은 흐뭇하게 웃었다.
“옹주 자가께서 평소와 다름없이 강건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내가 일하는 게 안심인 거야??”
“사람이 변하는 것이 무서운 일 아니겠사옵니까. 어찌 변할지 모르니까요.”
“민 상궁은 여전하네…… 아니, 예전 생각하면 많이 둥글어진 거 같기도 하고.”
물론 지금도 조금 딱딱해 보이지만 궁에 있을 때의 딱딱하던 민 상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야 엄격하던 궐과 비교할 수 없지요.”
“음. 그랬나.”
그냥 민 상궁이 엄격했던 거 같은데.
“그런데 소인이 궁에 있던 시절을 기억하시옵니까?”
“아……. 약간?”
오래전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너무 어릴 때의 일이었다.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을 뿐, 사실 10년 전 일들은 나도 이젠 기억 희미해.
그러니 이전 생의 일도 꽤 많이 까먹었다.
되새기지 않는 기억이란 휘발되는 법이고, 내가 남들 몰래 뭔가 기록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쯤에는 내가 읽은 소설의 내용도 이미 많이 잊어버린 상태였다.
좀 더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워낙에 이것저것 본 탓에 뒤섞이기도 했고.
‘슬슬 무섭네.’
이제 주인공들이 알아서 잘 헤쳐 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꽃길을 깔아 줬……지는 않지? 아마?
애들이 그래도 고생 많이 했어…….
민 상궁이 들고 온 보고서를 읽던 내 눈빛이 뜬금없이 아련해지는 것을 눈치챘는지 옆에 있던 천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니야, 이만 가자.”
“또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아, 난방비 때문에,”
보고서를 보니 역시 날이 추워 난방비가 많이 들고 있던 것이 신경 쓰였다.
아직은 환경오염 걱정할 때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아무리 땔감에, 숯에, 대비를 해도 모자라게 될까 봐 걱정이란 말이지. 이젠 아예 봄에 나무 심는 날 만들어서 나무도 심게 해야겠어.”
“…….”
“삼림 사업은 장기적 안목으로 봐야지…….”
그렇게 석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천호였다.
“왜?”
“아닙니다. 여전히 일이 많아서 바쁘시구나…… 싶어서요.”
“실없기는. 가자.”
“예.”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 게 아닌 것 같은데도 여기저기 볼일을 적당히 마치고 돌아가려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천호도 집에 가 본 지 오래되지 않았어? 이제 슬슬 괜찮을 거 같은데 집에 가 볼래?”
“어어. 아무래도 겨울에는 궁궐이 따듯해서 좋긴 합니다.”
“그래서 안 들어가는 거야? 숙부가 걱정하겠다.”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만 뭐…… 알아서 잘 사시겠죠.”
애가 보기보다 드라이하네.
“숙부가 들으면 서운해하겠어.”
“키워 준 은혜가 있기는 하지만 가족이라 해도 피차 중요한 게 다르니까요.”
“?”
뭔 소리람, 대체.
‘애 키운 공은 없다더니.’
원래 이런 데 쓰는 말은 아닌데 왠지 갑자기 떠올랐다.
“내일도 나가십니까?”
“응. 일단 왜?”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확실히 집에 못 가 본 지 좀 된 거 같아서요.”
“아, 그럼 집에 가 보지? 하루 정도 천호 없어도 괜…….”
천호의 말에 역시 좀 쉬는 게 좋겠다 싶어 쉬라고 종용하는데, 뜻밖에도 천호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안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집에 가는 게 그리 급한 것도 아니고요.”
“아니, 숙부가 걱정하지 않아?”
“제가 어디서 뭐 하는지 알 텐데 뭐 걱정씩이나요.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지 않겠습니까.”
“뭔 일이 있을 것도 없는데.”
“아무래도 옹주 자가 주변은 안심할 수 없지요.”
“으음. 분하지만 반박할 수 없군.”
성 겸사복도 생각보다 빨리 떠난다고 하니까 천호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긴 한데…….
“그래도 너무 혹사시키는 거 같아 미안하네.”
“뭘 새삼 미안해하고 그러세요. 제가 옹주 자가 지키는 건 당연한 건데.”
“당연……한가.”
“그럼요.”
너무 당연해지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인데 천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었다.
나는 어쩐지 귀여워서 천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기분 나빠 할 만도 한데 천호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았다.
“그럼 이제 또 어딜 가실 겁니까?”
“음 애들한테 생존 신고 했으니까 세자…… 성원 세자 오라버니 일 좀 알아볼까 하고.”
그때 얘기 들은 것도 있어서 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내 말에 천호는 일단 의심스러워했다.
“또 위험한 일 하시는 거 아니죠?”
아니, 궁녀들이나 퇴직한 전직 익위사 사람들 사는 데 좀 가 보려는 거뿐인데.
“세…… 오라버님께는 말씀드리신 겁니까?”
“음. 말해야 할까.”
“신경 쓰시지 않겠습니까.”
“으음. 얘기는 해 놓을까.”
멀리 간다 그러면 걱정하겠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도 너무 먼 곳은 좀. 물론 말 타고 나가면 제법 멀리까지 갈 수 있겠지만 그래 봤자 한계는 있었으니까.
‘민 상궁을 통해서 궁녀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대충 확인해 뒀고, 그래도 일단 중전이랑 세자한테는 말을 해 놓을까.’
이상한 오해라도 생기면 그렇지.
사람들 시선이라는 게 늘 그런 법이고.
***
“성원 세자 말입니까?”
“예.”
중궁전에 간식 들고 찾아가서 성원 세자를 모시던 이들을 찾아가 보려 한다고 하자 중전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성원 세자가 그립고 세자를 모시던 사람들을 챙겨 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고 적당히 핑계를 만들어 얘기를 하니, 그럭저럭 납득하는 얼굴이었지만 썩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예?”
“아마 그쪽에서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엄청 신경 쓰여요.
“그러고 보니 성원 세자 오라버니의 궁인들은 전부터 소녀를 싫어했지요.”
“…….”
“중전마마께서는 그 연유를 아시옵니까?”
중전은 내 말에 조금 복잡한 얼굴을 했다.
“중전마마?”
“그들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지만 이젠 다 지난 일입니다. 너무 개의치 마세요.”
“어찌 소녀가 오라버니와 오라버니를 성심으로 따르던 이들의 흉을 보겠사옵니까. 그저 어린 시절부터 조금 의아했던 것뿐이옵니다.”
중전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망설이더니 곧 한탄조로 말했다.
“성원 세자는 욕심이 없고 성품이 올곧은 이였지요. 하지만 그 주변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의문을 알아챈 듯 중전 한숨처럼 웃었다.
“전하의 총애가 성원 세자가 아닌 옹주에게 가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뭐래.
“설령 소녀가 총애를 받는다 한들 어찌 적장자이신 세자 저하께 비하겠사옵니까?”
물론 내 동복형제가 생길 수도 있지. 실제로 태어나지 못한 동생도 있었고.
하지만 이미 장성한 적통 세자가 있는데 후궁한테 아들 서너 마리 정도 더 생긴다고 뭔 큰일이라도 나는지?
심지어는 이미 다른 후궁 소생 아들이 둘이나 더 있었잖아.
거 그렇게 급하면 세자 닦달해서 빨리 후사나 보게 할 것이지. 왜 애먼 사람을 잡아?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입니다. 옹주같이 욕심 없는 사람만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저 그럭저럭 탐욕적으로 살고 있는데요…….
“이미 지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하기야 이미 성원 세자도 없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요.”
중전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말을 하면 왜인지 더 불길하게 느껴지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