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8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87)화(287/326)
나는 세자와 대화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다른 길로 빠졌다.
“처소로 돌아가지 않으시옵니까?”
“으음. 생각할 것도 좀 있고, 운동 겸.”
“너무 과하게 움직이시는 것도 좋지 않사옵니다.”
“알았어. 적당히 할게.”
전에 습격당한 곳과는 다른 방향이었지만 궁 안에서 산책을 할 만한 곳들은 대체로 인적이 드물다 보니 다들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춥기도 하고.’
내가 누구랑 대화라도 하게 되면 내 뒤를 따르는 궁인들은 다들 멈춰 서서 대기 타야 하는 처지였다.
이건 왕실 사람들에게 배속되어 있는 궁인이라면 대부분 비슷했다.
내가 아까 세자랑 대화하다 왔으니 그때도 다들 밖에 있어야 해서 추울 테지.
나름 옷을 따뜻하게 입히긴 했지만, 가만히 서 있어야 하니 추울 수밖에 없을 거다.
“혼자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 자네들은 따라오지 말고 바람 안 부는 안쪽에 있게.”
“그리할 수는 없사옵니다.”
“천호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추울 거 아냐.”
“…….”
내 말에 천호가 ‘아니, 그럼 저는요?’라고 묻고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듯했으나 나는 못 본 척했다.
너 때문에 이러는 거란다.
전에도 천호와 단둘이 있을 때 호랑이가 나타났지만 나를 무사히 피난시켰던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다들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내 뒤를 따라온 천호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세자 저하께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으셨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적당히 궁인들과 멀어진 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까지 확인한 후 나는 천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누군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처소로 돌아가면 아무래도 천호랑 단둘이 있기 어렵고.’
내가 어린아이일 때도 궁녀들은 어지간하면 나를 누군가와 단둘이 두지 않았는데, 지금처럼 성장한 나를 내 또래 소년인 천호와 단둘이 방 안에 있도록 둘 리가 없었지 않은가.
천호는 내 말에 조금 멈칫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레 가까이로 다가와 나와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천호 숙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저희 숙부 말씀이십니까? 한동안 집에 돌아가질 못해서 저도 보질 못했는데……. 헉, 혹시 뭔가 죄를 지어서 옥에……?”
“아니아니, 그런 거 아냐.”
‘불경죄인가요?’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숙부에 대한 신뢰도가 무척 낮은 모양이었다.
“천호의 숙부가 오라버니 명으로 함경도로 갔다는데 그것도 못 들었어?”
“저희 숙부가 세자 저하의 명으로 함경도에요?”
“음. 몰랐구나.”
이 숙질(叔姪) 사이 이대로 괜찮은 건가. 단둘뿐인 가족이 이런 것도 모르고 있어도 괜찮나?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숙부가 옹주 자가 처소로 찾아왔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중요한 일이면 뭐 서한이라도 남겼겠거니 했습니다만, 서한은커녕 전언(傳言)도 없어서 별일 아니겠거니 했지요.”
“으음.”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의 천호를 보며 나도 조심스레 물었다.
“천호. 혹시 숙부랑 사이 안 좋아?”
“아니,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천호의 얼굴을 보니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복잡해 보이는데 괜히 파고들지 말자. 직장 상사가 집안 사정에 너무 관여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 정도로 막역한 사이는 아니기도 하고…….
“남자들끼리라 그런지 피차 그렇게 살갑게 챙기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가? 으음.”
성원 오라버니랑 지금 세자를 보면 성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세자 저하와 옹주 자가처럼 각별하게 챙기는 사이도 아니고요.”
“으으음.”
내가 별로 납득하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천호도 어색하게 웃으며 갑자기 깊은 가족사를 던졌다.
“음, 조카라고 해도 친조카도 아니고요.”
“……아니, 그런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일부러 그 얘긴 피하고 있는데 바로 말하네. 나는 모르는 척 적당히 대꾸했다.
“닮지 않았다는 생각은 했는데 친 숙부는 아니었구나.”
“예에. 제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를 거두셨다고요. 그래서 그런가, 아무래도 혈연 같은 끈끈한 관계는 아니죠. 물론 만나 본 적도 없는 혈연보다는 이쪽이 더 가족 같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 정이 들지 않았을까?”
“정이야 들었겠습니다만…… 뭐라고 할까요. 숙부한테는 아무래도 저보다는 제 아버지 쪽이 더 중요한 것 같으니까요. 뭐, 없는 형편에도 아버지를 생각해서 저를 거둘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입니다만…….”
“…….”
너무 쿨해서 춥다. 천호야…….
‘하지만 어린애가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썩 좋은 일은 아닌데.’
양육자와의 신뢰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얘기잖아.
나는 손을 뻗어 천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키가 커서 좀 힘드네.
“어린애가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아하하하.”
천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씨익 웃었다.
“그렇게 적정하실 거 없다니까요. 숙부가 그런 분인 건 잘 알고 있고요, 단지 현실적으로……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숙부는 저 없이도 잘 사실 분이니 딱히 걱정되진 않거든요. 아, 물론 저도 그렇고요.”
내 기준 아직 미성년자인 애가 보호자를 상대로 이런 소리를 하니 무척 걱정스러운데.
그렇지만 이걸 뭐라고 하자니 또 남의 개인사를 너무 건드리는 것 같고.
답답한 기분에 쓰다듬던 천호의 머리를 꾹꾹 누르자 천호가 킥킥 웃으며 몸에 힘을 풀듯 자연스레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음…… 혹시 도움이 필요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해야 한다?”
“도와주시게요?”
“그럼.”
“……옹주 자가다운 말씀이세요.”
천호의 대답을 들으며 무심코 아래로 시선을 내렸던 나는 천호의 손이 애매하게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머리에서 손을 뗐다.
차렷 자세로 머리만 숙이고 있는 거 좀 어색하지.
“음. 천호 숙부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이 이상하게 길어졌네.”
“함경도 출신이니까 뭔가 아는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고개를 들며 나와 눈이 마주친 천호가 추위 때문에 상기된 얼굴로 눈꼬리를 내리며 사르르 웃었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하하. 걱정 마세요. 숙부는 누가 죽인다고 쉽게 죽을 사람도 아닌걸요.”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란다.”
“적어도 제 도움은 필요 없는 분이시죠.”
“그야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그렇겠지.”
호랑이를 잡는 위용을 봐도 뭐 그쪽으로는 그리 걱정할 일이 없겠다만…….
음. 확실히 지금 전개로는 세화 아버지의 누명이 풀려야 할 테니까.
하지만 누명 씌운 놈들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 아니다, 지금 그 사병 양성했다던 역당들하고 관계가 있으려나?
‘하지만 그럼 진짜 위험한 거 아닌가?’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천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걱정은 옹주 자가께서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으음. 성 겸사복도 같이 갔으니까 괜찮겠지…….”
“아아, 그러고 보니 정작 그 아저씨가 떠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숙부하고는 못 봤는데 성 겸사복은 봤냐고.
어이없어하는 나와는 달리 천호의 반응은 여전히 시원했다.
“두 분이 같이 가셨다면 그건 진짜 괜찮을 거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두 분이 의기투합할 게 두려울 정도고.”
“왜?”
“아마 나중에 제가 안 괜찮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저런…….”
그러고 보니 둘 다 천호를 강하게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었지.
분명 남 일일 텐데 불쌍한 것도 사실이었다.
“뭐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죽을 정도도 아니고요.”
무슨 일을 겪은 거야, 이 아이.
“너무 괴롭히면 말해. 과하게 하지 않도록 한마디 해 둘 테니.”
내가 주먹을 꽉 쥐며 그리 말하자 천호가 멋쩍은 듯 하하 웃었다.
“힘들긴 한데 필요하다고 하면 또 틀린 말은 아니어서요.”
“왜 필요해. 아, 역시 무과 보게?”
“아니요. 옹주 자가 옆이 의외로 위험한 거 같아서요…….”
나 때문이었냐!
“직장에 불안감이 느껴지면 퇴직 신청할래?”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거든요? 어차피 몸 쓰는 일을 하면 다칠 위험성은 있는 법이지 않습니까?”
“음. 그야 그렇지?”
“그럴 거라면 차라리 옹주 자가를 지키는 편이 더 보람 있잖아요.”
“그러냐…….”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고 조금 부끄러운 듯 싱긋 웃는데, 이놈 참…….
‘이거 지금…… 나를 꼬시는 건가.’
나는 잠시 혼란을 느꼈으나 다행히 곧 자의식 과잉을 물리칠 수 있었다.
같은 높으신 분이라도 시커먼 아저씨보다는 또래 여자아이를 지키는 데에 더 보람을 느낄 나이이긴 하지.
나는 상사를 잘 보필하는 천호에게 기특하다는 의미로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음.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해야 한다?”
“예, 옹주 자가.”
간식 좀 더 줘야겠다.
그러고 보니 천호 괴롭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 같이 출장 간 셈이니 천호한텐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머리가 복잡한데.’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궁인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만 들어가자. 내일은 성원 세자를 모시던 궁녀들한테 갈 거니까 일찍 준비해 둬.”
“예. 내일은 멀리 가시니까 옹주 자가께서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응. 그래야지.”
아직 겨울이라 새벽에 나가면 춥고 어두울 테니 솔직히 일찍 나가기 싫지만, 가겠다고 한 게 나였으니 내가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로 돌아가 중요한 일들을 서둘러 해치우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얘는 언제 왔담.”
“목욕도 시켰답니다.”
니아아옹-
보송보송한 고양이 한 마리가 뭔가 시위하듯 나에게 매달리기에 모처럼 보송보송하니 그냥 데리고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사람 몸 위로 올라가면 안 된다?”
니야옹.
말을 듣는 건지 아닌 건지.
“옹주 자가. 소인들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응. 고생했어.”
나는 꼬마와 함께 궁인들이 준비해 둔 따끈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꼬마가 내 배 위로 올라와 똬리를 틀었다.
“내려가라, 이놈.”
미야옹-
내려가기 싫다고 다 큰 애가 귀여운 척을 하네.
어휴, 움직이기 귀찮아서 봐준다.
‘안 그래도 솜이불 무거운데 잘 때 숨 막히면 어쩌지.’
뚱냥이의 무게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둔 채, 눈을 감고 오늘 일었던 일들과 내일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헉?”
왜오옹?
그러다가 문득 잠이 들기 직전 떠오른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데없이 내동댕이쳐진 고양이가 서러운 소리를 냈다. 어차피 솜이불 위인데 엄살은.
“옹주 자가. 어찌 그러십니까?”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문밖에 있던 궁녀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걱정스레 물었기에 나는 아무 일 없었다고 둘러대고, 고양이를 달래 배 위에 올려주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방금 떠오른 생각을 다시 되새겼다.
‘이거 혹시 천호가 김선익 대감의 아들인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