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9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93)화(293/326)
‘고용주가 발간하는 것도 안 읽고 뭐 해!’
-라고 하기에는 사실 천호도 이상하게 바쁜 몸이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읽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지만, 천호가 바쁘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심지어 그 원인이 나이기도 하고.
매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천호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훈련을 하거나, 내 사가나 시영원 등의 내 영업장에서 소식을 받아 나에게 가져오고, 내가 외출하거나 산책을 나가면 나를 호위하고, 대체로 그 후 어딘가로 끌려가 다시 단련을 당하거나, 다시 내가 전날 적어 둔 답장들을 배달하러 다니곤 했다.
그 후에 다시 궁에 돌아오면 날이 어두워지니 굳이 뭔가를 읽을 여유는 좀처럼 없는 셈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나를 수행하고 밖으로 나오는 날은 대체로 늦게 들어가는 편이고.
‘머리가 아파서 외출하긴 했는데 몸이 좀 무겁네.’
나는 적아 위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천호 저러다가 글자 까먹는 거 아냐? 한글은 몰라도 한문은 까먹을 거 같은데.’
이제 천애 고아 신세인 지화에게 수천은 거의 유일한 피붙이였다.
나중에 세화가 세자와 혼인……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잘되어서 세손이라도 낳게 된다면 그 아이를 지지해 줄 유력한 존재이기도 했다.
집안이 망했으니, 당장은 외척이라고 견제할 수준도 못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과거 볼 것도 아닌데 주경야독을 강요한다니, 어지간한 블랙보다 잔인한 고용주였다.
그나마 요즘은 궐에서 지내니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나, 집안일을 할 시간은 줄어든 셈이 아닐까.
‘어쩔 수 없지. 강제로 읽게 하는 수밖에.’
내가 말로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자기들끼리 알도록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나…….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소이의 손이 가볍게 적아의 고삐를 흔들었다.
“옹주 자가?”
“응?”
“도착했사옵니다.”
“아.”
천호와 소이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시영원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적아도 멈춰 있고.’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많았나 보다.
“앗.”
한숨을 쉬며 적아의 등에서 내려오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내려오는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살짝 기울었다.
바닥이 미끄러운 건지, 발이 삐끗한 건지.
그리고 그런 나를 당연하다는 듯 천호가 감싸듯 받쳐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균형을 바로 잡은 나는 천호를 밀쳐 내듯 몸을 바로 세웠다. 다행히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얘가 자꾸 이러니까 내가 오해를 한 거군.’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시영원 안으로 향했다.
“가자.”
“……예.”
뒤따라오는 천호의 목소리는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옥가락지를 아무 말 없이 회수한 게 괜히 찔려서 모르는 척했다.
‘으음. 벌써 눈치챘으려나.’
그냥 잃어버렸다고 치고 잊어버려 주면 좋을 텐데.
‘내 물건을 되찾은 셈인데 내가 눈치를 보는 것도 좀 이상한가.’
차라리 천호가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다면 좋았을걸.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도망치게 도와준 것도 난데.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한 것과 별개로 또 어쩐지 울컥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 아기씨!”
“아영이 오랜만이네?”
“에헤헤헤.”
내 불편한 심기를 달래 주듯 시영원의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반겼다.
“요새는 늘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드네. 오늘은 무슨 일이야?”
“오늘은 시험이 있었거든요. 덕분에 좀 일찍 끝나서. 헤헤.”
여전히 나보다도 큰 아영이가 나를 덥석 안아 들었다.
소이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사양하지 않고 아영이에게 몸을 맡겼다. 잘 먹여서 그런가 애가 힘도 좋지.
“그래서 시험은 잘 봤어?”
“제가 이래 봬도 성적은 제법 좋거든요?”
까르르르.
아영이의 말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여기 오니까 마음이 편하긴 하네.’
물론 시영원에도 일이 많아서 여기 온다고 속이 편하리란 법은 없지만 무럭무럭 자란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민 상궁 마마님 모셔 올게요!”
“아냐. 내가 가지, 뭐. 어차피 할 얘기도 있는걸.”
성원 세자 모시던 궁녀들 만난 얘기도 해야 하고.
온 김에 운영 얘기도 좀 해야지.
나와 소이가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천호는 아이들에게 붙잡혔다.
“천호 오빠는 왜 기운이 없어?”
“어? 아니, 그냥. 좀.”
오늘따라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는 것 같기에 한마디 해 주었다.
“모처럼 왔으니까 애들하고 좀 놀아 주지?”
“예에…….”
오늘따라 좀 기운이 없는 것 같기는 하네. 역시 옥가락지 때문이려나.
민 상궁은 내가 왔다는 말에 또 뛰쳐나왔기에 다시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원 세자를 모시던 궁녀들이 옹주 자가께 그렇게 방자한 태도를 보였단 말씀이시옵니까.”
“응. 역시 좀 이상하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마치 아직도 저들이 동궁전 상궁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가 아니옵니까. 아니, 동궁전 상궁이라도 옹주 자가께 어찌 그리…….”
“됐어. 어차피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형편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던데 그렇게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눈앞에 있는 민 상궁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쪽은 이제 관록이 쌓인 기업가였고, 그쪽은 부도나서 은퇴한 사람 같은 모습이랄까.
다만 신경 쓰이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사실 임 상궁을 잘 모르거든.”
“그야, 옹주 자가께서 아직 연치가 어리실 적에 출궁하였으니 잘 모르시겠지요.”
그냥 심술궂은 못된 사람이라는 인상 정도만 남아 있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성원 세자는 끔찍하게 아꼈다는 것 정도? 그게 성원 세자가 바라던 바냐고 하면 아닌 것 같지만…….
‘성원 세자는 자기 사람들에게는 너무 마음이 약했어.’
궁녀들이 옹주인 나에게도 감히 은근슬쩍 무례하게 구는 것에 화는 낼지언정 그를 벌하거나 내칠 정도로 단호하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성원 세자가 좀 더 강하게 나왔다면 임 상궁도 감히 그런 식으로 우리 처소 궁녀들을 통해 눈치를 주거나 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에 반해 지금의 세자는 아무래도 성질머…… 좀 더 단호한 부분이 있었다.
그게 타고난 성격 탓인지, 아니면 자라난 환경이 많이 달랐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임 상궁은 성원 세자 저하를 키우다시피 한 사람이라 성원 세자 저하께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성정이 그리 오만방자해졌지.”
“아니라고는 못 하겠사옵니다.”
동궁전 상궁일 적에도 그러했으니 나중에 대전 상궁이 되었으면 또 오죽했을지.
‘성원 세자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세자한테 나랑 임 상궁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할 정도로 싸웠을지도 모르겠는데.’
상상이 가질 않네.
“분명 자신이 훗날 대전 상궁이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옵니다. 여러모로…… 보통 사람은 아니었지요.”
민 상궁은 작게 ‘성격이…….’라고 중얼거렸으나 내 귀에는 꽤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내가 민 상궁을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음. 그런데 말이지.”
“?”
“그런 사람이 출궁했다고 남자를 만날까?”
“예?”
민 상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하려 노력하는 민 상궁에게서는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애초에 궁녀가 그래서도 아니 되지만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 차라리 상대가 권력자라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던데.”
“그럴 리가요.”
민 상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세자 저하께서 가례를 올리시고 만약 후궁까지 들이신다면 자신들이 다시 불려 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허투루 처신했을 리가 없습니다. 저희는 다시 궁으로 돌아가기도 애매하지 않습니까.”
“음. 미안. 좀 그렇지.”
시영원에 있는 궁녀들의 자격이 부족하다든가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이들이 없으면 시영원이 돌아가지 않을 테니, 다들 나를 배려해서라도 이들을 부르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옹주 밑에 있는 거라 그리 모양새가 나쁘지도 않았고.
내가 사과하자 민 상궁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시어요. 소인들은 시영원에서 지내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사옵니다. 궁에서 귀인들을 모시는 일 역시 영광이었으나 이곳에서 옹주 자가의 뜻을 따라 사람을 구하고, 키워 내는 일 역시 영예로운 일이라 여기고 있사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지.”
과도한 노동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근래에 별일은 없지? 일단 서신으로 온 보고서들을 봐서는 큰 문제는 없었는데.”
“예. 시영원 운영 자체는 큰 문제는 없사옵니다만…….”
“왜?”
“……소인이 말씀을 올리는 것은 적당하지 않은 듯하옵고……. 오신 김에 지아를 보고 가시지요.”
“지아? 늘 바빠서 시영원에 없잖아.”
내가 매정해서 애를 안 보는 게 아니었다.
얘가 외지부(변호사)로 얼마나 이름을 날리는지 낮에는 시영원에 잘 안 붙어 있었다.
‘장학금도 필요 없을 거 같더만…….’
게다가 공부 좀 하고 언변 좀 좋은 여자애들이 지아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그 애들도 지아 대신 일을 받아 외지부를 하기 시작했단다.
안 그래도 인식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젠 지아와 아이들 때문인지 외지부는 여자들이나 하는 천한 직업 같은 소릴 듣는 모양이었다.
돈 많이 받으라고 해야지.
‘어차피 돈 많이 받는 직업으로 정착되면 공부 좀 했다는 양반 남자들이 우르르 모여들 테니 차라리 우리 애들이 빨리 선점해 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지아를 찾는 사람이 많아 쉴 틈이 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요즘에는 다른 아이들도 외지부를 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덕분에 요즘에는 가끔 쉬면서 시영원 일도 돕고 있습니다.”
“쉬는 날에도 시영원 일을 한다는 게 석연치 않지만 그래도 쉬고 있다니 다행이네. 참, 험한 일은 없고?”
“재판에서 지고 시비 거는 자들이 더러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다행히 시영원 이름이 있어 감히 위험한 시늉을 하는 자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본인도 무예를 익혔기도 하니 어느 정도는 괜찮겠지만…….”
장정 여럿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호신술 익힌 것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이쪽도 혼자라는 법은 없었지만.
역시 무엇보다도 시영원 이름값이 유용한 모양이니 다행이었다.
시영원에서 살고 있는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려던 사내가 다음 날 다리가 부러져서 발견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문 같은 게 파다하다는데 뭐…… 나는 모르는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