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29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295)화(295/326)
천호의 목소리였다.
내가 지아와 단둘이 이 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내라.’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지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뭐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
“방금 온 거예요.”
여자들 대화를 굳이 엿들었다는 시선을 받기는 싫었는지 억울하다는 목소리였지만 우리 대화를 몰래 들은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지아와 천호가 의미 없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천호 안 데려갈 건데.”
“네? 왜, 왜요?”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천호가 말까지 더듬었다.
그 정도로 놀랄 일은 아니지 않나…….
“음…… 성 겸사복을 데려가야지.”
“네? 그냥 둘 다 데려가면 되지 않을까요?”
“천호는 안 와도 괜찮아.”
“!!”
내 담담한 표정과 대조적으로 천호는 충격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직 말은 할 수 없지만 나한테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천호가 수천이면, 김선익 대감의 누명 벗겨지고 신원 회복하면 다시 양갓집 도련님인데.’
그런 애를 계속 내 호위랍시고 여기저기 끌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랑 놀러 다니는 게 재밌었나.’
뭐 참 스펙터클하니 어린애 입장에서 보면 재밌었을 수야 있겠지.
다치기도 하고 고생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런 걸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마음에 들 수야 있는 노릇이고…….
‘아니지. 슬슬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걸지도. 반가의 자제라면 나랑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말이지.’
처음 만났을 그때야 어린아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아와 단둘이 얘기하는데 저 커다란 놈이 몹시 방해였다.
“천호.”
“네.”
“나 지아랑 좀 더 얘기할 게 있으니까 좀 나가 있어.”
“예?”
“다른 사람도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설마 지아가 나를 해칠 거 같아서 그래?”
내 말에 지아가 눈을 부릅뜨고 천호를 싸늘하게 쏘아보자 천호는 기가 죽은 듯 물러났다.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안 부른다니까.”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내 말에 시무룩해져서 물러가는 천호를 보며, 지아도 작게 중얼거렸다.
“천호가 좀 유난인 거 같기는 해요. 확실히 좀 귀찮을 거 같네요.”
“응.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지?”
하지만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은근히 천호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천호 마음을 전혀 모르겠는 것도 아니에요. 아기씨, 워낙에 위험한 일에 잘 휘말리시잖아요. 궁 안에서 호랑이도 나올 줄은 정말…….”
하긴, 그건 나도 몰랐어…….
어찌 되었건 다행히 방해꾼이 사라진 걸 확인한 나는 지아한테 아까 생각한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참 지아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저한테요? 말씀하세요.”
“지금 지천 선생이 신문에 연재 중인 소설 알지?”
“지천 선생…… 아, 신문에 연재 중인 소설이라면 알아요.”
그거 재밌죠, 라며 지아도 아는 척을 해 왔다.
‘이렇게 다들 열심히 읽는데…….’
글을 알고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읽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놈이 안 읽다니.
“그걸 천호처럼 신문 안 읽는 사람에게 억지로 소설을 읽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예? 으음.”
“없을까?”
“저기, 읽어야 하는 사람이 한 명인가요? 아니면 불특정 다수의 젊은 남성?”
“음. 읽어야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면 돼.”
너무 특정 인물 저격 같아서 좀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이상 거짓말을 해 봤자 그리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고민하던 지아는 뜻밖에도 바로 괜찮은 방도를 제시했다.
‘괜찮은데?’
***
시영원을 다녀오고 얼마 후.
‘일어나기 싫다.’
왜 자라니까 이렇게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지 모르겠다. 어릴 때는 가벼웠는데.
물론 실제 무게가 가벼웠던 거 맞겠지만.
“옹주 자가. 기침(起枕)하셨사옵니까.”
“응.”
더 자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벌써 일을 하고 있으니까.
‘오늘은 시영원에 갔다 오겠군. 이제 책이 나왔으려나.’
거의 매일매일, 천호도 고생이었다.
그리고 평소의 루틴을 생각하면 천호가 시영원이나 기타 영업점에서 편지와 보고서들을 가지고 들어올 때쯤 늘 세화가 나를 진맥하러 왔었지.
다행히 오늘도 일상 루틴을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옹주 자가. 천호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게.”
“옹주 자가, 세화 의원이 진맥을 청하옵니다.”
“응, 들어오라고 해.”
천호와 세화가 나란히 내 방에 들어와 앉았다.
보통은 이 상태로 진맥하는 동안부터 이런저런 잡담과 대화가 오가곤 했는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서 조용히 있었더니 방 안의 분위기도 어쩐지 평소보다 엄숙한 느낌이었다.
‘내가 말을 안 해서 이렇게 조용한 건가.’
나는 세화의 진맥을 받으며 영문을 모른 채 침묵하고 있는 두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둘 다 뭐…… 잘생긴 미남 미녀이긴 했다.
하지만 저 둘이 남매라는 건…….
‘얼굴만 봐선 잘 모르겠어.’
아무래 남매라 해도 둘이 꼭 닮으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진맥도 받고 약도 먹고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이제 적당히 안심하고 있을 때쯤 나는 입을 열었다.
“참, 천호.”
“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운 넘치는 대답이었다.
‘왜 저러지…….’
뭘 기대했든 그 이하일 텐데.
“천호는 신문에 실리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던가?”
“예? 아, 아니요.”
“좀 읽도록 해.”
“예. 예?”
지아가 권해 준 방법은 이러했다.
물론 다짜고짜 소설을 읽으라고 강요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아 말로는 마침 지금 세화가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소설은 벌써 한 권 분량이 나와서 단행본 작업에 들어간 참이라고 했다.
‘아직 연재 중이니 이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단행본을 팔면 소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사람들이 소설을 읽기 위해 신문을 사 볼 거라는 계산으로 시작한 작업이라는데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이렇게 읽게 하고, 대충 이유는 천호 또래 남자애들한테도 재미가 있는지 감상을 듣고 싶다고 하면 되려나.
물론 시영원이나 학당에도 천호랑 비슷한 또래의 남자애들은 쓸어 담을 정도로 있었지만.
‘내가 시키면 해야지 별수 있나.’
그리고 천호는 예상한 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제가, 소설책을요?”
“응.”
“저어, 송구하오나 소인이 그럴 시간적 여유가…….”
“만들어.”
“네에.”
천호는 소심한 반항을 시도하였으나 나는 당연히 받아 주지 않고 강행했다.
악덕 고용주라고 나를 욕해도 어쩔 거임.
사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란다.
‘사실인데도 되게 꼰대 같군.’
미안하지만 세상이 나를 꼰대로 만들고 있어.
나는 가능한 뻔뻔한 표정을 유지했다.
천호도 천호지만 지금 세화도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그렇게 강요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천호도 바쁘다고 하고, 이미 읽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다음 작품은 천호 같은 젊은 남자애들도 많이 읽으면 더 좋지 않겠어? 작가도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테고.”
“네, 네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세화는 차마 그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갑자기 자기가 쓴 소설을 지인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세화의 동공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본인 앞에서 본인 작품을 추천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러게 빨리 눈치채고 얘기 좀 해라…….
하지만 나의 이런 애타는 마음을 두 사람이 알 리가 없었다.
지금 나를 보고 있는 세화의 눈빛을 해석하자면 대충 ‘옹주 자가, 저한테 대체 왜 이러시는 거죠?’ 정도 되려나.
‘미안하다. 근데 네 동생은 찾아야지.’
천호가 그 소설만 읽었어도 벌써 찾았을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세화가 쓰고 있는 필명(筆名)인 지천 선생도 지화와 수천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떼어서 만든 것 같으니 소설을 읽었다면 금방 누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그럼 나도 금방 천호가 수천이란 걸 알았을 테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또 주먹이 쥐어졌다.
쿵.
‘핫.’
나도 모르게 또 서안을 내려쳤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앉아 있는 세화와 천호의 자세가 어쩐지 평소보다 조신해 보이는데 기분 탓이겠지.
나는 천호가 들여온 짐들 중에서 책을 찾아내어 내용물을 가볍게 확인한 후 천호 앞에 내밀었다.
“천호는 이걸 읽고서 상세하게 감상문을 써 오도록 해. 이런 표현이 좋았다거나, 전개는 어떻게 하는 게 더 재밌었을 것 같다거나.”
“예. 옹주 자가.”
“…….”
안 읽고 대충 읽은 척할 거 같아서 독후감 숙제까지 내줬다.
옆에 있는 세화는 여전히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아마 곧 나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겠지…….
‘아니, 이해하면 이상하지. 세화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도록 해.’
알면서 계속 모르는 척하는 거 불편하고 양심에 찔리니까 제발 빨리.
그리고 나는 두 사람에게 힌트를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무리수를 둬 봤다.
“세화는 잃어버린 남동생이 있지?”
“예.”
“천호는 잃어버린 누나가 있고.”
“예.”
둘 다 대답은 잘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신경 좀 쓰자. 왜 이렇게 눈치를 줘도 모르는 거지…….’
이 시대에 실수로 아이 잃어버리는 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보니 둘 다 서로가 남매라는 생각을 못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제대로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둘 다 누나, 남동생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제대로 말을 못 할 테니까!
또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탕!
“!”
“!”
서안을 내려치는 소리에 움찔한 두 사람이 내 눈치를 보았다.
“하아…….”
“오, 옹주 자가, 혹 심기가 불편하시옵니까?”
보고에 안 좋은 내용이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니다.”
니들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