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0)화(30/326)
“아, 아기씨…….”
나는 나를 붙잡는 가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아니야, 아니어야 했다.
신발도 벗지 못하고 안에 뛰어 들어가자 비릿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마마님, 의식을 놓으셔서는 아니됩니다!!”
“아, 아기씨! 마마님, 아기씨께서 오셨습니다. 눈을 떠 보세요!”
희미하게 숨을 쉬고 있는 언니의 얼굴은 핏기라고는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제대로 시선도 맞추지 못하는 눈이 나를 향했다.
“아기씨…….”
희미한 목소리를 들으며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기씨가…… 계셔서, 많…… 행복했……. 내…… 딸…….”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언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 아아…… 아니야아아……!”
왜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
세자 오라버니도. 언니도.
왜 이렇게 갑자기 가 버리는 거야.
한겨울인데 온몸에,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아기씨!”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나를 부르는 궁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상복을 입은 왕이 내 곁에 있었다.
“정신이 들었느냐?”
“……아바마마.”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오라버니는? 언니는? 다 어디 있지?
왜 나만 여기에 있지.
아.
“……죽었어?”
“……그래.”
내 잠꼬대 같은 말에 왕은 자세한 얘기 대신 내 눈을 감겼다.
울고 싶은데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왕이 먹여 주는 대로 물을 마시고 다시 죽은 듯 잠이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중간중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린아이라 죽음이란 걸 인지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총명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여느 아이와는 다르십니다.”
“숙의의 장례를 준비해야 할 텐데…….”
“세자 저하의 예장 중이온지라 간소하게 치러야 할 듯하옵니다.”
“그리하도록 하게.”
왕과 내관들 중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는가 하면.
“아기씨만 아니었다면 숙의 마마님도 그리 가지 않으셨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리야.”
“마마님은 원래 총애에 관심이 없었잖아. 딱히 적극적으로 전하를 모시려고 하지도 않았고. 꾸미는 데 관심도 없었고. 그런데 아기씨가 영빈에게 미움을 받으니 아기씨를 지키려고 무리해서 총애를 얻으려다 이렇게 된 거 아냐.”
“너, 너 입조심해.”
“그냥 편히 살 수 있었는데 과한 욕심이 화를 부른 거지.”
“호랑이 때문에 놀라서 쓰러졌다며?”
“복중 용종만 아니었음 좀 쓰러졌다고 어떻게 되기야 했겠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크게 다친 사람이 없잖아?”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소설에서는 어린 옹주들이 죽었다고만 했지, 후궁들까지 해코지를 당했다는 내용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한 일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세자는 결국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고.
어쩌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언니는, 숙의는 나로 인해 운명이 바뀌어 총애를 받았고, 그 결과 임신을 하고, 결국 죽었다.
그럼 나는 어떨까.
나는 소설대로 죽는 건가?
그렇다면 나를 죽이는 건 소설과 마찬가지로 경언군일까?
그럼 영원 대군은?
영원 대군은?
반짝 눈이 떠졌다.
“아기씨?”
“가이? 송비?”
“예, 아기씨. 정신이 드시옵니까?”
아까까지 왕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궁녀들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분명 내가 아는 우리 처소 궁녀들 목소리는 아니었다.
궁녀들은 바지런히 내게 물을 먹이고, 죽을 먹이고, 몸을 닦아 주며 수선을 피웠다.
나는 조금 맑아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물었다.
“아바마마는?”
“전하께서 찾아오셔서 며칠간 친히 아기씨를 돌보다 가셨습니다.”
전부 다 꿈은 아니었나 보다.
“아기씨께선 그날 의식을 잃으시곤 몸이 불덩이셨습니다.”
“소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궁녀들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눈물을 훔쳤다.
줄초상이 나나 싶었겠지.
궁녀들은 조심스럽게 내가 앓고 있던 동안의 일들을 설명했다.
내가 다시 충격으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퍽 걱정스러운 눈치였으나 의외로 언니의 장례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중전마마께옵서 친히 찾아오셔서 아기씨를 걱정하셨습니다.”
“영원 대군께서도 찾아오셔서 아기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셨고요.”
“그렇구나.”
아직 조금 머리가 멍한 것 같아 힘을 주어 눈을 깜빡이는데 가이가,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어.”
“뭔데?”
“홍 숙원과 경언군도 다녀가셨습니다.”
“…….”
그 인간들이 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는지 가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안에는 들이지 않았고, 허튼짓 못 하게 제가 뒤에 꼭 붙어 다녔습니다.”
“괴롭힘당한 게 아니라?”
“아기씨께서 계신데 누가 소인들을 괴롭히겠사옵니까.”
내가 없으면 괴롭힘당한다는 소리 아냐.
궁녀들은 내가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탕약을 가져왔다.
“왜 그러십니까. 아기씨?”
“아니,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뭐였지. 왜 탕약을 보고…… 아.
“가이가 분명 그날, 내의원에서 취영당 궁녀를 보았다 했지.”
“예? 그, 그날이라면…… 아, 예.”
어쩌면 관계가 있지 않을까. 취영당과 이번에 일어난 일이.
숙의 처소 나인은 세자의 예장이 시작되고부터 탕약을 먹고 나면 언니의 상태가 안 좋아졌다 했다.
그 무렵부터 취영당 궁녀는 내의원에 출입하고 있었으니 뭔가를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정말로.
‘언니의 죽음은 나 때문인 거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미간이 일그러지자 두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아기씨,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 아픈 거 아니야.”
“아기씨, 혹 취영당을 의심하시옵니까.”
“수상하지만…….”
그렇지만 증좌가 없다. 내가 제정신만 차리고 있었어도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그 탕약들은 모두 치워졌을 테고, 후궁의 경우 검시(檢屍)도 하지 않으니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만일 그냥 유산을 유도한 약이었다면 독이 아니니 이 시대의 검시만으로는 알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다.
“아기씨,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시니 다른 생각은 마시고 쉬셔야 해요.”
“……알았다.”
다들 나를 걱정해서 울며 매달리는데 고집을 부릴 수도 없어서 시키는 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열은 내렸다지만 몸이 노곤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내가 정신을 차리고 며칠간 나인들이 말한 대로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왕도, 중전도, 영원 대군도, 하다못해 후궁들까지도 사람을 보내 내 안부를 살폈다.
하지만 가장 보고 싶은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어의에게서 이제 괜찮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방 밖으로 나설 수 있게 된 나는 가장 먼저 언니의 처소로 향했다.
아직까지 기억 속의 모습과 별다를 것 없는 그곳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없었다.
‘정말 언니는 이제 없구나.’
그런 나를 보며 조용히 눈물만 훔치는 궁인들을 뒤로하고,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못한 데다 언니의 빈궁(殯宮), 그러니까 빈소가 궁 밖에 있어 가 볼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처소로 돌아온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제 와 빈소에 가 보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싶었지만 새삼 후궁이란 게 서러운 거구나 싶었다.
‘안 그래도 언니는 달리 가족도 없는데.’
나를 걱정하는 나인들을 물리고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정말 혼자 있고 싶었다.
‘아아악!! 시아야, 시아야!!’
언니다.
언니 목소리다.
언니가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
언니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쓰러져 오열하고 있는 언니와 그런 언니를 부축하고 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웃고 있는 내 영정 사진도.
아, 저건 내 장례식장이었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언니도 나처럼 울었겠지.’
언니, 언니.
가엾은 우리 언니.
나도 모르게 다가가 언니를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언니의 얼굴은, 내 기억 속 마지막 그 창백했던 언니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원통합니다. 아기씨…….’
그렇게 말하며, 언니는 차가운 손으로 날 붙잡았다.
“헉!”
눈을 뜨니 익숙한 내 방이었다.
‘꿈이었구나.’
눈을 깜박이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이제 와서 이런 꿈을 꾸었을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걸 책망하는 걸까.’
헐떡이며 일어나 머리맡에 있던 자리끼를 찾아 물을 마시고 일어났다.
밖이 어두운 걸 보니 한밤중인 모양이었다.
‘다들 자고 있나?’
나를 보살피느라 고단했는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당직 궁녀를 두고 걸려 있던 검은 외투를 찾아 걸치고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일부러 검은 옷을 입은 이유는 단순했다. 누군가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작은 어린아이가 검은 옷을 입고 한밤중에 돌아다니면 알아챌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말 호랑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그날 이후 경계가 강화되어서일까. 호랑이에 대한 소문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호랑이 소문 때문인지 아니면 장례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우는 이들이 많아 어두워도 돌아다니기 어렵지는 않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조용히 다가가니 궁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님 장지는 어디가 되려나.”
“왕자 아기씨도 같은 곳에 묻히실까?”
“글쎄. 그렇지 않을까.”
언니가 낳은 아이는 배 속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아마 그날 언니 곁에 있었을 테지.
‘이번 남동생은 살아서 태어나지도 못했구나.’
가엾다는 생각보다도, 무사히 태어났다면 홍 숙원과 경언군이 더 싫어했겠다는 비뚤어진 생각부터 들었다.
경언군이 생각나서일까.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취영당을 향했다.
안다.
이렇게 찾아간다고 뭔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하지만 아까 그 꿈을 꾸고 일어나 문득 떠올랐다.
세자가 죽고, 보름 후였다.
소설 속에서 영원 대군의 독살 시도가 일어난 건.
그리고 오늘이 아마 열나흗 날.
내일이 열닷새째다.
그렇다면 오늘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