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0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00)화(300/326)
‘시아? 시아라고?’
내가 누군지 안다고?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깔렸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감히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어딘지…… 익숙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내 기억이 잘못되었거나, 내 청력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이 목소리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의 것이라 문제지.
하지만, 만약 이 목소리의 주인이 정말 ‘그 사람’이 맞다면, 연 좌세마와 함께 있었던 이 역시 그 사람일 터.
내가 굳어서 움직이지 않자 나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나는 심호흡과 함께 반신반의하며 몸을 돌렸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섬세하고 단정한 얼굴, 부드러운 미소.
아까 만난 마을 아낙이 왜 그리 넋을 놨는지 납득이 가는 인물이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예상을 했다 해도,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내가 기억하는 얼굴보다 조금 나이는 먹었을지언정, 나를 보는 미소만은 바뀌지 않은 내 첫째 오라비.
분명 죽어서 초상까지 치르고 묘도 만들어 버린 인물이 왜 지금 내 눈앞에 있지?
“……그래. 나다. 네 오라버니 이혜. 못 본 사이 정말…… 많이 컸구나.”
익숙한 듯 낯선 팔이 나를 끌어안았다.
이게 귀신인가 사람인가, 멍하니 끌어안기자 갑자기 현실감이 확 돌아왔다. 눈가에 차오르던 눈물 역시 쏙 들어갔다.
“오라버니…… 라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뻔뻔스레 다가온 이의 몸을 거칠게 밀쳐 냈다.
“시아야.”
“오라버니는 죽었잖아. 연선오 좌세마가…….”
나에게 세자의 최후를 전한 이는 연선오 좌세마였다.
그리고 지금 연선오 역시 이곳에 있었다. 세자와 함께.
지금도 세자와 함께하고 있는 연선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세자의 뜻을 거스르고 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왜, 날 속였어……?”
“미안하다. 미안하다. 시아야.”
세자는, 아니, 이혜는 어떻게든 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나는 몸서리치며 그 손을 쳐 냈다.
마냥 다정해 보이는 얼굴에 당혹과 안타까움이 스쳤다.
“사람이 우스워?”
“시, 시아야.”
“그 어린아이에게 죽었다고, 그것도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다고 해 놓고! 지금 이렇게 나타나서 실은 살아 있었어, 하면 어떤 바보가 마냥 기뻐할 거 같아?”
“……미안하다.”
아무래도 이혜의 기억 속의 나는 아직도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동글동글하기만 한 어린아이였겠지.
내가 불같이 화를 내자 이혜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사과할 뿐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무 화가 나서 그냥 콱 기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속 편하게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혜의 얼굴을 본 순간, 죽었다고 생각했던 가족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뻤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前) 세자인 이혜가 살아 있으면.
지금의 세자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적어도, 최소한 몇 년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세자는 멀쩡히 세자 책봉을 받았고, 이미 대리청정까지 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냈다.
이걸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솔직히 기뻐해야 할지 놀라야 할지 모르겠는데, 등골이 오싹해지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상한 소문…….’
경언군이 아니었다.
다른 종친도 아니었다.
역모를 준비하던 이들이 옹립하려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죽은 걸로 알려진 세자라면…….
‘다른 누구보다 정통성은 있어.’
게다가 죽은 듯이 살고 있던 본래 이혜 쪽 사람들은 당연히 여기에 붙겠지.
이런 것을 알게 되니 궁녀들의 그 건방진 태도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정말로 자신들이 대전 상궁이라도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정변(政變)까지 노린다고? 저 우유부단할 정도로 선량하던 성원 세자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모를 세자…… 아니, 이혜는 굳어 있는 나를 여기저기 살폈다.
뒤에는 어느새 나타난 연선오가 나를 보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런 곳에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얘들도 신문을 안 보나.
“오, 옹주 자가?”
“……어찌 감히 내 앞에서 그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이냐. 당장 숙이지 못하겠느냐.”
“소, 송구합니다.”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는 연선오보다도 성원 세자가 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선오에게 화내지 말거라. 시아야. 모두 내가 시킨 일이고 선오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른 죄밖에 없다.”
“그러시겠지요. 좌세마가 오라버니를 납치했을 리도 없으니까요.”
“…….”
내가 빈정거리는 걸 본 성원 세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듯한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 나는 비교적 성격을 숨기지 않았는데?
성원 세자 앞에서 지금의 세자인 영원 대군을 빈정거린 일도 없지 않았고.
‘하긴, 십여 년을 만나지 못하고 옛 기억만 떠올리면 자연히 미화되는 법이지.’
내 기억 속의 성원 세자 역시 어쩌면 미화되어 있는 상태일지도 몰랐다.
“이리 따라오너라. 이곳은 네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구나.”
“…….”
반항하면 둘러업고라도 가겠지.
내가 기억하는 다정다감한 성원 세자는 여자애 입을 막고 강제로 안아 들어 옮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기억 속의 성원 세자가 흐려진 것 같아, 나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졌다.
성원 세자와 연선오는 아까 내가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지나온 빈집들 중 하나에 나를 데리고 갔다.
“다치지는 않았느냐?”
“응.”
나를 평상에 앉힌 후, 내 얼굴이나 손을 여기저기 살펴보고 다친 곳을 발견하지 못한 성원 세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어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성원 세자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을 하나 했다.
“그……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이 근방에서 좌세마 연선오를 보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찾아왔습니다만.”
“옹주 자가께서 신문에 저를 찾는 광고를 내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예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문을 안 읽은 건 아니었군.
“좌세마만이 아니라 다른…… 익위사 사람들을 찾아온 거야.”
“어째서…… 갑자기 그들을 찾았느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내가 답해 줄 수 있는 것이냐?”
그걸 성원 세자에게 물어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긴 한데…….
‘이렇게 진실을 까놓고 생각해 보면 부왕은 알고 계셨다는 뜻이네.’
어쩌면 나 빼고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던 거 아냐?
“궁녀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 오라버니를 잃었을 때 아바마마께서 생각보다 크게 비통해하지는 않으셨다고.”
“……내가 미욱한 탓이구나.”
성원 세자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를 보고 있으려니 또 울컥하는 감정이 쏟아졌다.
“왜, 왜 죽은 척을 한 거야?”
“미안하구나. 내 잘못된 선택으로 네가 그리 고통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잠시 의아해했으나 곧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경언군이 꾸민 일들을 말하는 거구나.’
덕분에 내 생모와 복중 태아는 죽고, 나는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매다 자라지 않게 되었지.
성원 세자가 바랐을 리는 없는 전개였으나, 그가 사라지면서 경언군은 더 거침없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잘 맞아 들어갔을 뿐.”
“…….”
“그리 보지 말거라.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서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세자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그날 일을 설명했다.
큰 흐름은 연선오가 예전에 해 주었던 이야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가장 큰 차이는, 처음에 해 주었던 이야기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두 사람을 호랑이에게서 구해 주었다는 거였다.
그는 인근 마을에 살던 청년이었다고 했다.
이미 호랑이에게 치명상을 입은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테니 대신 복수를 해 달라고,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대신 부탁한다고.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좌세마와 세자는 호랑이를 잡고, 무사히 도망친 후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그 인골은 그 사람 거였구나?”
“아마 그럴 거다.”
어이없어. 생판 남의 유골을 앞에 두고, 나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갑자기 비통해하지 않았다는 부왕이 엄청 이해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죽었다고 알려진 아들이 이런 짓을 꾸몄다는 걸 알면 열 받아서 눈물이 쏙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왜 죽은 척을 했어?”
“……그건, 설명하기가 조금 어렵구나.”
“내가 그런 말 듣자고 여기까지 와 있을까요, 오라버니.”
성원 세자는 난감해하면서도 결국 입을 열었다.
“경언군과 영빈 때문이었다.”
“?”
“그 이상은…… 나도 말해 주기 힘들구나. 미안하다.”
“결국 말해 준 게 없는 것에 가까운데.”
내가 떨떠름해하거나 말거나, 성원 세자는 계속 감격에 겨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리 장성한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나는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사라져서 하는 일이 고작 역모야?”
“……나도 이런 일을 할 생각은 아니었단다.”
“그럼 왜?”
“……이화, 그 아이가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데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
뜻밖의 말이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성원 세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대리청정을 맡으며 해 온 정책들은 하나같이 이상적인 것들뿐이라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것 많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의 빈축을 사고 있지.”
“…….”
“내버려 두면 분명 너도 그 아이도 다치게 되겠지.”
“지금의 세자 저하가 하는 일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내 말에 성원 세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옳은 일이지만, 너무 이상적인 탁상공론일 뿐이란다.”
“…….”
“너희가 위험해지는 것을 어찌 보고 있을 수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지.”
그리고 말하며, 성원 세자는 쓸쓸히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너도 오라버니와 함께하지 않겠느냐. 네가 나를 돕는다면 일은 한층 수월해질 거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울컥한 나는 벌떡 일어나 세자의 손을 쳐내곤, 어리바리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우리 오라버니는, 그런 이상한 말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