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1)화(31/326)
취영당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했다.
이전이라면 출입을 막기 위해 지키는 이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반대로 영원 대군의 처소는 이제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겠지.’
법도대로라면 유일한 대군인 영원 대군이 곧 세자가 될 거다.
지금은 아직 다들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럽겠지만 세자의 예장이 끝나면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을까.
그리고 분명, 경언군은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겠지.
‘취영당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어 구조를 모르는데 경언군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
가능한 그림자에 숨어 살금살금 움직이며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쪽으로 돌며 취영당 주변 분위기를 살피는데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담장 너머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취영당에 있을 소년이라면 경언군뿐이었다.
나는 담장에 찰싹 달라붙어 가능한 한 소리가 잘 들리는 쪽으로 움직였다.
“일은 잘 되었으냐?”
“예, 시키신 대로 영원 대군 처소 나인 아이를…… 꺅!”
쾅!
뭔가를 던지는 소리가 났다.
“누가 대군이냐. 경원군이면 족한 것을!”
“예, 예. 소인이 실언을 하였사옵니다.”
처소에 남은 나인이라고는 몇 되지도 않을 텐데 저 성질을 용케 받아 주고 있었다.
아니지, 처소에 남은 나인 중에는 저렇게 젊은 나인이 없을 텐데? 누굴까.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는 세자가 된 영원 대군을 계속 영원 대군이라고 불렀었지.’
덕분에 여기가 소설이라는 걸 일찍 깨달았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아니, 지금은 저래도 나중에 영원 대군이 세자가 되면 또 영원 대군인 건 받아들이려나?
어쨌든 원하던 인물을 찾았으므로 나는 얼굴까지 가린 채 담장 뒤에서 조용히 몸을 움츠렸다.
“이것을 경원군의 음식에 몰래 넣어라.”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알 것 없다.”
“예? 예.”
“내가 여기서 나가면 약속대로 너를 후궁 자리에 앉혀 줄 것이다. 너도 평생 궁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썩고 싶지는 않겠지? 차질 없이 잘해야 할 것이야.”
“예, 예. 대감.”
대화 내용을 들으니 뭘 미끼로 내놨는지 알 만했다. 하긴 궁녀들이 아무리 지위가 올라가 봤자 후궁보다 품계가 낮았다.
물론 왕의 최측근인 제조상궁 정도 되면 품계가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지밀상궁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 하고 있느냐,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고!”
“지, 지금 말씀이시옵니까?”
“그럼, 대낮에 안 들키고 드나들 자신이 있더냐?”
“하지만 저녁 진지도 다 물렸을 시간이온데.”
“야참을 먹든, 초조반(初早飯:새벽에 일어나 먹는 가벼운 죽)을 먹든 음식 준비는 할 것이 아니냐! 이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일러 줘야 하느냐?”
“아니옵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보지 않아도 고개를 조아린 나인이 후다닥 자리를 떠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구나.’
어서 영원 대군에게 달려서 독에 대한 것을 알려야 했다.
소설에서도 독살은 피해 갔으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만약을 위해 경언군이 안으로 들어가면 일어나려고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 뜻밖에 다시 경언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너라.”
“!”
혹시 들킨 것인가 싶어 숨을 삼키는데 뜻밖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대감.”
처음부터 나인과 둘만 만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안도와 동시에 혹시 숨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손으로 입을 막고 귀를 기울였다.
“이대로 저것을 따라가서 경원군의 처소에서 나오면 상으로 줄 것이 있으니 공모한 궁녀와 함께 따라오라고 불러내어 둘 다 처리해라.”
“둘 다 말씀이시옵니까?”
성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내관인가? 경언군으로 봉해지며 배정받은 내관이 있으니까.
“그래. 증거를 남겨서야 되겠느냐. 경원군을 죽인 건 저 멍청한 궁녀다. 내 처소 궁녀도 아니니 내게 혐의가 오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 않으냐.”
“과연 영명하십니다.”
“설령 실패해서 경원군 그놈이 죽지 않더라도, 이제 평생 독살의 공포에 시달리게 될 거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구나.”
음험한 웃음소리에 나는 또다시 숨을 삼키고 몸을 움츠렸다.
담장 너머에 있는 날 보지 못하였을 것이나 발각된다면 나 역시 죽일 것이 분명했다.
“윤 상궁 그 방자한 계집도, 그 배 속 천한 것도 죽었으니 이제 경원군 그놈만 없어진다면 자연히 세자 자리는 내게 오겠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경언군이 어서 사라져 주기만을 기도했다.
어서 가서 영원 대군에게 알리고 궁녀들을 잡아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나를 세자 자리에 앉혔다면 윤 상궁도 죽지 않았을 터인데, 모두 아바마마의 큰 과오가 아니겠느냐.”
순간 숨이 멎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그냥,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언니가 죽은 걸 좋아하는 건가?
아니야. 하지만, 저건 마치 경언군이 언니의 죽음에 무언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투였다.
그 말의 의미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왕녀는 어찌하여 살려 두셨사옵니까?”
“고작 천한 출신의 왕녀가 내 방해가 되겠느냐. 그리고 그 계집을 어찌 쉽게 죽이겠느냐. 내 앞에서 살려 달라고 비참하게 매달리는 꼴을 내 보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말하며 경언군은 진심으로 기쁜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게다가 고것이 만드는 음식이 제법 쓸 만하더구나. 내가 세자가 되면 내 발밑에 기어야지 별수 있겠느냐?”
그 괴이한 것이 나를 죽이지 않고 물러났던 그날 밤의 일과, 내가 만든 카스테라를 들고 취영당에 갔던 세자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 이유로 살아남은 건가, 나는?
아니었다면, 그날 나 역시 죽었을 거라고?
어처구니없는 진실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허억…….”
인기척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어 있다가 겨우 숨을 들이켠 나는 몸을 가리고 있던 옷자락을 꼭 붙든 채 누군가 나를 볼까 서둘러 내 처소로 돌아왔다.
“가이! 송비! 어디 있어?”
“아, 아기씨?”
잠들어 있던 나인을 깨우고 내 궁녀들을 불러냈다.
‘혼자는 안 돼.’
***
영원 대군은 심란한 마음으로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형님의 장례 이후 주변의 시선이 갑자기 변한 것이 피부로 느껴져 사람을 피하니 자연히 책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숙의의 갑작스러운 일 이후로는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냐아-
“오냐. 심심한 모양이로구나.”
연주홍색의 아기 고양이가 손에 머리를 들이밀며 애교를 피웠다.
날이 추워지는데 밖에서 떨고 있는 게 마음이 쓰여 방에 들여놓은 이후로 제집처럼 방 안을 누비는 어린 고양이 몇 마리는 뜻밖에도 제법 위로가 되어 주었다.
어린 시절 경언군에게 죽을 뻔한 것을 구해 준 그 고양이는 그날 이후 뻔뻔하게 들러붙어 밥을 얻어먹더니 결국 이리 제 새끼들까지 저에게 맡기고 있었다.
‘시아에게 데려다주면 조금은 위로가 되어 주지 않을까.’
형님이신 세자 저하에 이어, 윤 숙의와 배 속의 용종까지 연이어 그리되다 보니 온갖 흉흉한 말이 대군인 자신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찌 이리 흉사가 연이어 일어난단 말이냐.’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이들이 귀신이니 하는 것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창귀라는 것도 허황된 소리다. 단순히 호랑이가 자신이 잡아먹은 시체를 수습해 간 이들에게서 자신의 체취를 느끼고 찾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면 몰라도 유학자라는 이들까지 그리 소란을 피운다면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논어라도 다시 읽을까 하던 차에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군 대감. 왕녀 아기씨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아가?”
본래라면 이런 야심한 시각에 연락도 없이 찾아올 아이가 아니었지만, 지금이 평소와 같지는 않았다.
“어서 안으로 들이거라.”
놀랍게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시아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헐떡이며 달려온 아이의 안색이 창백해 궁녀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 이르고 작은 손을 잡았다.
“몸이 왜 이리 찬 게냐. 옷도 이리 얇게 입고. 네 궁인들은 너를 이리 입혀 내보냈단 말이냐.”
이제 숙의도 없는데 이래서야 앞으로 누가 이 아이를 챙겨 줄까.
익숙한 사람이 오자 새끼고양이들이 우르르 몰려들기에 영원 대군은 잘됐다 싶어 붙잡아 시아의 품에 안겨 주었다.
온돌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녀석들이니 따뜻하겠지.
하지만 시아는 무슨 생각인지 손을 뻗어 고양이들을 안는 대신 영원 대군의 뺨을 확인했다.
“살아 있네.”
“그럼, 살아 있지.”
악몽이라도 꾸고 달려온 걸까.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어린 누이의 얼굴이 애처로웠다.
“나는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응.”
털썩 주저앉은 시아가 한숨을 내쉬더니 드물게 약한 소리를 했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아?”
“괜찮지, 그럼.”
법도에 어긋날지는 모르나 아직 이리 작고 어린 아이였다.
가장 가까운 혈육이 둘이나 그리 떠났으니 무섭고 외로울 만도 했다.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는 동생을 도닥이고 미리 펼쳐 놓은 제 이불에 고양이들과 함께 곱게 넣어 주었다.
“안 자?”
“잠이 안 와서 책이나 읽을까 하고.”
“눈 나빠진다.”
“하하. 너도 어서 자야지.”
“……응.”
아이를 도닥여 주자 불안에 떨던 시아의 눈꺼풀이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잠이 들겠구나 싶어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곶감?”
“응? 아아, 아까 야참이라며 가져왔는데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아서…….”
아까 궁녀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지만 내키지 않아 방 한구석에 밀어 놓은 참이었다.
고양이들도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음식이라 방치해 두고 있던 것인데 그게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 이거 하나 먹어도 돼?”
“그래.”
평소라면 자기 전에 무슨 군것질이냐고 잔소리를 했을 테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시아는 피곤할 때는 단 것이라고 말하던 장본인이 아니던가.
“공부하고 있었어?”
“……가만히 있으면 좋지 않은 생각만 나니까.”
“……이거 하나 더 먹어도 돼?”
“응.”
형님의 일이 있고 나서 시아를 자주 찾아가 살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시아를 보는 것도 괴로워 그리하지 못했다.
형님과 셋이 함께했던 기억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둘뿐인 동기였다. 앞으로는 잘해 주어야겠지.
“이거 하나 더 먹을게.”
“그래.”
이어지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지러이 펼쳐 둔 책을 정리하던 영원 대군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오빠, 나 딸기 하나만 더 먹어도 돼?’
예전, 형님과 시아 셋이 함께 다과를 할 적 시아가 해 주었던 괴담의 상황이 지금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궐내에 떠도는 호랑이니 창귀니 하는 소문과 겹치니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아야?”
영원 대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상도 못 한 장면과 조우해야 했다.
“시아, 시아야?!”
먹다 만 곶감을 손에 쥐고, 입가에 피를 흘리는 시아가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좇았다.
그 모습은, 귀신보다도, 호랑이보다도 무서웠다.
“누구, 누구 없느냐!! 어서 의원을 데려와라!!”
“……오빠.”
“그래, 네 오라비다. 정신 차려라!!”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시아를 부여잡은 채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애를 썼다.
“……기왕이면…… 성군 돼라…….”
“……뭐?”
이상한 말을 남기고, 붉은 핏물을 토해 낸 시아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날 밤, 궁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