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1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10)화(310/326)
“그래서 일부러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거야?”
“……영민하구나.”
“오라버니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아바마마와 세자는 그렇게 무능하지 않아.”
내 말에 성원 세자는 기쁜 듯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뜻을 꺾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 나라의 국본이었던 몸. 내 손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단다. 이해해 주렴.”
그리 말한 성원 세자는 괴로운 듯 한숨을 한번 쉬고 말을 이었다.
“그들의 욕심은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테니. 나는 그들의 혈연이며 주인으로서 그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란단다.”
“오라버니의 죄가 아닌데도?”
“죄 없이 휘말리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 역시 죄인이란다.”
“오라버니!”
“걱정하지 말거라. 너는 총명한 아이이니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내가 붙잡힌다 해도 아바마마께서 나를 죽이지는 않으실 거라는 걸.”
“하지만.”
“그저, 마지막까지 불효만 하고 가는 것이 죄스러울 뿐이지.”
“설령 죽지 않는다고 해도, 멀리 귀양 가서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데도?”
내 말에 성원 세자는 잠시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난 10여 년의 시간 동안, 조선 팔도를 두루 둘러보았단다. 세자 시절 언젠가 내가 다스려야 하는 나라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눈으로 확인해 본 것은 처음이었지.”
그리 말하는 눈동자에는 어딘지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세손도 세자도 아닌 지난 10년의 시간이 그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귀양 가서 고생하게 되는 것이 낫다. 조선 땅과 조선의 백성들을 10년 동안 돌아본 내 결론은 그렇구나.”
“무슨 결론이…….”
“그래. 제주도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하였으니 제주도로 귀양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거기 풍토병 있다던데.”
“아, 이런.”
내 말에 성원 세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디 놀러 가는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시아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구나.”
“뭘?”
뭘 부탁할 거 같은 기색이 없었으므로 나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성원 세자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듯이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네가 갇……힐 뻔했던 그 방의 문갑에, 이번 반역에 동참하는 자들이 서명한 연판장이 있을 것이다.”
“뭐……?”
“네가 직접 오지 않더라도, 화가 나서라도 한 번은 이곳을 찾아오지 않을까 하여 남겨 두었던 것이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아까 나를 가두려 한 것에 다른 의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곳에 갇힌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대신 뭔가 뒤져서 찾아낼 거라 생각했을 테지.
“너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겠지?”
“……거기에 오라버니 이름도 올라가 있는 건 아니지?”
“하하. 알다시피 내 이름은 피휘(避諱:왕의 이름을 쓰는 것을 삼가는 관습. 이 때문에 왕자들의 이름은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는 희귀 한자나 한자를 새로 만들어 짓곤 했다. 고종 황제처럼 방계에서 뜻밖에 왕이 되는 경우 흔한 한자라 개명하기도 했다.) 때문에 너무 어려워서 잘 쓰지도 않는단다.”
어차피 아는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굳이 쓰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성원 세자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당부했다.
“내가 너를 억지로 가둬 두는 것이 무리라는 것은 알았으니 이리 부탁하마. 사람을 불러도 좋으니 이곳이든…… 아니, 내가 모르는 어디든 좋으니 안전한 곳에 피해 있다가 그걸 가지고 돌아가거라.”
“왜 그렇게까지 나를 다른 곳에 피신시키려고 하는데?”
성원 세자는 한숨과 함께 기뻐하는 것인지 어이없어하는 것인지 모를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네가 외숙이, 아니, 저 역도들이 하는 일을 방해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더구나.”
“내가……?”
아까도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짚이는 곳이 없지는 않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너야 불운하게 휘말렸거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겠지만 원래 못난 놈들은 제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법 아니겠느냐. 그들이 혼란을 틈타 너나 네 주변 사람들에게 화풀이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절대로 그들의 눈에 띄어서는 아니 된다.”
“어, 그럼 그냥 궐 안에 있으면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성원 세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가능성도 있으니…… 만전을 기하는 것뿐이다.”
“이미 반란이 실패하도록 만전을 기했으면서?”
“……그래. 어찌 알았느냐?”
“그렇게 여기저기로 흔적을 남겼으면서 어찌 알았냐니.”
성원 세자가 보낸 서신과 함께 내가 받았던 또 하나의 서신.
그건 오락장에서 종종 마주쳤던, 천호와 안면이 있던 착호군들이 보낸 서신이었다.
그 서신에는 함경도에서 함께 일했던 착호군 출신 사냥꾼들이 한 수상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와,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움직이며 사병을 끌어들일 거라는 제보가 적혀 있었다.
착호군 출신 사냥꾼들이 한 일은 아마 궁에 호랑이가 들어온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군사를 이끌고 각 지방의 경계를 지나기 위한 수작으로 보인다는 내용.
‘광해군 인조반정 때 썼던 수법이었던가.’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라고 하면 군사를 이끌고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도 쉽게 허가가 떨어진다.
안 그래도 궁에 호랑이가 뛰어들었던 일이 퍼지면서 다들 호랑이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했으니 더할 것이다.
그 착호군들은 마치 그런 이치를 알고 있다는 듯 서신에 그 위험성을 적어 보냈다.
내 사저를 통해서 나에게로.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자의 측근들에게도 착호군 출신 지인을 통해서, 일전에 근무했던 지역의 지인을 통해서, 여러 가지 루트로 역모에 관한 제보가 이어졌다.
이것들은 당연히 바로 세자에게로 전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손을 쓴 듯이.
세자가 역모를 막을 수 있도록.
“오라버니잖아.”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내 추측을 증명하듯, 애써 무표정을 지으려는 세자의 눈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반란은 분명 실패할 거고 내가 저걸 가지고 가지 않더라도 내통자들의 명단은 세자의 손에 들어가도록 해 놓았겠지.”
“……그래.”
나의 말에 성원 세자는 결국 곤란한 듯 빙그레 웃었다.
“네가 이리 내 뜻을 잘 알아주니 이번에야말로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여한이 없겠구나.”
“…….”
퍽! 퍽!
“아얏?”
세자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 어지간하면 참아 주려 했지만 이번만은 참기 어려웠으므로 등짝에 주먹을 휘둘렀다.
아마 세자의 부하들도 우리 대화를 들었다면 나를 이해할 거다.
“시아야. 오라비 아프단다.”
“요새 아직 다들 옷이 두꺼워서 푹신하더라.”
“하하. 사랑의 매란 게 이런 거겠지. 그런데 이 오라비 말고 또 누굴 때린 것이냐.”
“또 다른 오라비.”
“세자 저하께서 고생이 많으시구나.”
싱글싱글 웃고 있는 걸 보니 한 대 더 패고 싶었지만 분위기를 깰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성원 세자는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역모의 실패를 계획해 두었음에도 그것이 반드시 마음대로 되리라는 확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본인 수족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하니.’
성원 세자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면 역모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알아서 자폭하겠다는 말로 들려서 영 떨떠름한데.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느냐.”
“뭔데?”
성원 세자의 태도가 진지했으므로 나도 진지하게 물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은 내가 세자였던 시절부터 나를 따르던 믿을 수 있는 이들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들고, 혹은 누군가의 부름을 듣고 나를 찾아왔지. 출세하고 싶은 야심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감히 역모를 꿈꾼 적은 없는 이들이다.”
얼굴이 다 익숙하다 했더니 내 예상이 맞은 모양이었다.
“부디 이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 있어 주렴. 그저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온 이들이다. 저들은 죄가 없으니 잘 부탁하마.”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 걱정이야?”
“나는 너를 다시 만나 이렇게 대화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뻤단다.”
다정한 손길이 내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그저 못된 오라비로 사라지려 했는데 총명한 동생이 있으면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 모양이야.”
“오라버니.”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어 마음은 편안하구나.”
세자는 나를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내 동생들. 너희가 있어 나는 정말 행복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성원 세자의 목소리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나는 성원 세자를 붙잡지 못했다.
성원 세자가 떠나고 나는 남아 있는 연선오 좌세마에게 물었다.
“오라버니는 어디로 간 거지?”
“부원군 대감께 가셨을 겁니다. 그분이 실질적으로 모든 일을 지휘하고 있으니까요.”
“걱정인데.”
부원군이 세자를 자기 꼭두각시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정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물론 세자도 종적을 감추기 전까지는 수년간 세자 노릇을 해 왔던 사람이니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리가 없지만.
“좌세마.”
“소인은 이미 관직을 떠난 몸인데 어찌 아직도 그리 부르시옵니까?”
연선오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세자를 따라가고 싶었을 텐데 내 옆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충신은 충신이었다.
하긴, 그러니 가출을 한 세자를 아직도 모시고 있지.
“뭐 어때. 지금 세자 저하의 좌세마가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냥 부원군이 역적이라고 신고하면 안 되고?”
“어찌 조카가 숙부를 역당이라 고하겠사옵니까.”
“하아. 정말.”
생각해 보니 강상의 법칙이나 윤리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숙부에게 남았을 것이니 그걸 쉽게 무시할 수 없었겠지.
그러니 저렇게 연대 책임을 지려는 게 아닌가.
내가 답답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연선오는 뜻밖에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마 세자 저하께서는 스스로의 부주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부주의? 무슨 부주의?”
“부원군 대감의 야심은 세자 저하의 존재가 사라지면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아무래도.”
물론 성원 세자가 없이도 역모는 꾸밀 수도 있었겠지만 명분도 뭣도 없으니 대충 저들끼리 임금님 놀이하다 끝났을 가능성도 높고.
“세자 저하께서는 존재를 들켰기 때문에 이리 일이 커진 것이 아닐까 고민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 어쩌다 들켰는데?”
말하는 거 보면 전국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겁게 지낸 것 같은데.
“그게, 세자 저하께서 승하하신 중전마마의 고향에 가시면서 그만…….”
“그만?”
“한양을 벗어났으니 괜찮다고 얼굴 가리는 걸 종종 잊으시더니 그만 그곳에서 세자 저하의 옥안을 한번 뵌 적이 있다는 집안사람에게 들켰습니다.”
“아앗…….”
세자가 궁에서만 살아서 본인 얼굴의 희소가치를 몰랐구나.
쉽게 잊기 힘든 얼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