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1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11)화(311/326)
‘오죽하면 천호도 기억하고 있겠어.’
인상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천호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는데 기억하고 있지 않던가.
특히 지난번에 마을 아주머니가 성원 세자의 얼굴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던 걸 생각하니 새삼 느껴지는 바가 있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원군 대감은 성원 세자 저하께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자 역심을 품고 세자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세자 저하께서도 처음에는 내심 육친의 정이 그리웠는지 종종 찾아뵙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속내를 아시곤 내내 피해 다니셨지요.”
“음.”
성원 세자 입장에서는 몇 안 되는 친척이니 어지간히 귀찮아도 완전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겠지.
안 그래도 도망친 덕분에 다른 가족들과는 만날 수 없게 된 세자였으니 마음이 약해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는 자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박장에 인신매매까지 인간 말종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 저하께서 이를 고변할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신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왜 마음이 바뀌게 된 거지?”
연선오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과 함께 답했다.
“지난달, 궁에 호랑이가 들어가지 않았사옵니까. 전부터 부원군 대감이 그런 운을 띄운 적이 있었으나 설마 그런 망극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만-”
“저질렀다는 거군.”
범인이 그놈이었냐!!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나 그딴 소릴 지껄이다니.
“예. 저 역시도 소식을 듣자마자 누가 한 일인지 단번에 알았으니까요. 그 일로 수영 옹주 자가께서 호랑이와 마주쳐 큰일이 날 뻔했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이대로 두어선 안 된다고 마음을 정하신 것 같았습니다.”
연선오의 말을 들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이 정말!’
결국 저런 결심을 하게 된 원인도 나였다니.
성원 세자가 나에게 가지지 않아도 될 부채감까지 느끼고 있던 것을 보면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영빈과 경언군, 아니, 폐서인 홍씨와 이수가 저지른 일까지 왜 세자가 죄책감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사실 연선오가 하는 말은 그야말로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는데 이걸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나도 물어보고 싶군. 이번에는 정말…… 성원 세자가 이대로 사지로 걸어가려는 거라면, 그래도 이대로 지켜만 볼 셈인가?”
“송구합니다. 옹주 자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말 성원 세자가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이런 일을 하는 건지 믿기가 어려웠다.
‘만약 성원 세자가 정말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는 거라면, 그럼 어찌해야 하지.’
나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얼굴의 사내들을 확인했다.
연선오를 포함해서 다들 송구하다는 말 외엔 묵묵부답으로 자리를 지킬 뿐이었지만 그들 역시 성원 세자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함께 역모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겠지.’
좌세마처럼 혈혈단신의 몸이라면 모를까, 가족들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좌세마도 조금 걱정이었다.
‘성원 세자가 그런 당부를 남기고 간 이유가 있겠는데.’
좌세마도 그렇고,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원 세자의 곁에서 내가 걸음마 하던 시절을 지켜본 이들이었다.
역적이 되러 가는 세자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그들에게 내 곁을 지킨다는 건 일종의 면죄부로 느껴지겠지.
“옹주 자가. 날이 아직 찹니다. 다른 방으로 드시지요.”
“아니, 저 방에 두고 온 것이 있어 잠시 들어가 봐야겠다.”
“예?”
“설마, 또 문 잠그고 가두지는 않겠지?”
“세자 저하도 아니 계시는데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하겠사옵니까.”
성원 세자가 말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방으로 돌아가 아까 들은 대로 문갑을 뒤졌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으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정확히 어느 것인지 말해 주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뒤지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래도 금방 원하는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도 사발통문…… 세자의 이름은 안 적었다더니 정말이군. 그나저나 이놈들, 할 건 다 했네.’
대충 봐도 내가 아는 이름까지 있어 절로 혀를 차게 만드는 목록이었다.
‘다들, 세자가 하는 일에 불만이 있다 이거지.’
뭐 불만이 많을 것은 예상했다. 세자가 바보가 아닌데 어찌 몰랐겠는가. 그래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하는 것이다.
‘성원 세자가 살아 있을 거라는 거 하나는 상상도 못 했지만.’
혹시라도 더 쓸 만한 물건이 있나 마지막까지 방 안을 철저히 뒤지고 연선오를 비롯한 이들에게도 뭔가 숨겨 놓은 곳이 더 있는 게 아닌가 확인까지 했다.
하지만 성원 세자는 이곳 외의 다른 방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고 하니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이제 가야겠다.”
내 말에 전직 익위사 사람들은 난색을 표했다.
“안 됩니다. 성원 세자 저하의 말씀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겠다면 가는 것이지. 자네들이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이이이익-
동시에 담장 너머에서 갑자기 횃불과 사람 그림자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헉, 뭐, 뭐야.”
“뭐긴. 내 부하들이지.”
끼기긱-
역당들과 마주칠 걸 대비해 지시했던지라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이 다들 까칠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다들 기겁한 눈치였다. 저쪽이 이미 활시위까지 당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빼고.
‘그리 규모가 큰 집이 아니라 다행이지.’
예전에 불법 도박장이 있던 그 집이었다면 너무 넓어서 이렇게는 힘들었을 거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옹주 자가?”
“나도 명색이 옹주인데 역당을 찾아오며 아무 안전장치 없이 그냥 올 순 없지 않겠느냐?”
내가 여기로 들어오기 전부터 시영원에서 푼 사람들이 이 주변을 알짱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어제 급하게 여기저기에 연락을 했지.’
오늘 오락원에서 무료 공연을 하도록 말이다. 그것도 내부가 아닌 밖에서 맛보기 하듯 말이다.
급하게 인쇄소에도 연락해 광고를 뿌려 놓은 데다가 입소문까지 나서 아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이미 사람이 밀려들고 있었다.
예상보다 사람이 많이 와서 조 당황했지만, 이 주변이 온통 붐비고 있었던 덕분에 시영원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도 크게 티가 안 났을 거다.
아마 이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오늘 갑자기 왜 이렇게 이 동네에 사람이 많은 건지 의아해했겠지만 곧 공연을 보러 나오지 않았을까.
공연을 보러 가느라 바쁜 데다, 사람이 많으니 벽에 붙어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신경 쓰는 이도 많지 않았을 테고.
‘아직 날도 쌀쌀한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그래도 인구밀도가 저렇게 높으면 좀 덜 춥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천호와 체탐인 출신 시영원 선생 하나가 달려와 내 안전을 살폈다.
“옹주 자가. 무사하십니까?”
“응. 괜찮아.”
생리통 때문에 허리가 좀 아파서 그렇지.
“모시겠습니다.”
“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서 있는 성원 세자의 측근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성원 세자가 나를 지키라고 했는데 내가 실은 이렇게 사람들을 몰고 다녔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나는 자네들이 아니어도 지켜 줄 사람이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 오라버니를 지킬 생각이 있다면 찾아오게. 나를 찾으려면 어디로 와야 하는지 알지? 뭐, 방법은 워낙 많으니까 알아서 잘 찾아오게.”
그 말만 남기고 그 집에서 빠져나오려던 나는 순간 생각난 것이 있어 잠시 멈춰 섰다.
“아.”
“어찌 그러십니까?”
“잠깐만.”
나는 호루라기 말고도 목에 걸고 있던 것을 꺼냈다.
“!”
천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듯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
나는 목에 걸고 있던 것을 연선오에게 건넸다.
“이거 오라버니에게 전해 줘.”
“이건 설마……?”
연선오는 성원 세자의 최측근이어서 그런가, 이게 뭔지 아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성원 세자가 나에게 이걸 줄 때 곁에 있었지.’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내가 맡아 두고 있던 것이야. 잘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었으니 그건 지켜야지.”
“……예. 옹주 자가.”
내가 건넨 옥가락지를 받아 든 연선오는 무척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저들이 어찌 나오든 그 결정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은 연선오겠지.
그들이 어찌할지는 봐야 알겠지만 저들의 도움이 없으면 성원 세자를 돕는 것도 요원할 테니 지금은 우선 오늘 얻게 된 것들부터 세자에게 전해야 했다.
나 참, 옹주가 무슨 이런 일까지 한담.
뭔가 잘못되어 있어.
“하아.”
“춥지는 않으십니까? 일단 사가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궁궐로 바로 돌아가야겠다. 해야 할 일이 있어.”
“별로 괜찮지 않아 보이시는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성원 세자와 만난 기와집을 벗어나서도 천호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 상태를 살폈다. 나도 기운이 없이 천호에게 반쯤 기대고 있다 보니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나 보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지치고 피곤해서 그래.”
“그럼 적아가 있는 곳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
잠깐 사이에 몸이 공중에 붕 떠 있었다.
‘음. 이제 예전처럼 아담 사이즈도 아니고, 두꺼운 옷까지 입어서 무거울 텐데 잘도 드네.’
일명 공주님 안기라고 불리는 자세였는데 천호가 힘이 좋아서 그런가, 꽤 안정적이었다.
편하다.
천호에게 기대 숨을 돌리는데 작은 목소리로 천호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니, 옹주 자가께서는 왜 이렇게 위험한 일만 하십니까?”
“안 위험하다고 확신 준 게 넌데.”
“저는 그런 말씀 들으려고 말씀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성원 세자가 나나 세자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준 것은, 어제 천호와 어색한 분위기에서 대화하다 나온 얘기 덕분이었다.
‘나와 대화하던 그자들이?’
‘예. 세자 저하께서 일전에 산에서 실종되었을 때 도와준 사람이 맞습니다. 심지어 그 잘생긴 선비님은 구덩이에 직접 들어가서 꺼내 올리기까지 했는걸요. 세자 저하는 체격도 좋으시니 꽤 힘들었을 텐데 불평 한마디 없이 세자 저하와 세화 의원까지 올라오는 걸 다 도왔습니다.’
‘그게 사실이야?’
‘예. 제가 직접 보았으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산에서 내려올 때는 세화 의원을 업고 내려오는 저를 도와주기까지 했던 그 사람이 맞습니다.’
‘아, 그래 맞아. 그때…… 연선오 좌세마를 만났었지.’
‘그때 저희가 찾아갔을 때 도망치듯이 종적을 감췄었죠. 큰 상을 받을 일이었는데요.’
당시에는 좌세마가 그렇게 사라진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일이 이리되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원 세자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 도망갔던 거야.’
제 동생을 구해 놓고 도망이라니, 궁상맞게.
‘그때는 워낙 어두울 때 봐서 얼굴을 잘 못 알아봤지만, 그 후 강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얼굴을 확인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보기 드문 인상적인 얼굴 아닙니까.’
천호는 잘생겼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 인연이 있었으니, 시냇가에서 역당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두 사람이 옹주 자가와 대화 나누는 것을 보고 그리 걱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용케 활까지 쏴 가며 도망치게 엄호했단 말이지. 거의 동물적인 감각 아냐?’
‘하하.’
칭찬인지 뭔지 모를 내 말에 천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렇게 구해 놓고 이제 와서 세자를…… 해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게다가 세자는 세자고 나를 해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물론 10년도 넘게 지났으니 사람이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천호의 증언을 들으면 그래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수상쩍을 정도로 착착 도착하는 역모의 고변들도 내 추측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니 나도 위험한 도박을 건 거지.’
천호에게 들려 오락장에 도착한 나는 오늘 나를 돕기 위해 모여 준 이들을 치하했다.
“다들 갑자기 위험한 일을 시켜서 미안한걸.”
“아닙니다. 옹주 자가께서 위험하시다는데 어찌 소인들이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그냥 와도 괜찮은 겁니까?”
나는 내 품에 든 연판장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싸우려고 했다면 그들도 이렇게 순순히 보내 주지 않았을 거다.
“그쪽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