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1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12)화(312/326)
해가 저문 산길은 어두웠다.
앞쪽에서 횃불을 들고 앞장서는 이들을 따르며, 성원 세자는 옆에 있는 연선오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들, 정말 나와 함께할 생각인가?”
“저희가 이제 와서 세자 저하 곁을 떠나 있어 봤자 누군들 믿겠사옵니까?”
연선오의 말에 성원 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찾아 모여든 전직 익위사 관원들은 원래도 많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의 곁에 남은 이들은 대부분 연선오처럼 딱히 가족이나 친지들이 없는 이들뿐이었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충심을 다하겠다는 그들을 떼어 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옹주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면 그들도 납득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들도 능구렁이들이 가득한 궁 안에서 보낸 세월이 적지 않은 이들이니 그 속내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성원 세자 자신이라면 모를까, 그 측근들까지 목숨을 보장받기는 어려운 법이니.
지금 자신을 따르겠다는 것은 죽으러 가겠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그래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자들은 시아의 곁에 남은 모양이니 다행인가.’
어떻게든 거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들을 떼어 내어야 했으나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시아는…… 옹주는 어떠하던가.”
“옹주 자가께서는 대범한 분이시니 저희의 보호 따위는 필요 없어 보이셨습니다.”
“힘든 일이 많았는데 잘 컸지…….”
“다소 과격하신 면이 있는 듯했사옵니다만.”
“그건 어릴 적부터 그러했던 것 같은데.”
그 말에 연선오 역시 동감하는지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원 세자는 시아를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한밤중이라 그런가, 아까부터 조금 졸리군. 아까 요기를 좀 했더니 배가 불러서 그런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성원 세자는 눈에 애써 힘을 줬다.
“옹주 자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혼자서도 힘없는 평범한 옹주 자가가 아니십니다.”
“평가가 후한 건지 박한 건지 모르겠군.”
기억 속의 누이동생은 아직도 작기만 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늘 웃음만 나왔다.
그 어린아이가 은근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고도 제법 치고 다녔는데, 생각해 보면 아바마마의 귀에까지 들어갈 만한 위험한 일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걸 보면 제법 요령도 좋은 아이였다.
“그래. 그 아이가 괜찮다면 되었다.”
누이동생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어린아이에게 몇 없는 가족을 계속 잃는 경험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어쩌면 그 곶감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먹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지.’
곧 양성한 사병들을 이끌고 반란군의 수괴가 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지만, 이미 모든 정보가 전달되었으니 지금의 세자 저하께서 평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아우는 총명하고 행동력도 있는 아이였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부족함이 있더라도 부왕께서 계시니까.
‘혹 많이 편찮으신 걸까.’
시아에게 묻고 싶었지만, 오라비 때문이라 욕만 먹을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대리청정 때까지만 해도 강건하시다고 들었는데 어쩐지 갈수록 정무에는 손을 대지 않고 계시다는 듯해 신경이 쓰였다.
못난 자식놈 때문에 마음고생하셨을 걸 생각하면 죄송할 뿐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더한 불효를 저지를 생각이었다.
‘아, 이런.’
순간, 몸이 휘청한 것을 느낀 성원 세자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주변에서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세자 저하야말로 정말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안 괜찮은 건 자네들 아닌가. 지금이라도…….”
“늦었습니다.”
“이젠 내 말도 끊는 겐가…….”
시아도 그러더니 이제 연선오까지.
이제 와서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혹시 그 잠깐 사이에 영향을 받은 건가.
시아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은 무사할 거라고 했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은 일이었다.
아바마마야 어떠실지 몰라도 지금의 세자가 후에 권력을 잡게 될 때 자신은 꽤 걸리적거리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존재 자체가 불화를 일으키지 않던가.
‘그러니 제대로 사라져 주는 것이 좋겠지…….’
궁을 나와 지난 십여 년간 홀가분하게 살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죄책감은 떨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편해질 기회가 온 것은 틀림없건만 이 부족한 사람을 아직까지 이렇게 따라 주는 이들이 있다니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어떻게든 돌려보내야지.’
사병들을 점검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익위사였던 가까운 호위들만 데리고 가는 길이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우선 이 어두운 산길을 벗어난 후에.
“이런, 저하. 잠시만 멈추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앞에 커다란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있어 치우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직접 확인하겠다.”
잠을 좀 깰 겸 말에서 내려 횃불을 가져다 대 보니, 확실히 작은 나무로 보일 정도로 커다란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부러진 나무는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밤이라 어둡기도 하고, 눈이 녹으며 어디선가 미끄러져 내려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근처에 산짐승이 있을지 모르니 주의하게.”
“예.”
곧 앞선 걷던 장정 몇이 가지를 치우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니 치워지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설마 관군이 벌써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닐까.
아직 다른 측근들을 피신시키지 못하였는데 그것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아, 이런.’
순간 또 몸이 휘청했다. 어둠 속이라 다들 눈치채지 못했겠지 싶어 안도하는데 연선오가 다가왔다.
“세자 저하.”
“무슨 일인가.”
“실은 저하께 전해 드려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 옹주 자가께서 저하께 전해 달라며 주신 물건입니다.”
“왜 그걸 이제야…….”
시아의 안전을 확인하고 먼저 돌아왔을 때 건네주었으면 되었을 것을.
“저하께서 계속 부원군이나 다른 분들과 함께 계셔서 말씀을 꺼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 던가.”
이제 거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여기저기 얼굴을 내비쳐야 하는 곳이 많았다.
수영 옹주에 대해서는 일단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외숙만이 알고 있었다.
‘아마 이제 와서 옹주가 뭔가 공을 세우는 건 싫다는 뜻이겠지.’
외숙은 속이 시커먼 사람이었지만,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 눈에는 속이 뻔히 보인다는 것 하나는 장점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포함해 얼마나 끔찍한 짓을 해 왔을지……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했고, 늦었더라도 지금껏 막지 못한 책임 또한 져야 했다.
물론 어떻게 되든 결국 권력을 쥔 이들은 타락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결국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었다.
순간, 또 의식이 흐려졌다.
“저하?”
“아,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으십니다.”
“어쩔 수 없지 않겠나. 거사를 앞두고 있으니 말일세.”
성원 세자의 말에 연선오가 작은 목소리로 권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런 말 하지 말게. 내 결심은 확고하니.”
“그렇사옵니까…….”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에게는 못 할 짓만 시키고 있는 듯하여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역시 자네들은 지금이라도 떠나는 게 좋겠네.”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 각오 역시 확고해집니다.”
“자네도 참 말을 안 듣는군.”
“주군을 닮은 것이겠지요.”
“그래. 전해야 할 물건은 무엇인가.”
겨우 본론으로 돌아오자 연선오는 아쉬운 얼굴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옹주 자가께서 세자 저하께 돌려드리기로 약조한 물건이니 전해 달라고 하셨사옵니다.”
“나에게 돌려주기로 약조한 물건이라면…….”
연선오가 꺼낸 물건을 받은 세자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주변에서 들고 있는 횃불의 불빛이 멀어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손에 닿는 감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았다.
‘어마마마의 옥가락지.’
강무를 떠나기 전 자신이 시아에게 맡긴 물건이었다.
죽음을 위장하고 도망친 이후 종종 시아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곤 했지만, 설마 이렇게 다시 자신의 손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런 물건을 아직도 소중히 가지고 있었을 동생을 떠올리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분명 나중에 동생의 원망을 사겠지.
‘시아는 많이 슬퍼하겠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아이만은 진심으로 슬퍼할 것이다.
미안함과 동시에, 자신이 죽어도 기억해 주고 슬퍼해 줄 이가 있다는 사실 하나가 작은 위안으로 남았다.
“옹주 자가께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그 아이에게는 그저 미안할 뿐이다.”
옥가락지에서 시선을 떼고, 연선오에게 다시 시선을 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너희에게도. 아무것도 주지 못한 나를 이렇게까지 따라 주는데 내가 어찌 미안하지 않겠느냐.”
“그럼 미안한 일을 하지 않으시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하하, 그건 내세에 갚도록 하마.”
“아무리 그만두셨다지만 명색이 세자 저하신데 불자(佛者)들처럼 말씀하십니까.”
“하하. 이제 세자도 아닌데 뭐. 아마 어마마마께서 가끔 말씀하시던 것이 남은 게지.”
다정하셨던 어마마마.
아랫것들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일 없이 존대를 붙일 정도셨다던 그분이, 정말 다른 용종들을 해쳤을까.
자신이 기억하는 어마마마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아닐 거라고 믿지만.’
어마마마를 모시는 궁녀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면, 모르고 웃으며 후궁들을 대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속으로 위선자라 얼마나 욕했을까.
아바마마 역시 알게 된다면 어마마마를 원망하실지도 몰랐다.
‘내궁의 일은 알기 어렵다라…….’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늘 공부로 바쁜 세자가 다른 후궁들의 일을 알기는 어려웠고, 부왕 역시 늘 국사로 바쁘신 데다 후궁들에게 깊은 관심이 없는 분이시니, 누군가 알려주는 이가 없다면 알 도리가 없었다.
내궁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중궁전의 위세에 뉘가 감히 도전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사죄해 보았자, 아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후궁들만 새삼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겁에 질릴 뿐 아니겠는가.
‘그들은…… 내가 사라졌을 때 누구보다도 안도했겠지.’
이것이 가장 확실한 사죄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리 살아 있는 것조차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저 죄스러울 뿐.
지금의 중전이 자신을 경계하고 친아들의 공부를 반대한 것 역시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을 테니.
죄 많은 이 몸 대신 살아남은 영민한 아우가 있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시아에게도 미안했지만 이화에게도 미안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자의 자리에 걸맞은 것은 내가 아닌 그 아이다.’
목숨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은 이화, 영원 대군. 그 아이야말로 세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본디 총명한 아이였으니, 훌륭한 세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기대했던 대로 하나뿐인 남동생은 백성을 생각하는 세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어린 누이동생은 고아들을 모아 의식주를 돕고 공부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동생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앞날에 재를 뿌리다 못해 목숨까지 위협하는 존재를, 자신의 혈육이라 하여도 용서할 수 없었다.
옥가락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아에게는 국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지만, 틀렸다.
이것은 형으로서, 오라비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목에 걸고 다녔던 그대로 가져왔는지 끈이 꿰어 있는 옥가락지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듬어 본 성원 세자는 그것을 목에 걸었다.
여인의 손가락에 들어가는 크기라 자신이 손가락에 끼려 해도 들어가지도 않을 터이니 이게 적당했다.
‘내가 이걸 시아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이 옥가락지가 그때 그 옥가락지라는 사실을 알아챌 만한 사람은 없으니 괜찮겠지.’
물론 원주인인 부왕의 존재가 떠올랐으나, 계속 시아가 지니고 있었다면 아바마마 역시 이것이 그 옥가락지라 장담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시아가 이것을 자신에게 전해 달라고 했던 마음을 떠올리면 가슴이 무거웠지만…….
순간 다시 몸이 휘청했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피로가 쌓였는지 조금 곤하구나.”
“조금 쉬시지요.”
“그럴 수는…… 없지.”
“저하, 저쪽을 보십시오.”
나뭇가지를 치우느라 땀을 흘리던 사내들은 물론 세자의 측근들까지 긴장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누굴까요?”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은데…….”
다들 긴장한 얼굴로 조용히 무기에 손을 올렸다.
어둠 속이라 이게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마음을 편하게 하기에는 다른 방법도 없었다.
상대방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상대의 숫자가 적지 않고 말을 타고 있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에 다들 긴장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걸 느끼는 한 사람만을 빼고.
그리고 그 팽팽한 공기를 깨듯 태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시아?”
선두에서 말 위에 타고 있는 것은 분명 성원 세자의 하나뿐인 누이동생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오라버니와 대화를 좀 더 해 볼까 하고.”
“여기는…… 어떻게 알고…….”
“글쎄.”
웃고 있는 시아와, 무너지는 자신을 붙드는 손길을 느끼며, 결국 붙잡고 있던 의식이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