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1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15)화(315/326)
누군지도 모르는 여아를 구하기 위해 위험하게 산속까지 쫓아왔던 소년이었다.
생면부지의 이에게 쉬이 빌려줄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믿을 만하다 여기고 말을 빌려주었다.
선오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여동생을 구해 준 소년이 그리 다급하게 청하는데 말을 빌려주는 게 대수일까.
그 후에 소년이 말했던 대로 혜민서에서 말을 찾아가기도 했으니 자신의 눈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날 그 인근에서 불법 노예 매매를 하던 자들이 또 시아를 납치했다가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쩌면 외숙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이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세자 저하께서 해결하실 일이기에 수영 옹주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확인하고 한양을 떠났었다.
외숙이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다.
동생이 세자 저하와 옹주 자가이다 보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중요한 소식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귀에 들어오는 법이니까.
그 후 겨울마다 찾아가던 강원도에서 또 동생들과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그 소년은 강원도에서도 시아와 붙어 있었지.’
설마 지금까지도 시아의 곁에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아마 그때의 연이 이어졌던 것이리라.
‘시아가 선량하고 총명한 아이인 만큼 좋은 인연들이 이어진 거겠지.’
못난 오라비 대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그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자신이 시아에게 보낸 도자기를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은 후, 제 목에 걸려 있는 옥가락지도 확인한 성원 세자는 천천히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어째서일까.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새삼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몸을 비틀다 고개를 돌리면 또다시 도자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도자기들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외숙이 그런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처형당한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잔악한 이였지만,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그리 귀애하던 외숙이기도 했었다.
슬프다. 슬프지만 동시에 홀가분하기도 했다. 그 사실이 또 괴롭기도 했다.
아까 먹은 탕약 덕분일까, 다행히 더 깊은 슬픔에 빠지기 전 바로 졸음이 밀려와 성원 세자는 뻑뻑한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분명 밤중에 기절하고 아까 낮에 일어났는데, 그럼 종일 잔 건가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마 그동안의 긴장이 풀린 게 아닐까 생각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힘든 일을 결국 동생들에게만 떠넘겼구나.’
일어나니 의외로 지키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아까도 방 안에서 지키고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역모가 일어났으니 이곳도 안팎으로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테니 오히려 내부의 경계는 허술한 듯했다.
옹주를 생각해서라도 이곳에서 허튼짓은 하지 않을 거라 여긴 걸 수도 있고.
‘하긴, 이 계절에 이런 얇은 옷차림으로 도망이라도 갔다가는 그냥 얼어 죽겠지.’
아까보다는 머리도 산뜻하고, 잠시라도 밖으로 나가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여니 뜻밖이라면 뜻밖이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인물과 마주쳤다.
“어딜 가십니까?”
“아, 잠시 바람이 쐬고 싶어서…….”
세화였다. 손에 들린 것을 보니 탕약을 먹이고 진맥을 하기 위해 온 듯했다.
혹시 돌아다니면 안 되려나 싶어 괜히 뜨끔했으나 세화는 덤덤하게 잔소리를 했다.
“그 상태로 나가시면 감모 드십니다. 아까 영선이 옷을 가져다 둔 듯하니 걸치시지요.”
“…….”
“물론 그 전에 이 탕약은 드시고, 진맥도 받으시고요.”
“아, 예.”
엉겁결에 다시 방으로 들어와 주는 대로 탕약을 받아 마셨다.
옷까지 줄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 당혹스러웠지만 진맥을 받은 후, 주는 대로 옷도 입었다.
“어두워지는데 낯선 곳을 혼자 다니시는 것은 불안하니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공연히 성가시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옹주 자가의 사가는 넓으니 어두울 때 혼자 다니시면 여기로 못 찾아오실 수도 있습니다.”
“하하.”
생각해 보니 그랬다.
게다가 시아가 아끼는 골동품들을 모아놓은 방이라고 했으니 여기는 분명 꽤 안쪽 깊숙한 곳일 터였다.
‘혼자 다니다 중간에 하인들과 마주쳐서 누구냔 소릴 들으면 조금 민망하겠군.’
“사실 영선이 함께 하는 것이 좋을 텐데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아서요.”
“그렇습니까?”
하긴 귀인의 수발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자리를 비우다니 주인에게 들킨다면 경을 칠 일이었다.
‘시아가 너무 관대한 게 아닐까.’
궁에서야 엄격하게 교육을 받은 궁녀들이 모시니 그런 걱정은 덜했지만, 아무래도 조금 걱정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오라비가 그런 걱정을 해 보았자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성원 세자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세화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어, 그런데 정말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압니다. 옹주 자가의 첫째 오라버님이 아니십니까.”
“…….”
성원 세자라 부르지 않았을 뿐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알고 있어도?’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눈치챈 세화가 안심시키듯 입을 열었다.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내의원 의원이 입이 가볍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동생들이 순진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의원이라면 모를까, 세화는 너무 젊어 보였다.
“세자 저하가 걱정되십니까.”
“…….”
“세자 저하께서는 아직 제 약점도 잡고 계시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라기에는 어딘지 이상했지만, 저무는 석양 아래 세화의 표정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성원 세자는 뭔가를 깨달았다. 예전 강원도에서 세자와 함께하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혹시, 세자 저하와…… 그, 깊은 사이이십니까?”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냥…… 그렇게 보입니다.”
세화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기에 성원 세자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사정이 조금 있습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원손(元孫)을 보셔야…… 죄송합니다.”
걱정 많은 집안 어르신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을 뻔한 성원 세자는 곧 지금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빠르게 사과했다.
아직까지 세자빈을 맞지 못한 세자가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얘기는 실례였다.
“아닙니다. 맞는 말인걸요. 다만 제가 조금 사정이 있어서 그럴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
“그래도 아마, 곧 해결되겠지요.”
“그렇습니까.”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이 이어지는 와중 성원 세자는 자신이 어느새 머물고 있던 처소에서 꽤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돌아가야 할까?’
어디로 온 건지 주변에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과년한 처자, 그것도 동생과 깊은 사이인 여인과 단둘이라니 좋지 않았다.
성원 세자는 세화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떨…….”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 멀리서 귀에 익은 이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찔렀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기에 자연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던 두 사람은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영선이 너야말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야!”
한 명은 영선이임에 틀림없었지만 다른 한 명은 모르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세화와 성원 세자는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둘 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투고 있는 듯한데 이대로 못 들은 척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
“네 아버지께서 부르시는데 네가 어찌 그리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머니. 정말 지금 이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르실 생각이세요?”
“영선아. 지금이라도 네 아버지를 따라야지. 그게 우리 도리가 아니냐. 언제까지 그리 철없이 제멋대로 굴 거야!”
“…….”
성원 세자와 세화는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모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이게 다 옹주 자가 때문이다. 네가 옹주 자가 밑에 있으며 이리 애비 애미 말도 무시하는 몰상식한 것이 된 게지.”
“어찌 옹주 자가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십니까. 지금까지 어머니께서 이곳에서 편히 지내실 수 있던 것이 누구 덕분인지 모르십니까?”
“그만큼 네가 일을 하고 있지 않더냐!”
“어찌 옹주 자가가 아닌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제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생각지 않으세요?!”
“너는, 대체 언제까지 그런 소릴 할 것이냐. 네 아버지의 은혜는 그리 하루아침에 잊어 놓고!”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 옳은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짜악-!
살가죽을 때리는 소리가 세화와 성원 세자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네 아버지와 함께할 것이다. 네가 내 딸이라면,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 알겠느냐?”
“……예. 알겠어요, 어머니.”
“그래. 잘 생각했다. 네가 이제야 말을 듣는구나. 이미 전부터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짐을 챙겨두었다. 짐이라고는 많지도 않으니까 어렵지 않을 게다. 지금 바로 떠나자. 너라면 심부름이라고 적당히 둘러대고 나올 수 있지 않느냐?”
“어머니.”
“그래.”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해 놓을 테니 어머니 먼저 나가셔서 아버지와 함께 떠날 계획을 세우세요.”
“계획은 네 아버지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지 않았겠니.”
“저는 옹주 자가의 명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갈 수 없어요. 나중에 나갈 터이니 먼저 가 계세요.”
“그래. 네가 귀중품들을 관리하니 나올 때 몰래 값나가는 물건들 좀 챙겨오고.”
“……예. 만약 제가 붙잡히면 나갈 수 없을 테니 두 분이라도 꼭 도망치세요.”
“너는 어찌 그런 부정적인 말만 하는 게냐. 네가 그리 부정적이니 사내 마음도 못 잡고 이리 청승맞은 처지가 된 게 아니냐.”
“……어머니.”
“어머? 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영선은 중년 여성을 한번 꼭 안고는 천천히 떨어졌다.
“아니에요. 어서 가세요. 저는 손님께 저녁상을 내드려야 해요.”
“그래. 빨리 오거라.”
“예.”
중년 여인이 사라지고, 영선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서글퍼 보였기에 세화도 성원 세자도 조용히 몸을 돌려 처소로 돌아왔다.
“옹주 자가께, 말씀드려야 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아까 듣기로는 분명 이곳에서 도주하겠다는 대화였는데.
“두 분 다 나와 계셨습니까?”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느새 다가온 영선이 고개를 숙였다.
“날이 아직 추우니 들어가시지요. 곧 저녁상을 내오겠습니다. 혹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세화 의원님도 저녁 전이시면 식사하고 가시지요? 곧 준비하겠습니다.”
영선은 아까의 격앙된 목소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사라졌다.
“정말, 괜찮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
아까 영선과 그 어머니의 대화가 그런 온건하게 들리지 않았던지라 두 사람은 뜬금없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뜻밖에도, 두 사람의 고민을 날려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여기 나와서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