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18)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18)화(318/326)
‘세화와 천호 둘 다 충격받았을 텐데…….’
둘 다 벗어 놓은 신발을 챙겨 신는 시간이 있다 보니 내가 늦게 나왔어도 어디로 가는지 방향은 대충 보였다.
일단 내 기준으로 세화는 왼쪽, 천호는 오른쪽.
아, 왜 둘이 반대로 가는데!
둘이 왜 충격받았는지 대화하다가 남매 좀 상봉하라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서로 남매라는 사실을 모르는데 천호가 먼저 나간 세화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둘 중에 어느 쪽을 위로하러 가야 하냐고 묻는다면,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세화를 위로하러 가면 이상하잖아.’
세화가 아직 나한테 본인이 김선익 대감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세화를 위로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이미 나한테 출신이 발각된 천호한테 가는 게 맞았다.
‘아무래도 세화가 천호보다 충격이 클 거 같지만 그래도 천호 역시 놀랐겠지.’
솔직히 천호도 아직 어린 아이라 걱정이 앞섰다.
너무 어릴 적에 아버지와 떨어져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천호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으니 마음이 편할 것 같지가 않았다.
아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그리고 옆에서 좀 괜찮냐고 해 줄 사람도.
“천호.”
“아, 옹주 자가. 추운데 왜 나오셨습니까.”
다행히 천호는 멀리 가지 않고 툇마루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었다.
“괜찮아? 많이 놀랐지?”
“……괜찮습니다. 그냥,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어서 조금,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천호는 드물게도 힘없이 웃었다.
“어휴, 아직 어린애가 그런 소릴 하고 있어.”
“네?”
내 말에 천호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화나잖아. 아버지가 역도로 몰려서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누나랑도 헤어지고, 어린 나이에 도망쳐서 고생하며 살았잖아. 그럴 때는 화내고 욕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래야지.”
내가 주먹을 불끈 쥐며 그리 말하자 천호는 도리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해요. 그런 거.”
“어, 그래?”
보통 하지 않나?
나는 과거 나를 화나게 했던 경언군과 기타 등등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참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풀었던 것 같군.’
말 못 하던 시절까지 포함이라 그런가, 욕은 안 했던 거 같지만.
“무섭잖아요.”
“뭐가?”
“……이렇게 커다란 놈이 욕하고 소리 지르고 그러면요.”
그렇게 말하며 천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크긴 크지,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비유하자면 시무룩한 대형견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안쓰러웠다.
“천호가 무섭긴 뭐가 무서워.”
“정말요?”
“그럼, 이렇게 착한데.”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툇마루에 기운 없이 앉아 있는 아이의 머리를 감싸 안듯이 토닥거리자 조금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옹주 자가. 저 강아지 아닌 건 알고 계시죠?”
“알지, 그럼.”
이렇게 커다란 강아지가 어딨어.
“강아지 취급 같은데요.”
“강아지였으면 듬뿍 귀여워해 준 다음에 ‘오늘은 누나랑 같이 자자~’ 하고 안고 재워 줬을걸.”
꼬마도 그렇지만 옛날에, 정확하게 말하면 전생에 강아지를 키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호의 머리를 토닥였더니 어이없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투덜거리던 천호는 몇 번인가 한숨을 몰아쉬더니, 내 어깨에 고개를 푹 기대며 소심한 목소리로 청했다.
“옹주 자가.”
“응.”
“그냥, 잠깐만, 이렇게 하고 있으면…… 안 될까요?”
“……그래.”
드물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천호를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인데 그런 이유로 돌아가시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하니까 역시 화가 나네요.”
“그럴 만도 하지.”
토닥토닥.
“사실 아버지라고 해도 이젠 얼굴도 목소리도 뭐 하나 기억나는 게 없어요. 그래서 그런가, 숙부가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열을 낼 때도 저는 만약 정말 아버지가 잘못하신 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거든요.”
“그렇구나.”
천호는 당시에 너무 어렸지. 지금 말하는 게 냉정하다면 냉정하지만 주변 어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 저런 생각을 했다면 본인의 줏대가 뚜렷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렇게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고.
“제가 이상한 걸까요? 제 친아버지인데.”
“그럴 수도 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제가…… 뭔가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했는데요.”
아버지 일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숙부한테 타박이라도 들었나.
“글쎄.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
“?”
음, 천호 입장에선 생사불명인 누나를 예로 드는 건 좀 그렇고.
“만약 너의 숙부한테 무슨 일이…….”
“그 아저씨는 죽어도 안 죽을 분이시라.”
“음, 그럼…… 누가 나를 암살 사주해서 죽였다고 생각해 보면 어때? 화가 나?”
내 말에 천호는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더니 갑자기 내 치맛자락을 꼭 붙들었다.
균형이 무너지며 내 손은 천호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어쩐지 좀 마주 안은 것 같은 자세가 되어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얘가 참…… 몸이 좋단 말이야.’
새삼스럽게 뭔가 좀 부적절한 일을 하는 것 같아 나도 묘하게 긴장됐다.
“……무서운 말씀 하지 마세요.”
“무서워?”
“만약 옹주 자가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죽어도 용서 못 할 겁니다.”
목적어도 없이 말하는 어린놈의 목소리가 제법 흉흉했다.
나는 엉거주춤해진 자세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천호의 분위기가 계속 어두웠기에 먼저 달래 주기로 했다.
“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천호가 뭐 안 해도 사형이야.”
그리고 곧 천호에게서 뭔가 김빠진 듯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으건 그렇겠지만요……. 그렇네요. 감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봐요.”
“잘됐네.”
나는 목소리에 영 기운이 없는 천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천호는 조금 가벼워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차라리 숨겨 주지 말아야 했을까요.”
“글쎄.”
아까 들은 얘기로는, 부원군의 어처구니없는 행각을 김선익 대감이 묻어 준 것이 도리어 소인배의 약점을 쥐게 된 셈이라 제거당했단 거였다.
둘이 별로 친했던 것 같지는 않으니 김선익 대감은 아마 당시의 세자, 즉 지금의 주상 전하를 생각해서 묻어 주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세자빈 가문에 빚을 만들어 달아 두고 싶었을 수도 있고.
물론 지금의 세자와 세화, 아니 지화를 세자빈으로 맞으려고 할 만큼 신뢰했던 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게다가 지화와 수천의 아버지면 김선익 대감도 당시에 꽤 젊었을 테니 뭐 나서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
“당시의 일까지는 지금의 우리야 알 수 없지.”
그래도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영문조차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은 해도 차마 말로는 꺼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천호도 나 따라다니는 건 이제 끝이겠네.”
“네? 왜요?”
“이제 신원 회복하면 양반가 도련님이잖아? 나 따라다닐 때가 아니지?”
“……그냥 계속 옹주 자가 곁에 있으면 아니 됩니까.”
설령 네가 그러고 싶다고 해도 네 누님이 가만두지 않으실 거 같은데.
“안 되지. 게다가 새로 들어올 사람도 있고.”
“제 자리에요? 누굴요?”
묘하게 절박한 목소리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해서 나는 빨리 안심시켜 주었다.
“성 겸사복 이제 할 일 끝나면 은퇴하고 평생직장으로 옮기지 않을까.”
“아.”
굳어 있던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보고 킥킥 웃으며 천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리 뺏길까 봐 경계했어?”
“아,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천호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천호가 입을 열기 전에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했다.
“크흠!”
“아, 오라버니. 왜 나왔어?”
어느샌가 나를 따라 나온 성원 세자였다.
‘어쩌면 우리 대화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몸을 일으키며 천호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정작 성원 세자는 다른 쪽이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따라 나왔는데…… 그, 두 사람이 혹시……?”
우리가 너무 친밀해 보였던 것은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일단 부정했다.
“음……. 그런 건 아니고.”
“…….”
“그, 그렇지? 저 청년이 네가 아직 요만했을 때 안고 다니는 것도 봤는데.”
성원 세자는 어쩐지 불순한 생물을 보는 눈으로 천호를 보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오해 하나는 바로잡기로 했다.
“어어. 오라버니 오해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요. 천호가 저보다 어립니다?”
“뭣……?”
“…….”
뭘 그렇게 못 들을 말 들었다는 얼굴이야.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천호는 묘하게 씁쓸한 얼굴로 침묵했다.
이 이상 대화는 무리일 것 같아 나는 천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천호는 이제 들어가서 좀 쉬어. 어제도 고생이 많았는데 오늘도 나 따라다니느라 정신없었으니.”
“예. 옹주 자가.”
천호는 나와 성원 세자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어제 쉬라고 방 하나 내주었으니 오늘도 거기서 쉬면 될 터였다.
천호가 물러나는 동안 뭔가 석연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성원 세자는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물었다.
“어제는 또 무슨 일을 했던 것이냐?”
“어제? 어제 오라버니 데리고 올 때 고생했잖아.”
혹시나 했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 줬나 보다. 성원 세자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어제라고?? 아, 혹시 새벽이라고 어제라고 하는 건…….”
“아니야. 오라버니가 좀 오래 잤을 뿐이지. 도중에 깨지 않도록 약을 좀 세게 쓰긴 했는데 이상하게 너무 오래 자서 다들 걱정했어.”
“일부러 약을 세게 쓴 것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원 세자를 다시 방으로 인도했다.
허우대만 멀쩡하지, 인간이 영 부실해 보이는 것이 추운 곳에 오래 두기가 걱정스러웠다.
“음. 깨어나자마자 막으러 가겠다고 할까 봐. 그런데 잘 자더라. 혹시 그동안 잠 못 잤어?”
“…….”
내 말에 성원 세자는 침묵했다. 묵비권도 없는 시대였지만 나는 저 침묵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하긴, 잠이 잘 왔을 리가 있겠는가.
“잠 안 자면 몸 상해.”
“……괜찮다. 전에도, 궁에 있는 동안은 잠을 못 자는 날도 많았으니 이 정도야.”
애써 웃는 게 도리어 애처로워 보일 뿐이었다.
‘많이 힘들었구나.’
내 눈빛이 애잔해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중얼거림은 이어졌다.
“정작 동생에게 그 자리를 떠넘기고 떠나니 그건 그것대로 잠이 안 오기도 했고.”
세자 자리가 아까워서 잠이 안 왔다는 건 아닐 거다.
‘시기적으로 보면 혹시 나 독 먹은 거 때문인가.’
어린 막냇동생이 독 먹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잠이 안 올만도 했다.
“참, 나한테 할 말 있다는 건 그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본 것이 있어서, 너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나왔다.”
그렇게 말한 성원 세자는 주변에 누가 있지는 않은지 두리번거리며 확인한 후 나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영선이?”
“그래. 그 어미라는 이와 그런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다.”
“아…….”
세자의 말을 들으니 짚이는 것이 있던지라 나는 작게 탄식했다.
“영선이라면 괜찮아. 내가 허락한 바도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