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19)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19)화(319/326)
“그 아비가 뻔뻔스럽게 또 잘도 나타났구나.”
“?”
사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지난번에 부원군이 나한테 했던 말도 그렇고.
영선의 아버지는 부원군과 함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썩 대단한 인물도 아닌 것 같아 크게 신경 쓰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번에 부원군이 붙잡히며 함께 의금부로 잡혀가지 않았을까 했는데 용케 도망친 모양이었다.
‘나 참, 도망치는 재주는 제법 뛰어난가 보네.’
애초에 이렇게 돌아다녀서는 안 되는 인물인데.
하긴 그러니까 더 필사적으로 도망친 걸지도 몰랐다. 이번에 붙잡혀서 정체가 밝혀지면 노역형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긴, 붙잡혔으면 내가 데리고 있는 영선과 그 모친에게까지 불똥이 튀었을 수도 있으니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할지.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의 성원 세자에게 적당히 설명을 해 줬다.
“영선이는 10년 전 역모 사건 때 노비가 된 사람들 중 하나야. 당시에 아바마마께서 반가의 여인들은 거의 나한테 노비로 내리셨거든. 그러니까 영선이의 아버지라면 역도(逆徒)지.”
“역도가 그렇게 돌아다닌다고?”
내 예상이 맞다면 부원군이 성원 세자에게는 숨겼던 모양인데.
“어떻게 도망쳤을지 자세한 것까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한테 접근하려고 영선이를 이용했거든.”
자세한 설명은 영선이의 명예를 위해 생략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생판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때 좀…… 일이 있기도 했고 부모 때문에 속을 썩고 있었지.”
“그래서 뭘…… 허락하였는데?”
“언제까지고 부모 때문에 속을 썩는 것보다는 부모에게 선택하게 해 주라고 했거든. 오라버니 말을 들으니 어느 쪽이든 결심이 선 거겠지.”
“너는 도망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는 없지. 하지만 내가 영선이라면 안 갈 거야.”
성원 세자는 내 말이 뜻밖인 듯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부모님과 함께 도망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 어찌 부모를 버릴 수 있겠어.”
“오라버니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래.”
“…….”
가족을 버리고 탈주하신 분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잖아. 버리는 게 아니라, 부모가 선택하게 한다고.”
“?”
“오라버니가 영선이의 부모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데리고 있는 노비들을 거칠게 부리지 않아. 그중에서도 영선은 능력을 인정받아 여기서 골동품을 관리하는 일을 전담하고 있고, 급여도 따로 주고 있거든.”
“그래?”
“응. 사실 노비로 지낸다 해도 이 안에서만 보면 어지간한 양인들보다 처지가 나을 수도 있어. 하지만 물론 본인이 나가길 원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여기를 떠난다 하여도 도망 노비 신세로 사는 것이 아니냐.”
“영선이 노비 아냐.”
“뭐?”
“예전에 노비문서 불태웠어. 이제 속량(贖良)한 양인이라고.”
“그럼…… 떠나도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 괜찮아. 하지만 떠나고 싶지 않은데 도망친 대역죄인인 아버지를 봉양해야 해? 심지어 그 부모는 영선이 이제 노비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도망치자고 해. 그게 부모가 할 짓이야?”
“그…….”
“영선이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대역죄인인 아버지 때문에 노비가 되었지. 나한테 오지 않았으면 어느 양반집에서 비첩(婢妾:노비 출신 첩. 신분이 천해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뭐 역적의 자식이니 노비가 된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고 쳐. 그런데 그 아버지는 노비가 된 딸을 찾아서 이용할 생각만 했지.”
그것도 새로운 역적질에.
사실 부모가 옆에서 집요하게 부추기지 않았다면, 영선이 그 남자와 급하게 혼인하는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이 이상 아버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해? 반성은커녕 딸 이용할 생각만 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금 영선이 나가면, 그 부모를 누가 봉양하겠어? 당연히 영선이의 몫이잖아.”
영선은 지금 우리 집에서 내 컬렉션들을 관리하며 고급 관리직으로 나름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집안에서 일하는 이들 역시 아무도 영선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런 영선이지만 밖으로 나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도망친 역적을 낀 가족이다. 의식주 정도가 아니라 떳떳하지 못한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될 것인가.
‘심지어 영선이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한데 육체적인 고생은 많이 안 했어.’
고급 인력으로 썼다고.
하지만 아무리 고급 인력이어도 써 주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다.
‘예쁘기도 하고 귀태가 나서 이상한 놈들한테 잘못 걸려서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그 부모가 딸을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적어도 딸을 생각했다면 지금 같은 때에 같이 가자는 말은 쉬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꼭 희생이겠느냐.”
“하고 싶지 않은 위험한 일을 강제로 해야 하면 희생이지……? 단순한 부모 봉양 문제가 아니잖아.”
“……희생인가?”
“응.”
이 사람은 또 왜 저러지. 어디서 사기라도 당했나.
단호하게 대답하자 성원 세자는 어딘지 허무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왜 그래?”
“아니다. 시아는 언제나 명쾌해서 좋구나.”
세자는 뭔가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시아한테 호되게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는 않아서.”
“아.”
잊고 있었던 사실을 성원 세자가 깨우쳐 주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시, 시아야?”
김선익 대감 얘기하느라 바빠해서 그만 잊고 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인간은 주변 사람들 마음은 생각도 안 하고 반역을 도모한 흉악한 놈과 동반 자살을 기획했던 인물이었다.
“그러게, 우리 대화가 필요했는데 내가 잊고 있었네?”
“시, 시아야.”
“걱정 마. 우리는 지성인이니 대화로 해결하자.”
“???”
물론 이미 해결은 났지만. 잔소리는 질릴 정도로 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성원 세자는 실실 웃으면서 내 잔소리를 들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늘 너에게 이런 식으로 혼나고 계신 것이니?”
“가끔?”
말 안 듣고 과로할 때라든가.
“세자 안 해서 다행이다, 정말…….”
“지금 그걸 말이라고!”
철썩! 철썩! 철썩!
방 안이라고 옷이 비교적 얇아진 덕분인지 차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아프다…….”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멍하게 중얼거리는 게 처량 맞아 보여 좀 걱정스러웠다.
“어, 좀 세게 때렸나. 많이 아파?”
“아니. 누구한테 이렇게 맞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구나 싶어서.”
안 그래도 아까부터 실실 웃고 있더니 이젠 또 뭐가 생각났는지 나사 빠진 듯이 웃었다.
“저기, 시아야.”
“왜?”
“혹시 오라비가 껴안으면 또 화를 낼까?”
“내가 언제 화를 냈……었구나.”
지난번에 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얘기였다.
“또 사고 친 거나 사고 칠 거 있어?”
“어, 없습니다.”
“없으면 괜찮아.”
“와.”
성원 세자는 조금 과장된 목소리로 웃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야 내가 아는 첫째 오라비가 돌아온 것 같았다.
“미안하구나. 걱정 끼쳐서.”
“또 이상한 짓 하면 붙잡아다 묶어서 방 안에 가둬 둘 거야.”
“으음……. 그건 좀 참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이후로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평범하게 오랜만에 해후한 가족 같은 대화를 나눴다.
성원 세자는 식사를 가져온 영선을 보곤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영선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어서 대조적이었다.
‘아마 영선이는 오늘 밤 떠나지 않겠지.’
영선이와 그 어미의 대화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영선이 어찌 행동할지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건 그 부모 쪽이지.
나는 식사를 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세화는 괜찮으려나.’
아쉽게도, 세화를 위로해 줄 사람은 너무 바빠서 지금 여기에 없었다.
다음 날, 영선이 보고할 것이 있다며 찾아와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간밤에 소인의 어머니께서 사라졌습니다.”
“……그래.”
함께 지내고 있으니 영선이 보고하는 것이 맞았지만, 보고를 듣는 나도 썩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밤새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영선이의 안색은 영 좋지 않았다.
아마도 밤새 부모가 사실 떠나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을까 고민했겠지.
그리고 나는 그 답을 알 수밖에 없었다.
“조금 쉬는 게 어때?”
내 말에 영선은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겠습니다. 그 편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해.”
최근에도 시영원을 통해 크고 작은 유물들이 들어오고 있기도 했고, 고서적의 경우에는 필사를 해서 따로따로 보관을 하는데, 필사까지야 시영원 아이들에게 맡기더라도 오탈자가 있는 것을 최종 확인하는 것은 영선의 일이었다.
덕분에 아직도 정리해야 할 것들이 제법 많았기에 영선이 일을 하려 한다면 일은 끝도 없었다.
어두운 얼굴을 한 영선을 보내고 다른 하인들을 불러 영선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적당히 소문을 내도록 지시했다.
평소에도 본의 아니게 영선 모녀가 다투는 목소리를 들어 사정을 조금 짐작하고 있는 이들도 내 말에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송구하오나 어찌 그런 지시를 내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영선이 그 어미 때문에 고생한 것은 소인들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설마 딸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영선의 어미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다들 기가 막힌 듯했다.
“그런 소문을 내면 영선의 부모는 영선이 함께 도망갈 자금을 얻기 위해 내 물건에 손을 대어 잡혔다고 생각할 테니까.”
“영선의 부모가 영선이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옵니까?”
“아니, 그들이 부모 자격이 있다면 그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올 테니까.”
“아. 영선이를 걱정해서 돌아오겠군요.”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대고 도주까지 시도한 노비가 어찌 되는지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 반죽음 상태의 딸을 버리고 도망가는 부모가 있으랴.
‘그런데, 돌아오지 않을 것 같네…….’
애초에 그럴 사람들이면 벌써 영선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왔을 것이다.
지금 이 집은 경계가 삼엄하니 내 허락 없이 쉬이 누군가 드나들 수 없지만, 영선의 어미는 마음만 먹었다면 하루 밖에서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둘러대서라도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돌아오면 영선의 죄를 함께 받아야 하겠지만.’
그걸 알고 있으니 돌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성원 세자도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어. 지금 거기 피비린내 날걸.”
잡아야 할 놈들은 다 잡아들였기에 지금 심문하느라 바쁠 거다.
덕분에 내가 처음으로 사가에서 묵고 가게 되었지 않은가.
‘어제 성원 세자에게 들은 일은 내가 서신으로 써서 천호와 세화에게 들려 보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