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2)화(32/326)
“따라와. 영원 대군에게 갈 것이다.”
“예? 이 시간에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허둥지둥 외출 준비를 한 송비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아무리 형제간이라 해도 늦은 시간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것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당황했던 나인들도 곧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큰 오라버니를 잃고, 생모를 잃은 아이가 이제 둘밖에 안 남은 혈육을 찾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한 명이 자식의 장례 중에도 바쁜 왕이라면 더더욱.
나는 거의 뛰듯이 영원 대군의 처소로 향하며 가이와 송비에게 당부했다.
“내가 혹 누군가를 붙잡으라 하면 그자를 붙잡아서 중궁전에 맡기도록 해.”
“예?”
영문을 몰라도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그럭저럭 잘 들어주는 사람이 이 두 사람이었다.
“알았지? 놓치면 안 돼. 그리고 붙잡으면 절대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도 안 돼. 소란을 피워도 괜찮아. 아니, 소란을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다른 곳이 아니라 반드시 바로 중궁전으로 데려가서 대군 처소에서 수상한 짓을 하던 자들이라고 고해. 내 명령이야. 다른 누가 막아도 절대로 들어선 안 돼. 알았지?”
“아기씨,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전마마께 내가 시킨 일이라 말씀드리면 그 후는 마마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내가 시킨 일이라고 갑자기 사람을 끌고 가면 중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거다.
언제나 말없이 뒤에 조용히 앉아 있지만 우둔한 사람이 아니니까.
어느새 가까워진 대군의 처소는 예상대로 제법 경계가 삼엄했다.
그리고 그 삼엄한 경계 사이에서 나온 대군 처소의 나인 곁으로, 나인 하나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저들끼리 뭔가 소곤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놀라 고개를 숙이는 그들을 본 순간 이 둘이 실행범이란 걸 확신했지만 마지막으로 확인차 물었다.
“너희들은 이 시각에 어딜 가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아기씨. 대군 대감께 야참을 올리고 잠시 바람을 쐬러 가던 참이옵니다.”
한 명은 분명 영원 대군 처소의 나인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아니었다. 내가 그들의 얼굴까지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그들은 여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원작의 남주도 형의 죽음에 낙심해 궁녀가 가져온 간식을 먹지 않았지.’
그러니 그 간식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먹기는 싫지만 주변이 걱정할 것을 염려한 영원 대군이 처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에게 제 몫의 음식을 내어 준 덕이었다.
모처럼의 따뜻한 음식을 맛있게 먹던 고양이는 잠시 후 쓰러졌고, 놀라서 음식을 토해 내게 한 세자가 의원을 불러 내용물을 확인한 결과 독이 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뒤늦게 배후를 찾으려 했으나 음식을 가져왔던 나인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고.
지금 저 나인들은 내 덕분에 잠시 수명이 연장된 셈이었다. 물론 그게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붙잡아.”
“예.”
내가 이른 대로 내 가이와 송비를 위시한 궁인들이 그들을 붙잡았다.
“무, 무슨 일이시옵니까.”
“소인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리하시옵니까.”
겁에 질려 몸부림치는 이들을 궁녀들 여럿이 붙어 애써 붙잡았다.
“나는 대군에게 가 보아야겠으니 내가 아까 이른 대로 해야 한다.”
“예, 아기씨.”
그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나는 바로 대군 처소로 향했다.
지켜서고 있던 이들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선선히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내가 영원 대군 처소에 들어가는 것을 본 내 궁녀들도 안심하고 중궁전으로 향할 것이다.
안에 들어서니 익숙한 얼굴들이 당황한 듯 내게 고개를 숙였다.
“왕녀 아기씨?”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시느냐.”
내 행동이 무례하다는 건 나도 알고 그들도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다들 내가 영원 대군을 만나러 온 것을 차마 막지 못했다.
“바로 대군 대감께 고하겠사옵니다.”
“괜찮다.”
연통도 없이 왔으니 그래야 맞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궁녀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이 시간이면 제 방에 있겠거니 싶어 궁녀들도 뿌리치고 불이 밝혀져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문득 예전, 손에 떡을 하나씩 들고 혼자 방에 처박혀 있던 경원군을 만나러 갔을 때가 생각났다.
“대군 대감. 왕녀 아기씨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아가?”
마침 궁녀가 영원 대군에게 나의 방문을 알리고 있었다.
“어서 안으로 들이거라.”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괜찮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영원 대군에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몸이 왜 이리 찬 게냐. 옷도 이리 얇게 입고. 네 궁인들은 너를 이리 입혀 내보냈단 말이냐.”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영원 대군은 걱정스레 내 손부터 붙잡고 안으로 잡아끌었다.
아기 고양이들과 함께 있었는지 털 뭉치들을 붙잡아 내 품에 안겨주는 모습을 보며, 영원 대군의 뺨을 확인했다.
“살아 있네.”
“그럼, 살아 있지.”
저한테 독을 먹이려는 놈이 있는 것도 모르고, 태평한 얼굴이었다.
“나는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응.”
안도해 털썩 주저앉았으나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아?”
“괜찮지, 그럼.”
품으로 파고드는 아기 고양이들을 빤히 내려다보며 꺼낸 말에 영원 대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되어 있던 이부자리에 고양이들과 날 함께 곱게 넣어 주었다.
“안 자?”
“잠이 안 와서 책이나 읽을까 하고.”
“눈 나빠진다.”
“하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따스한 분위기 때문일까 굳어 있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곶감?”
“응? 아아, 아까 야참이라며 가져왔는데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아서…….”
영원 대군이 간식을 잘 안 챙겨 먹는 성격이라 참 다행이었다.
‘저거구나.’
왜 조선 시대 독살 하면 저렇게 곶감이 자주 얽히는지. 기미를 한다고 일일이 한입씩 먹어 볼 수도 없어서 더 그런가.
문득 아까 그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령 실패해서 경원군 그놈이 죽지 않더라도, 이제 평생 독살의 공포에 시달리게 될 거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소설과는 다르다.
내가 증인들을 붙잡아 중궁전으로 보냈으니까. 하지만…….
‘이게 걸린다고 왕자군을 죽이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유폐에서 겨우 풀려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찌 될까.
왕자군 직첩을 박탈하고 폐서인으로 만드는 정도는 가능할까?
사형은 어렵더라도, 적어도 그 죗값으로 괴롭게 살아가길 원했다.
그렇잖아?
사람을 죽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너 같은 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죽게 놔둘 수는 없잖아.
너희들이 우리 언니를 죽인 것처럼.
“……나 이거 하나 먹어도 돼?”
“그래.”
원작에서는 이 독살 시도가 그대로 묻혀 버린다.
영원 대군이 우연히 독을 먹지 않아 무사했고, 경언군이 말한 대로 실행자인 궁녀들이 죽어 버린 데다 세자의 상중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감추려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 대군을 해치려는 시도는 조용히 계속될 거다.
궁중에선 영원 대군의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돌며 정신 착란이 아니냐는 수군거림까지 이어져 남주의 인간 불신은 극에 달하겠지.
하지만 이걸 먹고 만약 내가 쓰러진다면 어떻게 될까.
곶감 안에 독이 들었다는 걸 알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양이는 단번에 죽는 독이라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아.’
심지어 소설에서 그 고양이는 안 죽었다. 물론 똑같은 독을 썼으리란 법은 없지만.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인데도, 역시 죽는 건 무서웠다.
무서워서일까. 애써 입에 밀어 넣고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는데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말고 다른 곶감에 넣었나?’
아무 반응이 없는데, 이대로 놔뒀다 영원 대군이 먹으면 어쩌나 싶어 다른 하나를 더 집으며 영원 대군의 상태를 살폈다.
“공부하고 있었어?”
“……가만히 있으면 좋지 않은 생각만 나니까.”
“……이거 하나 더 먹어도 돼?”
“응.”
공부하던 책은 정리하고 있던 영원 대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영원 대군과는 아무래도 보통 남매와는 조금 달랐다.
물질이 부족하지 않으니 먹을 걸로 다퉈 본 적도 없었고, 잔소리가 많고 툴툴대기는 해도 늘 나를 챙겨 주려 했다.
본인이 오빠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타고난 성품일까.
‘그러고 보니 결국 한 번도 오빠라고 불러 준 적은 없었네.’
왕실 어른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오라버니라고 지칭했지만 본인에게 그렇게 불러 준 적은 없었다.
하긴 오빠라기보다는 동생 같은 느낌이 더 강했으니까.
세자한테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왜였을까.
“이거 하나 더 먹을게.”
“그래.”
본인도 나름대로 섭섭해하는 눈치여서 조금 더 크면 불러 줘야지 했는데.
‘아, 입에 비린 맛이 나네.’
피 맛이다. 깨문 것도 아니고, 목구멍에서 올라온 피였다.
웃기네, 나 지금 아픈 것도 못 느낀 건가?
그런데 장난쳐??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독약 먹었다고 이렇게 바로 피를 토하다니?
그 미친놈은 대체 무슨 독을 넣은 거야.
애초에 독살이 이렇게 티가 나면 어떡하냐. 경언군 이 멍청한 놈.
아, 하긴 뒤집어씌울 사람까지 만들어 놨으니 상관없었겠구나.
그런데 어쩌냐, 대군이 아니라 내가 먹어서?
아무리 힘없는 왕녀라도, 친여동생을 해친 놈을 계속 왕자 자리에 두진 않겠지.
‘이렇게 된 거, 내가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너는 재기 못 하게 조지고 간다.’
왜 아픈 걸 못 느꼈는지 깨달았다. 가슴이, 배가, 전신이 뜨거웠다.
정신이 흐려지는데도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쿨럭.
“……시아야?”
나를 돌아보는 영원 대군의 얼굴이 창백했다.
“시아, 시아야?!”
아, 어린애한테 보여 줄 장면이 아닌데 어쩌냐.
이렇게 유혈사태가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누구, 누구 없느냐!! 어서 의원을 데려와라!!”
“오빠…….”
“그래, 네 오라비다. 정신 차려라!!”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오빠라고 불러 줄게.
이제 네 목숨을 위협하는 놈도 없을 거야. 다행이다.
“……기왕이면…… 성군 돼라…….”
“……뭐?”
잘해 봐. 너는 남주니까 안 죽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여주랑 만나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네.
‘모르겠다. 이대로 그만 편해져도 괜찮을 거 같다.’
모르겠다. 이게 복수심인 건지, 아니면 지쳐 버린 건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시아야! 시아야!!”
다음에는 그냥 좀 평범하게 환생하고 싶다.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줘?
아, 언니 보고 싶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