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2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20)화(320/326)
“일이 빠르게 끝나서 다행이지만 정리할 일들이 만만치가 않군.”
세자는 역당들 때문에 산처럼 쌓인 일거리들을 보며 눈가를 눌렀다.
아무리 대리청정 중이라고는 하지만 국문(鞠問)을 굳이 세자 자신이 꼭 직접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성원 세자가 엮인 일이니만큼, 그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세자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가능한 한 진실을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하니까.
‘눈 가리고 아옹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사실 역당들 중에서도 성원 세자의 존재에 대해 확실히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로 역모를 주도한 핵심 인물들이 그 존재를 알고, 책임을 성원 세자에게 돌리곤 했다.
세자가 직접 나서야 하는 건 그런 때였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원 세자가 살아 있다고 헛소리를 하지.’
그리고 가볍게 겁을 좀 주고 나면 갑자기 정신이 들어서 ‘제가 본 그분이 성원 세자 저하……를 닮았지만 다른 사람인 게 틀림없습니다!’라며 올바른 대답을 해 주곤 했다.
그들도 머리가 있으니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성원 세자를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는 자들이 가장 빨리 협력적으로 돌변했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는 이들도 대부분 괜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말을 바꿨다.
세자는 딱히 사람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괴악한 취향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겉으로는 냉정한 척했으나 내심 안도했다.
물론 잘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경우 안타깝게도 세자가 친히 일대일로 면담에 들어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걸 들어야 했으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종일 그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신이 피폐해지기도 하고.’
그렇게 고단해진 심신을 치료하기 위해 가끔씩 키우는 고양이들을 붙잡고 동물 치유법(피곤할 때 좋다고 시아가 명명했다.)으로 마음을 정화하고 있었다.
물론 당하는 고양이들이 가만히 있어 주는지는 다른 문제였고.
‘시아가 데리고 있는 꼬마는 시아가 별짓을 다 해도 가만히 있던데.’
애초에 몇 번이나 봤다고 시아를 찾아 가출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그 아이가 좀 별종인 것이 틀림없었다.
미야앙-
“그래그래. 귀찮게 하지 않으마.”
좀 얌전히 있는다 했더니 그새 질렸는지 스르륵 빠져나가는 배은망덕한 털 뭉치들을 보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 숨통이 트이긴 했다.
어제저녁에 세화가 들고 온 시아의 서신에 적혀 있던 뜬금없는 사실 덕분에 파평부원군과 또다시 일대일 면담을 한 게 솔직히 너무 피곤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서신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일에 대해 떠보자 부원군은 또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말하자면 ‘다 세자 저하를, 주상 전하를 위한 일이었다.’라는 게 부원군의 주장이었다.
당시 세자빈이었던 성현 왕후는 아이를 갖지 못했기에 후궁을 들이라는 주변의 압박이 강했지만, 세자는 아직 세자빈이 젊으니 기다려 보자며 버텼다고 했다.
신허도의 난은 그럴 때 일어났다.
홍상조와 파평부원군은 일부러 뒤에서 그가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겨 정적들을 제거하고 정작 본인들이 세자의 곁을 지켜 신뢰를 얻은 후, 후궁에 세자빈을 도울 수 있을 만한 자신들 세력의 여인을 들이도록 했다.
그게 바로 결국 폐서인이 되어 사망한 영빈이었다.
‘아이도 없는 세자빈이 혹여나 다른 후궁들에게 치일 것을 걱정하여 한 일이었다고.’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 준 이들이 들여보낸 여인이었으므로, 후궁을 탐탁지 않아 했던 당시의 세자도 홍상조의 의붓딸을 차갑게 대하지는 못했으니까.
어쨌든 파평부원군의 말에 대한 세자의 감상은 그냥 이랬다.
‘뭐라는 거야.’
성원 세자와 성현 왕후를 위한 일이었다니, 그냥 개소리로밖에 안 들렸으니까.
‘결국 자기들 권력을 위해 한 일이라는 뜻이잖아.’
어린 시절 그 아들에게 치이며 살았던 입장에서는 치가 떨리는 소리였다.
좌상 홍상조가 망하게 된 원인이 그렇게 밀어 넣은 영빈이 낳은 경언군이었으니 아마 억울하진 않았으리라.
‘그래도 나보다 세화가 충격이 컸을 테니까.’
몸이 좋지 않으니 진맥과 탕약을 좀 부탁하고 싶다는 이유로 세화를 붙잡아 달래 주었던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니, 조금 분노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시아가 그 서신을 왜 세화한테 들려 보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
거기까지 생각하던 세자는 잠시 사고(思考)를 멈췄다.
‘시아가, 아직 모르지 않나? 혹시 뭔가 눈치챈 건가?’
분명 친동생이지만 가끔씩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동생이라면 뭔가 눈치채고도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했을 법도 했다.
“저하. 옹주 자가 드셨사옵니다.”
“어? 아, 들라 하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떠올리기가 무섭게 본인이 나타났다.
사가에 감금, 아니, 보호해 둔 형님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온다고 어젯밤에 출궁한 시아는 의외로 빨리 궁으로 돌아왔다.
‘이런 시기에 굳이 궁 안에 두고 싶지 않아서 아바마마 허락도 받아 사가로 보냈건만.’
자신이야 세자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시아에게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험한 꼴이야 어릴 적에 본 걸로 충분한 아이가 아닌가.
이런 아버지와 오라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아는 세자를 보며 근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오라버니, 간밤에 눈은 좀 붙였어?”
“그럭저럭.”
“눈 밑이 퀭한데.”
시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았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가져왔으니 먹어. 상 차려 놓고 먹을 생각이 안 든다고 잘 안 먹는다며.”
평소 자주 먹는 고기완자와 채소를 넣은 빵에, 달달한 것들까지 고루 있는 것을 보니 끼니를 거르고 있다는 말이 벌써 귀에 들어간 듯했다.
‘그만 유출하라고.’
자신이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옹주가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에 세자는 문 상궁을 원망해 보았지만, 문 상궁에게 그런 말을 해 보았자 ‘소인이 말씀드릴 때 들어주셨으면 어찌 옹주 자가께 부탁을 드렸겠사옵니까. 그러니까 어서 빨리 세자빈…….’으로 시작되는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 뻔했다.
‘세자빈을 들이면 자신은 손을 떼겠다고 하는 것이 어찌나 얄미운지…….’
하긴, 시아도 비슷한 소리를 할 거 같은 게 묘하게 서운했다.
“어휴.”
“한숨 쉬면 빨리 늙는답니다. 따뜻할 때 드시고 좀 쉬시지요.”
먹는 모습을 지켜봐야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고양이들 주무를 때와는 또 다른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 고맙구나.”
바쁠 때 일하면서 간단하게 먹기에는 아무래도 이쪽이 편했다.
“밥버거라도 만들어 볼까…….”
“뭐라고?”
뭐라 중얼거리기에 되물어 보았지만 시아는 답을 얼버무렸다.
“아니, 역시 밥이 좀 무겁나 하고. 그런데 오라버니,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지난번에 영천군 일도 있어서 다들 역당 처리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더구나.”
“아, 다들 한번 해 봐서 좀 익숙해졌구나.”
“좋아할 일은 아니다만…….”
게다가 어찌하다 보니 지난번이랑 이번이랑 겹치는 인물이 많아서, 지난번에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지난번에 영천군을 부추긴 것도 파평부원군이었더구나. 물론 그렇다고 영천군이 한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 부지런한 분이셨네.”
“다들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도리어 혐의가 옅었던 거지. 영천군이 단순하기도 했고.”
이번 일의 주모자이기도 하니 부원군은 극형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부원군이다 보니 성원 세자를 생각해서라도 참형(斬刑: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만은 피하도록 해 볼 생각이다.”
“고생이 많아. 성원 세자 일은 어때?”
“반역도 실패하고, 아바마마께서도 형님에 대해서는 묻어 버리기로 하셨으니, 성가시지만 일이 어렵지는 않을 거다.”
“다행이네.”
시아가 먹기 좋게 작게 잘라 온 음식들을 하나씩 먹던 세자는 어느 순간 눈앞에 있던 음식들이 반 이상 사라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배가 고팠구나.’
역시 문 상궁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형님……은 어떠시냐. 깨어나셨어?”
작은 목소리로 묻자 시아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화 말대로 그동안 고생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랬던 거 같아. 좀 오래 잔 거 같지만 오히려 쌩쌩해져서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자더라. 연선오한테 들으니 근래에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못 잤다니 그럴 만도 하지.”
“형님은 마음이 고생이었고, 나는 몸이 고생이군.”
하지만 이 압박감도 피로도 자신의 몫이니.
어찌하겠는가. 이제 조선의 국본은 하나뿐인 것을.
“큰오라버니는 이제 마음고생도 안 해도 될 텐데.”
“그래도 외숙의 일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으시겠지.”
“그렇게 혈육에게 마음이 약하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 아냐.”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단순히 내 끼니를 챙기러 온 건 아닐 테고. 뭐 또 확인할 게 있더냐?”
“어제 세화 통해서 서신을 보냈잖아. 그 일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거라면 마찬가지로 묻어 둘 생각이다.”
“그래. 그럼 됐어.”
시아는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예상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일이 알려져 봐야 아바마마께 좋을 것이 없지. 김선익 대감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고.’
아바마마께도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이미 이번 일만으로도 심적으로 힘들 것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세자는 아바마마를 떠올리니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그런데 너는 대체 아바마마와 무슨 대화를 했던 것이냐?”
“뭐 이것저것.”
“그게 뭔데.”
“아무리 듣는 사람 없어도 여기서 할 얘기는 좀 아니라서.”
“…….”
이 겁 없는 동생이 대체 무슨 소리를 했을지, 세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시아는 세자가 어느새 가져왔던 음식들을 깨끗하게 먹어 치운 것을 확인하고 흐뭇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일 좀 마무리되면 잠깐 머리 식히러 나와.”
“그래.”
나는 세자의 야식을 먹기 쉬운 거로 만들어 놓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다시 궁궐을 빠져나왔다.
‘부왕을 좀 뵙고 가면 좋겠지만 지금 방문 허락받기도 그렇고.’
세자도 부왕도 내가 지금 궁궐에 있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유도 대충 알 거 같으니 굳이 반항할 생각도 없었고.
‘아바마마와 무슨 대화를 했냐, 라.’
내가 지금 같은 때에 부왕에게 가서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성원 세자에 대해 알고 있었냐는 것 정도지.
‘엄청 비난하고 엄청 혼나고 싸우고 나온 거 같은 기분인데 그렇지도 않나.’
나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