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2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22)화(322/326)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천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옹주 자가? 어찌 그리 보십니까?”
“아니, 천호도 이제 슬슬 독립하겠구나 하고.”
뭐가 불만인지 천호는 또 불퉁한 표정을 했다.
“안 한다니까요. 저는 계속 옹주 자가 곁에 있을 겁니다.”
“으음. 그게 좋은 거라고는 못 하겠는데.”
“싫으십니까?”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천호를 보며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키가 커서 좀 힘들구먼.’
천호가 불퉁한 얼굴로 쓰다듬기 좋기 슬쩍 머리를 기울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지만, 이렇게까지 클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어린애구나.”
곧 누명을 썼던 김선익 대감의 신원이 회복될 거다.
그럼 천호의 숙부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천호가 싫다고 해도 신분이 밝혀지겠지.
“……그러고 보니 천호. 숙부는 만났니?”
함께 떠났던 성 겸사복이 먼저 왔다지만 천호의 숙부도 뒤이어서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마주친 적은 없으니 나와 거의 내내 동행하고 있는 천호가 마주쳤을 가능성 역시 크지 않았다.
“옹주 자가 곁을 떠날 수 없어서 멀쩡하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저런. 가서 얼굴 좀 보고 와.”
“이번 일이 끝나면요. 숙부야 사지 멀쩡하고 누가 노릴 일도 없고 괴물같이 튼튼하니까 괜찮습니다.”
어떤 의미로든 양육자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갖고 있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그래도 이 반응은 좀 그렇지 않나.
“애 키운 공은 없다더니…….”
“예?”
뭐, 성장 과정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아니다. 저 둘은 계속 저러고 있을 모양이니 슬슬 차가 아니라 주안상이라도 내오라고 해야지.”
얼마 전에 성원 세자가 이제 다 자란 세자와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말을 했으니 오늘이 가장 적절한 날이었다.
내 사저라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역시 내가 직접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오랜만에 만난 사이좋은 형제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조용히 자리를 떴다.
‘세화와 천호는 아직도 얘기를 안 했나 본데 대체 언제쯤 알게 될는지.’
둘 다 지금 알게 되면 마음이 좀 놓일 텐데.
하긴, 곧 밝혀지면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 급할 것도 없나.
나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하고 다른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이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덕분에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할 일이 많아진 하인들이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래도 궁에서 나올 때 송비와 나인들을 데려와서 음식 대접 쪽은 걱정이 없고, 그 외의 것들은 영선이 의외로 잘 컨트롤하고 있어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조금 성가셨던 건 성원 세자를 모시고 있는 전직 익위사들과 체탐인들이 묘하게 서로 견제하고 있던 거 정도일까.
역모에 대해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보니 저쪽이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길래, 나는 자꾸 싸우면 감란전병을 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했다.
성원 세자한테.
‘자꾸 이러면 자네들은 물론 오라버니께도 주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게.’
‘그럴 수가, 먹는 걸로 이러시는 건 너무하시지 않사옵니까. 그분께서 얼마나 그리워하셨는데요…….’
게다가 성원 세자의 세자 시절을 함께했던 전직 익위사들은 감란전병의 맛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성원 세자 사후 출궁한 이후로는 먹어 보지 못했고.
‘그러니까 싸우지 말라고, 싸울 거면 딴 데 가서 싸워. 감히 내 집에서 싸울 생각일랑 하지도 말고.’
‘예에……. 알겠습니다. 옹주 자가.’
입맛을 다시는 이들에게 그리 당부하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바보 같아졌는지 다들 좀 얌전해졌다.
체탐인들도 내가 가끔 감란전병을 나눠 주곤 했기 때문인지 괜히 같이 조용해졌다.
애초에 이쪽은 내 말을 잘 듣기도 했고.
게다가 시영원이든 시월각이든 내 정체(?)를 아는 애들이 걱정된다고 몰려들어 와서…….
걱정된다고 온 사람들을 또 매정하게 쫓아낼 수도 없고, 밥 좀 먹이고 쉬다 가라고 했더니 저들끼리 흥이 나서 놀기 시작하더라.
어이없긴 했지만 옆에서 젊은 애들이 그러고 있으니 까칠하던 아저씨들도 뻘쭘했는지 얌전해지고, 분위기도 좋은 거 같아서 내버려 뒀다.
부작용도 있었지만.
‘아이고. 우리 집 갑자기 엥겔지수가 폭등했는데…… 다들 뭐 일이라도 시킬 걸 그랬나.’
애들한테 일은 못 시키겠고, 힘 남아돌아서 자꾸 싸울 기세인 인간들에게 장작 패기 같은 걸 시켰다간 그냥 장작이 남아나질 않을 거 같고.
골방에 처박아 두고 짚신이라도 삼게 하면 좋겠는데, 그럼 또 호위가 너무 없으니.
‘세자가 여기 오며 호위로 데려온 사람들도 있지만 그쪽은 어차피 금방 갈 사람들이고.’
세자가 여기에 오래 머물러 봤자 오늘 밤 정도니까.
뭐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다. 한동안은 역모 때문에 다들 긴장 상태였고, 양쪽 다 모시는 주군을 위해 이러는 것일 테니까.
“옹주 자가. 준비되었사옵니다.”
“응. 수고했어. 모처럼 나왔는데 또 일만 시켜서 미안하네.”
“소인들이야 어디서든 일하는 건 똑같은걸요. 오히려 여기가 마음 편하기도 하고요.”
“그럼 다행이고.”
지금 궁 안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나는 송비가 직접 준비한 주안상과 함께 모처럼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형제를 다시 한번 찾았다. 뭔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아직도 마루에서 그러고 있길래 추우니까 방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그리고 나도 잠시 둘 사이에 같이 앉아서 옛날 얘기를 좀 하다 적당히 먼저 자리를 떴다.
두 오라비가 극성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술 마시려고 하면 아주 질겁을 하네.’
몸이 성장하지 않을 때야 나도 건강을 위해 피했지만, 이제 그럴 이유도 없는데.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는 거 환상도 깨 줄 겸 앞에서 병나발이라도 불어 줄까 했지만, 저 둘이 술을 마시고 있으면 집주인인 나라도 제정신이어야지 싶어서 관뒀다.
‘아직 주량도 모르는데 취할 순 없지.’
겉보기엔 안 그렇게 보여도 실제로 마셔 보니 알코올 쓰레기라 말하면 안 되는 얘기를 취중에 유출할 수도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나중에 몰래 먹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드디어 독립을 목전에 둔 나는 키득 웃었다.
***
‘취해서 잠들었구나…….’
함께 술을 마시던 동생이 어느새 취해서 곯아떨어진 것을 보고 성원 세자는 푸근하게 웃었다.
궁을 나온 후 동생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올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런 날이 오다니.
‘마음이 편하구나.’
세자가 된 동생은 외숙이 곧 제주로 유배될 거라는 말을 전했다.
언젠가 사약을 내릴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한 막아 보겠다고도 해 주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아마 이 착한 동생은 못난 형이 또 외숙을 걱정하며 마음이 상할까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의금부에 붙잡혀 간 외숙이 그 성격상 순순히 굴지는 않았을 터이니 목숨은 부지하더라도 아마 외숙의 남은 생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동정하기에는, 외숙이 해 온 악행이 너무 많았다.
‘아마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도 많겠지.’
평생을 속죄하며 살더라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할 것인데, 결코 반성 따위는 하지 않을 위인이니.
‘어쩌면 바로 사형 선고를 받는 것보다도, 고통스럽게 오래 사는 것이 더 제대로 죗값을 치르는 게 아닐까.’
편한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참으로 마음이 편했다.
방바닥은 따뜻했지만 문을 열어 놓고 있으니 아직은 밤바람이 찬 것이 걱정되어, 동생의 어깨 위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걸쳐 주었다.
이쪽이야 한량이니 고뿔 걸리면 이불 뒤집어쓰고 온돌방에서 좀 지지면 되겠지만, 이분은 조선 땅에 하나뿐인 세자 저하가 아니신가.
마음 편히 아플 수 있는 자유는 이제 동생이 아닌 자신의 것이었다.
피로한 얼굴을 보면 측은함과 미안한 마음도 들었으나, 역시 자신보다는 아우가 더 세자 자리에 어울렸다.
“제가 저하께 큰 짐을 떠넘겼습니다. 하지만 분명, 세자 저하께선 장차 성군이 되어 주실 거라 믿사옵니다.”
저벅저벅.
일부러 내는 발소리 덕에 누군가가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을 안 성원 세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홀로 잔에 술을 따랐다.
본래라면 세자가 모시는 이 없이 이리 자신과 단둘이 술을 마시도록 놔두는 것은 아니 될 일이었으나, 세자의 고집에 다들 문은 열어 놓고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음식이나 술을 가져올 때에도 다들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곤 했다.
“송구합니다. 세자 저하…….”
“쉬잇. 저하께서 잠이 드신 듯합니다.”
다가온 이는 성원 세자 역시 알고 있는 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의원님.”
“밤공기가 차니 옷을 더 걸치시는 게 좋겠다 싶어 하인들에게 받아 왔사온데…….”
세화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세자와 그 세자의 어깨 위에 걸쳐진 겉옷을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성원 세자가 입고 있던 겉옷이 없어졌다는 사실도 깨달은 세화는 별말 없이 가지고 온 옷 중 한 벌은 예정대로 세자에게로 덮어 주고, 나머지 한 장은 성원 세자에게 내밀었다.
“감모라도 드시면 옹주 자가께서 화를 내실 것이옵니다.”
“그건 무서운 일이지요.”
옹주의 얘기를 하며 두 사람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세화가 나온 후, 성원 세자는 열려 있던 문을 반만 닫아 세화가 세자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 후 밖으로 따라 나와 세화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섰다.
“사실은 전부터 의원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는데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제게요?”
“예. 동생을…… 시아의 병을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마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시아는 아직도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장성한 모습을 보곤 얼마나 기쁘고, 안도하였는지 모릅니다.”
“혹시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세화의 말에 성원 세자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먼발치에서 가끔 잘 지내시는지만 확인하곤 했지요. 감히 그 앞에 나타날 생각은 없었지만 자라지 않으신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론 어찌 고칠 수 없을까 싶어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헤맨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 허사였지만요. 다들 그런 병의 치료법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하더군요. 하긴, 옹주 자가이신데, 당연히 주상 전하께서 어련히 명의들을 모아 치료법을 찾으셨을 것인데, 그래도 차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지요.”
“…….”
“의원님께서 옹주 자가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을 보면 제가 노력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때 제가 좀 더 열심히 찾아다녔다면, 좀 더 일찍 옹주 자가의 병을 고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머쓱하게 웃는 그를 보며 세화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찾을 수 없으셨을 겁니다.”
“어디 깊은 산중에라도 계셨던 겁니까?”
“예. 집안이 역모로 몰락해서 도망쳐 숨어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