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2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23)화(323/326)
“네?”
지나치게 급발진한 대화의 전개 속도는 성원 세자가 따라가기에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일전에 10여 년 전에 있었던 역모 사건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예…….”
“제가 바로 그때 역당으로 몰렸던 김선익 대감의 여식입니다.”
“!”
성원 세자는 당황해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저는……!”
“목소리를 낮추어 주십시오. 세자 저하께서 잠들어 계십니다.”
“…….”
입을 열지 못하는 성원 세자를 보며 세화는 작은 한숨과 함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덕분에 우리 집안이 왜 그런 일을 겪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지요.”
우리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 결국 너희 외가 탓이었다는 말이었으므로 성원 세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사죄했다.
“모두 부족한 저의 죄입니다.”
“……원망을, 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요.”
이 사람만 없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사라질 거라면 아예 떠날 때 외가를 정리하고 가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세화 역시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평생을 세자로 살아왔을 이가 그 자리를 버렸다.
평생,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었을 사람이 이렇게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결심이었을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일인지.
그는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저 눈감고 모르는 척하고 모든 것을 누릴 수도 있었다.
세자가 되어, 훗날 왕이 되어 조선팔도를 호령하며 살 수 있는 미래를 버리고 이렇게…… 모든 것을 동생에게 양보하고 사라진 사람.
‘스스로 세자 자리를 버리고 죽은 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을 원망해 보았자…….’
그리고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의 죄가 아님을.
죽은 사람이 되어 사라진 후의 일까지 그에게 어찌 책임을 묻겠는가.
원망은 있을지언정,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하지만 내 가문의, 내 아버지의 원수들이 지금 모두 의금부로 끌려가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제가……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지요.”
세화는 그리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송구합니다. 만약 원(怨)이 풀리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제 혈육이라는 이유로 세자 저하와 옹주 자가께…….”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며 세화는 고개를 저었다. 성원 세자는 안도하면서도 다시 자책했다.
“미안합니다. 이런 상황에 또 동생들 안위만 걱정하고 있으니…….”
“……저는 옹주 자가와 지금의 세자 저하께 큰 은혜를 입은 몸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미워할 수 없는 이이며, 정인이 너무나 사랑하는 형님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자 저하께서도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도요.”
“예?”
“저하를 속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그날.
옹주 자가의 서신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된 세자는 놀란 표정으로 세화와 서신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고는, 사람을 물린 후 곧 세화를 끌어안고 어깨를 도닥였다.
‘그리 알고 싶었던 진실을 알았는데도, 어찌 이리 갑갑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데 당연하지 않겠느냐.’
‘당시의 일과 관련된 이들은…….’
‘다시 조사하여 원통한 이는 없도록 할 것이다. 다만…….’
세자는 말을 흐렸다.
‘형님은…….’
‘……죄를 짓지 않은 이를 어찌 원망하겠습니까.’
‘고맙네.’
세자는 형님을 원망하지 않아 고맙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화는 성원 세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알리지 않으면 가슴에 남은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곧 누명이 벗겨지고 죄인들이 벌을 받을 거라는 사실에도 사라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있던 원통함.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성원 세자가 아무 변명도 없이 그저 괴로워하며 미안하다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본 순간, 이제 아버지의 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과를 받고 싶었던 걸까.’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 말 한마디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세화는 성원 세자 앞에서 평온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저는 이제 떠날 것입니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옹주 자가께서도 저를 보내 주시겠지요.”
옹주 자가와 세자 저하께서 힘들게 만난 혈육을 과연 그리 쉬이 보내 주실까.
세화가 그리 생각하며 침묵하는 것을 성원 세자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굳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평생을 속죄하면서 살 것입니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세자 저하나 옹주 자가 앞에 나타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
“그러니 원망은 저에게 남겨 두시고 세자 저하의 곁에 계셔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그런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된다면 도리어 두 분이 저를 원망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과거의 일이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세화의 말에 그제야 성원 세자는 안도한 얼굴로 웃었다.
참으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혹 가정을 이루셨습니까?”
“……저에게는 감히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민망한 듯 씁쓸한 웃음이었다.
세화는 성원 세자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일도 그렇고, 아마 저 외가에 죄가 많은 모양이라고 내심 추측했다.
“죄가 많은 몸이 또 공연히 귀한 댁 처자 신세를 또 망칠 수는 없지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또’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세자이던 시절의 세자빈을 말하는 것이리라.
세화가 알기로는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고 들었는데도 성원 세자는 마치 자신의 탓인 양 말했다.
“제 내자(內子)도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지요. 괜히 저 때문에 그 사람까지 고생하다 떠난 듯하여 그 사람을 떠올릴 때면 늘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감성적인 세자의 말을 세화는 칼같이 잘랐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 병환으로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병에는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원인이 있는 법이니 전염성 질환이 아닌 이상 그것이 어느 특정 개인의 탓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
뜻밖의 이과(理科)적 발언에 성원 세자가 굳어 있는 사이 세화가 물었다.
“아니면 혹 그분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괴롭히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모욕하거나 무시하거나 힘든 일을 시키거나.”
“그것도 아닙니다.”
성원 세자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도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고 성원 세자는 저도 모르게 꼬박꼬박 대답했다.
잠시 후 세화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병환은 유전적인 요인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물론 층층시하에 지엄한 왕실로 홀로 시집을 와 정신적으로 버티지 못한 것이 병환의 한 원인일 수는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걸 모두 스스로의 탓이라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조금 얼이 빠진 듯했으나 성원 세자는 세화에 마지막 말에 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병을 알게 된 후, 그 역시도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 의서를 찾아본 세월이 있었다.
덕분에 의학에 문외한도 아니었건만, 이렇게 타인의 입으로 들어야만 하는 말도 있는 법이었다.
“의원님께서…… 세자 저하의 곁에 계셔 주시니 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
“못난 형의 실언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세화가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본 성원 세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남겼다.
“저는 이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세자 저하를 부탁드립니다.”
“……예. 편히 쉬십시오.”
성원 세자는 세자와 세화만을 남긴 채 조용히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세화가 기운이 빠진 듯 문간에 걸터앉자, 뒤에서 예상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괜찮겠는가.”
“……멱살이라도 잡을 걸 그랬나 봅니다.”
“음…… 너무 시아를 닮는 것도 좋지 않아.”
세자의 말에 세화도 킥킥 웃었다.
세자가 술에 취한 것은 맞지만,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일국의 세자 저하께서 남의 대화를 엿들으시다니요.”
“남이 아니지 않은가. 추우니 거기 있지 말고 들어오게.”
아까까지 성원 세자와 대화하는 동안은 어쩐지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리 말하니 새삼 추위가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따스한 온기가 닿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자 저하의 형님을 원망한 적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습니다만…….”
어쩌면 세자가 바뀌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성원 세자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죄를 짓지 않은 이를 어찌 계속 원망하겠습니까.”
“응. 그리 말해 주어 고마워.”
세자는 세화를 끌어안고 울적해하는 정인을 달랬다.
그리고 같은 시간 성원 세자는 다른 곳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내가 업(業)이 많으니 아무래도 곱게 죽기는 글렀구나.”
“또 어디서 헛소리를 하십니까. 오라버니.”
“옹주 자가의 입이 어찌 이리 험하시답니까.”
혼잣말을 하며 제가 머무는 처소 돌아가려던 성원 세자는 도중에 나와 마주쳤다.
세화가 웃옷을 가져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도 있지만, 술 취한 세자가 혹시라도 세화를 붙잡을까 봐 밖에서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성원 세자가 세화와 뭔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나는 성원 세자를 추궁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왜 혼자 와?”
“아, 세자 저하께서 잠드셔서 의원님께 부탁드렸다.”
“세화랑은 무슨 얘기를 했는데?”
말해! 말해! 어서 말해!
성원 세자가 세화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보았으니 둘이 나누었을 만한 대화는 하나뿐이었으므로 나는 눈으로 압박했다.
성원 세자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나와 천호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김선익 대감의 일에 대해 이미 들은 사람들이고, 곧 누명이 벗겨질 테니 괜찮겠다 여긴 모양이었다.
“세화 의원이…… 김선익 대감의 여식이라더구나.”
“예?!”
드디어!
나는 조용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성원 세자는 내 뒤에 있던 천호가 당황한 얼굴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집안이 어찌 멸문되었는지 말해 주었는데 당사자가 같은 방에 있었다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러게.”
실은 한 명 더 있었답니다.
“…….”
갑작스러운 사실에 당사자인 천호는 말을 잊은 듯 굳어 있었다.
“김선익 대감의 일은 누명이고, 세자 저하께서도 알고 계신 일이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응.”
목적을 달성한 나는 일단 모르는 척 성원 세자부터 챙겼다.
“오라버니, 이제 가서 좀 쉬어야겠다. 취해서 비틀거리네.”
“그래? 세자 저하만큼은 아니지만 오늘 그만 과음을 했나 보구나.”
“얼른 가서 자. 부축해 줄까?”
“그 정도는 아니란다.”
그리고 그 말대로 꽤 멀쩡하게 걸어갔다.
휘청거리지도 않고 멀쩡히 걸어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지금 이 집에 깨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뭔 일 생기면 누구든 금방 발견하겠지.
나는 성원 세자에게서 눈을 떼고 드디어 공식적으로 진실을 알게 된 천호의 상태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