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2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25)화(325/326)
“세자빈이 할 수 있는 일과, 내의원 의관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래. 세화도 그렇게 느끼지 않아?”
“그건, 그렇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로 올라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법이었다.
‘어차피 내의원에서 일하면 현장과는 멀어지긴 해.’
결과적으로 높으신 분들만 진맥하게 되니까.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의서 편찬 일도 그렇고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겠지만.
“원래 세자빈이란 자리가 그런 자리는 아니지만 말이지, 지금은 이래저래 조금 혼란스러운 단계잖아? 지금이라면…… 아예 세자빈과 중전의 관할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그건……!”
물론 역병이 발생하거나 하면 당연히 다른 관리들의 지시를 따라야겠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고.
지금 여성 의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내의원 일에 중전이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세화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마 별로 실감한 적은 없을 거다.
‘중전마마께서 그쪽 일은 나한테 많이 맡기신 데다 뭔가 일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니까.’
조금 답답해 보일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분이시지만,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세자가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의욕이 있는 사람이 없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해질 가능성도 꽤 높을걸. 여성 의원들이 많아진 것도 뭐, 권력이 있는 이가 적극적으로 지켜 주지 않으면 얼마나 갈지 모르는 일이고.”
그리 말하며 나는 세화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중전마마께서도 그런 일에 적극적인 분은 아니셔서 나한테 어느 정도 일을 맡기고 계시잖아? 나도 바쁘기도 하고,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 너무 깊이 관여하기도 그렇고 말이야.”
“옹주 자가.”
“어떻게 봐도 내가 언제까지 맡아서 할 일은 아니잖아? 아마 세자빈이 들어오게 된다면 당연히 인수인계하게 될 거야.”
“예에…….”
다른 세자빈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지금의 정책이 유지될 수도, 없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말이지. 세자빈께서 싫다고 완강하게 나오시면 일개 옹주인 내가 궁 안의 일에 무슨 힘이 있겠어?”
내가 뭐 세력 키우며 산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 세화의 얼굴을 더 복잡해졌다.
나는 세화의 등을 밀어주기 위해 살살 꼬셨다.
“세자빈이라면 중전마마 대신 할 수 있는 일도 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세화라면 의술에 대해서도 의국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의 허락만 받는다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거야.”
“…….”
“당연히 두 분은 거부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해. 세화가 그동안 쌓아 온 신뢰가 있으니까. 새로운 의술을 더 널리 퍼뜨리고 가르치는 것도 가능하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일개 의원인 세화가 할 수 있는 일들보다, 세자빈이 되어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
“머리가 좋은 세화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겠지.”
“……예.”
아마 세화가 세자빈이 된다 해도 한동안은 꽤 힘이 들 거다. 출신적인 문제도 있으니 얕잡아 보는 이가 있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누가 뭐라 한들 세자빈이 된다면 지금의 조선에선 두 번째로 존귀한 여인이다. 누가 감히 그 말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미 나 때문에 많이 퍼졌다고는 하지만, 청결이나 보건에 관한 것도 일종의 유행으로 만들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퍼지는 법이니, 세자빈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고민이 남은 듯한 세화에게 나는 한 가지 더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세화도 알고 있지? 시영원에 공부하고 있는 여자아이들이 많다는 거.”
“예.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관직에 나갈 수 없지.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여인이 시험을 봐서 관직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의원뿐입니다.”
말이 많았지만 세화와 성지의 활약 덕분에 품계는 낮아도 다들 제대로 관직에 나서고 있었다.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바꿔 가야 할 일이고.
“그렇지만 알다시피 의술은 좀 적성을 타는 분야잖아? 머리가 좋아도 눈이나 손이 무디면 침도 놓을 수 없고. 비위가 약한 사람도 있고.”
“예에.”
“하지만 다짜고짜 다른 관직에도 여인을 들이겠다고 하면 반발이 크겠지. 그래서 전부터 오라버니와 내가 얘기하던 게 있었는데…… 뭐일 것 같아?”
“……혹시 사관(史官)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내궁에는 여사관을 들여야 한다는 원칙주의적 과격한 주장은 이전에도 나온 적이 있었다.
물론 사생활까지 감시당해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유쾌한 일이 아닐 거다.
세자도 가끔 신경질을 낼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 중전마마나, 저하께서 맞으실 세자빈 마노라께서 극렬히 반대하신다면 대신들도 그 핑계로 반대하기가 참 좋겠지. 안 그래?”
“!”
세화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의국의 일에 관여하게 된다면, 그에 관해서도 당연히 기록을 남기는 것이 옳겠지요.”
“그렇지?”
여사관을 들이기 위한 논리를 알아서 채우고 있는 세화를 보니 이미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세자는 밥상 다 차려 놓고도 이걸 모르네.’
세화가 여인이라고 사내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면서.
세화가 다른 여인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는 사실까지는 연결하지 못했다.
여인들이 과거에 나설 길을 만드는 것에 세화가 기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뭐, 너무 급진적인 사고방식일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던 현대인과 소설 주인공의 사고방식이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같아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세화밖에 할 수 없는 일 같은데, 세화 생각은 어때?”
“…….”
그렇게 세화는 이 나라의 보건복지를 맡을 기회와 여성 사관을 들일 기회를 미끼로 세자빈 자리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다.
‘잘못하면 앞으로 세자빈 될 사람들은 의술 공부까지 하느라 더 고생할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시댁 어른들에게 들들 볶이며 사는 것보다는 확실한 자기 몫의 일이 생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사실 후궁들도 할 일 없이 지내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것이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고.
‘설마 나중에 일하기 힘들어서 후궁 들이자고 하는 사람이 나오지는 않겠지…… 일은 의관들과 궁녀들에게도 어느 정도 분담할 수 있을 테고.’
물론 나중에 분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단은 세화가 감당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하온데 옹주 자가께서는 괜찮으시옵니까?”
“뭐가?”
“제가…… 세자빈이 되는 것 말이옵니다.”
세화가 세자빈이 되면 단순히 내 새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윗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내 권력 서열이 하나 내려가는 거지.’
하지만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 권력 서열이 몇 단계 더 내려가야 하는 게 정상이니까!
조카! 조카 좀 보자!
급발진하고 싶은 마음을 굴뚝 같았으나 나는 차분하게 답했다.
“괜찮아. 그리고 중요한 얘기가 하나 더 있는데.”
“무엇이옵니까?”
“그…… 소설 쓰고 있는 거 오라버니에게 말할 거야?”
“!”
내내 침착하던 세화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뭐 일단 그 건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고.’
아무래도 세자를 모델로 쓴 글도 있으니 밝히기가 민망한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의뢰한 소설이니 그냥 내 탓으로 돌리면 되는 일인데. 목적도 있었고.
어쨌든 세화가 세자빈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은 좋은 일이었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마음을 정한 거면 됐어.”
궁에 계신 중전마마께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우선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에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가례에 대해서는 어찌할 거야?”
“아, 그게…….”
아직도 세화의 신분에 대해 나에게 말하지 않으니 얘기가 조금 성가셔졌다.
사실 성원 세자한테 들었지만 이 사람들은 모르고 있을 테고.
후궁이라면 모를까, 세자빈은 적어도 제대로 된 양반가의 여식을 뽑으니까.
“뭐, 다른 방법도 있긴 해.”
“어떤 방법이옵니까?”
“원래도 오라버니는 김선익 대감과 사돈 맺으려고 했었잖아?”
“예.”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김선익 대감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하니…… 그 집 양녀로 세자빈 삼으면 어때?”
내 말에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며 차를 마시던 이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푸웁.”
“컥.”
옆에서 듣고 있던 세자와 천호가 괴성을 지르는 것과 대조적으로 세화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러나 곧 한 가지 문제점을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러다 만약 자신이 김선익 대감의 자식이라고 허위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면 어찌해야겠습니까?”
남동생은 찾아야 하지만, 지화나 수천을 사칭하는 사람이 나오면 곤란하겠다.
의붓 자매가 세자빈이라니 뭔가 콩고물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법했다.
물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그건 괜찮아. 여기 김선익 대감의 아들이 있으니까.”
“네?”
“뭐?”
“그렇지, 천호?”
의아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천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묵했다.
“…….”
“사……실입니까?”
떨고 있는 세화 옆에서 세자가 어이없는 얼굴로 나에게 따졌다.
“잠깐만, 너, 언제, 언제부터…….”
“나는 처음부터 알았지.”
천호와 합의하에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로 하기로 했다. 그래야 나를 속였다고 뒷말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동안 천호가 세자에게 가지 않고 내 곁을 고집한 것도 있어 괜한 오해도 피할 수 있을 테고.
“그리고 어제 큰 오라버니한테 세화가 지화라는 얘기도 들었어.”
“뭐?”
세자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잠시 굳어 있던 세화의 시선은 천호에게서 떨어지질 못했다.
“천호가…… 수천이? 정말로? 내, 내 동생 수천이야? 나, 나다. 내가 네 누이 지화다, 수천아!”
“예. 예, 누님.”
눈물의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자 나와 세자는 조심스럽게 둘만 남기고 방 안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얘기가 많을 테니 한동안 둘만 있게 해 줄 생각으로 우리는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움직였다.
다른 사람이 왔다가 두 사람의 대화 소리를 들으면 곤란하니 멀리 가지도 못해 두 사람의 울음소리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계속 걱정했는데 만나서 다행이야.”
“너는…… 어찌 수천이를 알아본 것이냐?”
“어어. 저쪽이 날 알아봤지. 게다가 내가 옹주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뭐…….”
“천호가 스스로 밝힌 것이냐?”
“응. 내가 그때 천호 도망치는 걸 도왔거든…….”
“뭐, 그럴 것 같았다.”
세자는 일단 천호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만족한 듯했다.
방 안에서는 한참 동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얼마 후에는 찰싹찰싹 등짝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과거 준비도 안 하고!”
“으악! 잘못했어요, 누님!”
“…….”
“…….”
아까와는 달리 천호의 엄살 섞인 절규가 흘러나오자 세자는 조금 심각한 얼굴을 했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조금 걱정이구나.”
“조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성급하다. 오라버니.”
“…….”
천호의 비명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우리는 우리대로 남매의 대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오라버니 닮았으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나도 어마마마께 맞고 컸는데?”
“오라버니는 공부를 하지 말라는데 말을 안 듣고 공부해서 맞았겠지.”
“…….”
이제는 중전마마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고 있을 테니 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하늘을 보니 푸른 하늘에 분홍빛 꽃잎이 바람에 날렸다.
“좋은 날이구나.”
“그러게.”
곧 역대급 초스피드 가례가 치러질 예정이니 지금 맘껏 쉬어 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