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2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26)화(326/326)
나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이것도 세자빈 마노라께서 처리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옹주 자가. 정말 꼭 이러셔야 하겠습니까.”
성가신 일은 다 해치워 버리고 드디어! 세자가! 가례를! 올렸으니까!
‘심지어 세자가 가례를 올리겠다고 했을 때 중전마마는 우셨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으면.
세자 고X설이 드디어 사라졌으니 다음 목표 달성이 시급할 터였다.
오죽하면 세자빈에게 아침 문안은 절대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다던가.
심지어는 주상 전하께서도 아침과 밤에는 세자를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하셨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럴 시간에 세자와 세자빈이 잠깐이라도 더 붙어 있으라는 뜻이겠지.’
주상 전하께 무언가 청하는 일이 없는 중전의 부탁이었으니 아바마마도 거부할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역시 마찬가지로 세손이 급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연애 결혼을 한 따끈따끈한 신혼부부 사이는 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가지고 온 자료들을 설명하기 위해 마저 꺼냈다.
“저는 이미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더는 의국의 일까지는 무리입니다. 세자빈 마노라께서 와 주셔서, 드디어, 일을 줄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옹주 자가께서 언제나 하루빨리 가례 올리라고 등을 밀어주시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후후. 이제야 아셨습니까.”
세화는 말로는 투덜대면서도 내가 건네는 것들을 빠르게 숙지했다. 뭐 의국의 일이야 실무를 거쳤던 분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이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세화가 세자빈이 되고 내의원에서 세화를 못살게 굴었던 이들이 사직서를 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뭐…… 내의원 의관들이 다 바보도 아니고, 이미 세자의 총애가 지극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그만둘 놈들은 이미 예전에 다 그만뒀겠지.
남은 사람들은 이미 세화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던 상태였으니, 후궁이 아니라 세자빈이라 놀랐을 뿐 크게 바뀐 것은 없다고 들었다.
“자, 이걸로 끝입니다.”
“예.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는 세자빈 마노라께서 하실 일인 것을요.”
나는 드디어 세화에게, 아니, 세자빈께 내가 해 왔던 관련 일들을 모두 인수인계한 후 환하게 웃음 지었다.
“저도 이제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겠습니다.”
“꼭 궁궐에서 영영 떠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좀 떠나고 싶은데 다들 왜 그리 사람을 붙잡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집이 있는데 내 집에서 살지 못하는 건 왜인지.
그것도 집 지어 주신 분이 못 나가게 하니, 원.
“다들 옹주 자가께서 아니 계시면 궁궐이 텅 빈 듯 쓸쓸해진다고들 하십니다.”
“누가 들으면 제가 매일 궁 안을 휘젓고 다닌 줄 알겠습니다.”
나가 노느라 바빴는데.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다 적당히 담소를 마무리 지었다.
나는 세화에게 가볍게 예를 표했다.
“쓸데없는 걱정이겠지만 제가 없는 동안 세자 저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옹주 자가의 미소가 참으로 눈이 부십니다…….”
“몰라요. 난 이제 금강산으로 떠날 거야.”
“푸후훗.”
지엄한 궁궐 안이지만 아직도 내가 이리 어린아이같이 구는 것은 용인되는 분위기라. 세화도 나와 있으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모양이었다.
“부디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마음 같아서는 푹 쉬고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사온데, 옹주 자가께서 아니 계시면…… 제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아이참, 능력 있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세자빈이 되며 배워야 할 것들도 많았는데 의국 일까지 넘기니 세화는 정말 일복이 터졌다.
게다가 의서 편찬은 이제 뭐, 지위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세화가 책임자였다.
나는 세자빈 처소를 나가면서 서운한 표정의 조 상궁과 눈이 마주치곤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세화가 세자빈이 되며 아무래도 좀 편히 대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붙여 주려다 보니, 세자빈의 지밀상궁으로 초고속 승진한 소이였다.
“조 상궁. 승차했는데 어찌 얼굴이 그리 불퉁한가.”
“소인이 옹주 자가 곁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어찌 금강산에는 못 가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따라다니며 그 고생을 했으니 궁궐에서 편히 쉬라고.”
“소인은 그런 거 모르옵니다.”
아랫것들 들을까 걱정되어 작게 툴툴거리는 걸 보다 못해 나도 작게 속삭였다.
“신작 보고 싶으면 참아…….”
“…….”
세화에게 소이를 붙여 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세화의 집필 활동에 대해 아는 이가 궁녀들 중에선 소이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세자빈이 소설 보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냐마는, 기분 전환 겸 소설을 쓰고 싶을 때는 좀 숨겨야 하니 공범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한동안 바빠서 신작은 생각도 못 하겠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소이도 작게 한숨을 내쉬곤 내게 예를 표했다.
우리 처소에서 지내며 애가 너무 풀어져서 좀 걱정인데 다른 사람들 앞에선 괜찮겠지……?
‘혹시라도 적응 못 하면 세자빈이 더 신뢰할 수 있는 상궁 좀 키운 후에 보직 바꾸는 것도 가능은 한데.’
어찌 되든 훗날의 일이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자빈의 처소에서 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돌아왔을 때 조카 소식이라도 들리면 좋겠는데.’
다들 압박 주고 있을 테니 나는 입을 다물고 있긴 하지만 역시 X자설을 완전히 불식시키려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긴 했다.
“옹주 자가.”
“아, 성지.”
처음에는 내 치료가 끝나고 내의원을 나가려고 했지만, 나한테 발목이 잡혀서 나가지 못했던 성지는 세화가 세자빈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뒤를 이어 세화를 포함한 왕실 식구들을 전담하게 되었다.
“중궁전에서 나오는 길인가.”
“예.”
“요즘 많이 바쁘다지.”
“예. 설마설마하긴 했는데 이리될 줄은 몰랐사옵니다.”
세화와 단짝 친구였으니 세자와 세화가 어떤 관계인지는 얼추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후궁이 되는 건가가 걱정하던 성지는 세화가 실은 반가의 여식이고, 후궁이 아니라 세자빈이 된다는 사실을 듣고 다행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궐 안에 이런 벗도 있으니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실력도 인품도 믿을 수 있는 이였다. 내의원에서는 세화가 빠져도 성지가 있어 다들 안심하는 분위기였다고.
“중전마마께서 옹주 자가를 기다리고 계셨사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응. 수고해.”
몸이 약한 중전마마이시지만 근래에는 상태가 꽤 좋았다. 속 썩이던 아들놈 장가보낸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사라지신 듯 안색도 밝아지신 것을 보니 세자가 불효자이기는 했다.
“곧 떠날 것이니 이리 얼굴이라도 좀 보고 싶어 불렀습니다.”
“금방 돌아올 것을요. 하지만 소녀의 얼굴이 보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보여 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사옵니까.”
나는 그리 말하며 넉살 좋게 꾸물꾸물 중전의 앞까지 다가갔다.
“후후. 옹주가 없으면 내 적적해서 어찌 지낼까 모르겠습니다.”
“세손(世孫)이나 군주(郡主)가 태어나면 소녀의 얼굴은 까맣게 잊어버리실 겁니다.”
“이런 이런, 이 사람을 놀리시는 겝니까. 하기야, 오랜만에 갓난아기를 보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적당히 하하 호호 평온한 대화를 나누던 나는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중전마마에게는…… 혹시 예전 성현 왕후의 궁인들이나 영빈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 알고 계셨사옵니까?”
“……후궁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 말하며 중전은 옛 기억을 떠올리는지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하여 아무도…….”
“성현 왕후께선 무척 자애롭고, 후덕하신 분이었지요.”
“예?”
“그런 분이 전하의 총애까지 지극하시니 어찌 후궁들이 감히 그 심기를 거스를 수 있었겠습니까. 증좌도 없었고, 그저 후궁이 제 몸도 간수하지 못해 용종을 잃었다는 사고로 넘어갔으니…….”
그리 말하며 중전은 자신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 역시도 처음 용종을 잉태하였을 적에 몇 개월 만에 잃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다른 후궁들 역시 비슷한 일을 겪는 것을 보고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전, 성현 왕후만이 원자와 왕녀 아기씨를 무사히 생산하신 것을 보고, 모두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
“세자 저하를 잉태하였을 적에는 혹시나 누군가 노리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하며 몇 개월을 숨기고 있었지요. 운이 좋았다고 하면 천벌 받을 일이지만, 당시의 왕녀께서 두창으로 앓다 숨을 거두셨을 때라 누구도 별 총애도 받지 못하는 후궁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 무사히 세자 저하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지 중전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물론 출산 이후로도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지요. 지금은 강건하게 자라셨지만 어릴 적에는 몸이 약하시어 늘 노심초사하며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리 강건하게 자라시어 세자 저하가 되실 줄은 어찌 알았겠습니까.”
“중전마마.”
당시의 고생은 보답받았음에도 오랜 세월 받았던 고생은 사라지지 않아 아직도 중전을 괴롭히는 듯했다.
“중전이 되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많은 어미였지요. 세자가 아직 일개 왕자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옹주가 함께 있어 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소녀의 오라비인 것을요.”
내가 웃으며 답하니 중전의 얼굴에 회한이 섞였다.
“내가 당시 윤 상궁을 좀 더 챙길 수 있었다면 옹주도 어린 시절 그리 고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미안합니다. 그때의 나는 시야가 좁아 다른 사람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습니다.”
“중전마마께서도 그리하실 수밖에 없었겠지요. 능력 밖의 일이었던 것을요.”
“이해해 주니 고맙습니다.”
그 개잡놈들이 벌였던 일을 생각하면 뭐, 그렇게 몸 사릴 수밖에 없던 것도 안다.
다른 후궁들이 불쌍해서 그렇지.
나는 후궁들에게 조금 더 잘해 주기로 다짐했다. 아니, 지금까지도 뭐 딱히 못되게 굴지는 않았지만.
“편히 다녀오세요.”
“중전마마께서도 함께 가시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나는 빈말 아닌 빈말을 던졌다.
왕이 궁을 비우는데 중전이 궁궐을 비운다니, 아니 될 말이었다.
아무리 대리청정 중이라고 해도 만에 하나 왕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중전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세자가 안전하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실의 여인이 궐을 떠나는 일이 쉽지 않지요…… 그게 아니어도 그리 성한 몸이 아니니 먼 길을 떠나는 건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진맥 꼭 받으세요.”
“이젠 세자빈이 매일같이 챙기니 도망도 못 갑니다.”
세자빈을 말하는 중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큰 짐을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후후. 가례 전에는 세자 저하께 여인이라도 하나만 어찌 곁에 있으면 좋겠다 했는데 가례를 올리고 나니 손주 생각이 간절해지지 뭡니까.”
“본인에게 그리 말씀하신 건 아니시지요?”
“입방정을 떨까 무서워 문안도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럴 시간에 세자와 1각이라도 더 함께 있어야지요.”
내가 정신적으로 피로하면 아이가 잘 안 생긴다는 말을 해서 그런가, 이분도 지금 진지했다.
“그렇죠. 중요한 일이니까요.”
“옹주가 그리 내 맘을 잘 알아주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래도 낮에 문안 오겠다고 하면 받아 주세요.”
“워낙 총명해서 필요한 것도 금방 다 배웠으니 제가 더 가르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본디 반가의 여식이 아닙니까.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에도 총명하여 무척 마음에 들어 하였는데. 이리 인연이 닿은 것을 보면 분명 하늘이 내려 준 인연이겠구나 싶습니다.”
하늘이라고 해야 할지, 원작 작가라고 해야 할지.
세자와 세화는 세화의 신원을 회복하기 전 중전마마께 미리 사실대로 고했다.
분명 걱정이 많으실 테니 마음이라도 좀 편해지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게다가 천호가 동생이라는 사실도 아시고는 그 사실도 꽤 마음에 들어 하셨다.
세자의 가례가 늦은 만큼 원손에게 심적으로라도 의지할 수 있는 친 외숙이 있나 없나는 중요한 문제니까.
외척이 권세를 잡아도 걱정이지만 힘이 없어도 걱정인 법이었다.
‘고모가 이렇게 짱짱한데 그런 걱정을…… 하긴,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
내일 당장 놀러 나갔다가 호랑이한테 물려갈 수도 있는 게 인생이었다.
세자는 가끔 둘이 있을 때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다음 세자는 너 말고는 없다.’ 같은 헛소리를 하며 내가 질색하는 걸 즐기지만, 요즘에는 내가 아바마마와 둘이 놀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시끄럽게 굴고 있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배웅을 나온 세자는 예상대로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만 남겨 두고 좋겠구나, 아주.”
“신혼의 단꿈에 젖어 계시는 분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나 없는 동안 조카나 만들어 놓으시든가.”
“!”
나는 세화에게는 할 수 없는 막말을 세자에게 쏟아부었다.
“정말이지 섬세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구나.”
“내가 그렇게 섬세했으면 10년도 전에 벌써 죽었을 듯.”
“말 막 하지?”
나랑 조용히 막말을 주고받은 세자는 진지한 얼굴로 아바마마께 다가갔다.
이미 대리청정 중이라 일은 거의 혼자 다 하고 있는 세자에게 아바마마는 그냥 양위하고 가겠다고 했다가, 신하들이 난리 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덕분에 갑자기 양위 받을 뻔한 세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왠지 양위하면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하실 거 같아서 나 역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나는 말하자면 반독립 상태였다.
내 사가에서도 지내고 궁에서도 지내고, 덕분에 궁녀들도 줄였고.
“흥. 잘 놀다 오거라.”
“길잡이도 잡아 놨으니 걱정 마시지요.”
나는 세자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고 가마에 올랐다.
요란한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바마마와 함께 가게 되어 왕의 행차다 보니 몰래 갈 수도 없다.
처음에는 너무 화려한 행차는 좀 그렇지 않나 했는데, 사실 왕실 행차는 백성들한테 좋은 구경거리이기도 하고…….
반쯤 아바마마의 요양 느낌으로 가는 것이니 천천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가마를 타고 거리를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드문드문 보였다.
지아와 아영이는 사관 시험을 보겠다고 준비 중이라 바빠야 하는 애들이 왜 나를 보러 와 있는지.
‘아, 매향이다.’
매향이도 바쁠 텐데.
하긴, 역모 사건이 알려진 직후에도 놀라서 사가로 나를 찾아왔었던 이이니 행차 정도야 보러 올 만했다.
‘뭐랬더라, ‘기방을 없애지 말고 그대로 두셨다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 수도 있었을 거’라고 했던가…….’
그때 매향이는 그런 말을 했다가 나에게 혼이 났었다.
내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그 후에 매향이가 내 말을 듣고는 나를 붙잡고 울었던 것만은 기억에 선명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든 내가 기생들이 계속 그런 일을 하게 두며 이익을 얻는다면, 그건 포주랑 다를 게 없잖아.’
나도 사실 원작의 내용을 생각하면 언젠가 반역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짓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편하자고, 다른 이를 불행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꿀꿀한 생각을 밀어내며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숙이는 이들 중에 여전히 아는 얼굴들이 잔뜩 눈에 들어왔다.
시영원 애들은 왜 이렇게 많담.
역모 사건 때도 내가 걱정된다며 내 사가에 몰려든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인생 헛살지 않았다니까…….’
내 가마 옆에 말을 타고 가고 있던 천호가 내 시선이 닿는 주변에 아는 얼굴들을 확인하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니, 다들 잘 지내는 듯해서.”
“옹주 자가께서 아니 계신 동안에도 시영원은 괜찮을 터이니 심려 마십시오.”
“그래.”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남은 이들이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일을 분담해 놓았으니 괜찮겠지. 이제 어느 정도 체계도 잡혔고.
‘아.’
나는 문득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보며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옛날에 저쪽에서, 지화랑 수찬이랑 오라버니랑 관등놀이를 나왔었지.’
이렇게 무사하게 다시 만나서 다행이지.
‘저기는 지아랑 아영이 데리고 성지를 만나러 가던 길이네.’
그때만 해도 성지가 내의원에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민 상궁 데려올 때 이 길이었던가.’
지금도 시영원에서 바쁘겠지.
‘이쪽은 소이랑 성 겸사복이랑, 나중에는 천호 데리고 자주 다니던 길이네.’
나도 참, 얼마나 자주 나돌아다녔는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다 익숙해 웃음이 나왔다.
소이는 지금쯤 세화 옆에서 나를 원망하는 말을 쏟고 있을까.
‘성 겸사복은 아직 은퇴 못 해서 앞쪽에 있지만, 천호는 내 옆에 있고.’
시선을 느꼈는지 천호가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눈이 마주친 천호 역시 웃고 있었다.
한양에서는 아무래도 내내 아는 얼굴이 많았는데 익숙한 지역을 벗어나니 아무래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이가 많지가 않았다.
그래도 종종 일부러 찾아오기라도 한 건지 시영원 선생들이 내가 가는 길목마다 가끔 보이곤 했는데, 한양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는 얼굴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조금 심심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금강산을 목전에 둔 어느 날, 행차 중 눈에 익은 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미리 웃으며 아바마마에게 말할 수 있었다.
“아바마마, 이곳에 소녀가 미리 알아 둔 길잡이가 있을 것이옵니다.”
“네가 따로 길잡이를 구했더냐.”
“예. 소녀가 이래 보여도 꽤 능력 있지요?”
“허허. 그래.”
역참에서 아바마마를 붙잡고 적당히 운을 띄우는데 때마침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옹주 자가, 시영원에서 왔다는 길잡이가 왔사옵니다.”
“들라 하게.”
“예.”
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가린 훤칠한 청년 하나가 들어와 삿갓을 벗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바마마는 청년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청년을 보며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참, 오라버니. 지금은 어떤 이름을 써? 그대로 한자만 다른 ‘이혜’야?’
‘아니, 지금은…….’
“소인, 금강산 길잡이를 할 이가(家), 시혜라고 하옵니다.”
‘‘이시혜’라는 이름을 쓴단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내 이름을 따라 한 것 같은 기분이 좀 들지만, 오라비니까 봐줬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