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6)화(36/326)
말해 두지만, 궁 안에는 어린애가 제법 많다.
아기 말고, 어린애.
지밀궁녀는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뽑아서 교육하기 때문에 나보다 어린애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이는 남자아이고, 입고 있는 옷만 봐도 내시부의 소환(小宦)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내시부 애들이면 날 못 알아보기가 어렵지.’
내 또래의 궁녀들은 이런 옷은 못 입으니까.
워낙에 왕실 식구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보니 내 옷들은 일상복이어도 유독 화려한 편이었다.
좀 낭비 같기는 한데…… 지금 궁중에 딸이라고는 나 하나뿐이고, 해 주겠다는 걸 거부할 것도 없어서 감사히 받고 있었다.
예쁜 옷 싫어할 이유도 없고.
그건 지금 날 보고 있는 이 남자아이의 눈에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와. 이쁘다.”
그래, 예쁘지.
이런 고급 옷, 어디 가서 보긴 어려울 거다.
옷도 옷이지만 내 머리도 아침마다 궁녀들이 심혈을 기울여 단장하고 꾸며 주는 것이라 평상복치고는 꽤 화려했다. 내가 머리 땋는 거 두피 당기고 질렸다고 해서 요즘에는 궁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머리 모양을 시도 중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에게 물었다.
“꼬마야, 어디서 왔니?”
“꼬마? 내가?”
어딜 봐도 나보다 어려 보였지만, 아이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내 키는 원래 내 또래의 생각시들보다 큰 편이었지만 독을 먹은 작년 그날부터 자라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 아이도 대충 7살? 그 정도는 된 거 같은데.’
음, 이 시기에는 여자아이가 남자애들보다 성장이 빠르던가.
아무튼 사리 분별을 못 할 나이는 아니니 대충 물어보면 왜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있겠지.
“너 누구랑 왔어?”
“누님이랑, 아주머니랑 같이 왔는데, 없어졌어.”
네가 없어진 거겠지.
길 잃은 아이답지 않게 당당한 걸 보니 무섭다고 울지는 않겠다 싶어 안심했다. 그런데…….
“누나랑 왔다고?”
“응. 아버님께서 공을 세우셨는데 그걸 치하하기 위해 부르셨대.”
“아버님은 어디 계시는데?”
“북병영(北兵營)에 계신다고 들었어.”
“흐응.”
북병영이라면 함경북도(咸鏡北道) 경성(鏡城)에 있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진영(陣營) 아닌가?
공을 세운 건 이 아이의 아버지인 모양이었지만 도성에 남은 가족은 여인들뿐이라 내외명부의 수장인 중전이 불러 치하한다는 게 아닐까.
‘하지만 중전은 그렇게 사람을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닌데.’
오죽하면 나한테도 문안을 자주 올 필요 없다고 할 정도였다.
중전인데 그래도 괜찮은가 싶지만, 몸이 약한 사람에게 뭐라 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한때 같은 중전 후보였던 홍 숙원이 저지른 독살 사건의 충격이 워낙 크지 않았던가.
덕분에 적당히 온건한 성정의 중전에게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원체 조심스럽다 보니 세자가 외척 문제로 책잡힐 구석이 없기도 했다.
세자의 어머니가 건재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의의는 충분하기도 했고.
아무튼 그렇다면 이 아이의 보호자는 지금 중궁전에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 어쩌다 여기까지 혼자 온 거야.’
중간에 얘를 아무도 안 잡았나 싶었지만, 나도 역시 아무한테도 안 걸리고 여기까지 튄 사람이니 뭐라 할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야 궁궐 지리를 꿰고 있으니까. 아?’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이에게 물었다.
“너 혹시 나 쫓아왔니?”
“……어어? 으응.”
대답이 시원치 않은 것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너 길 잃었지.”
“…….”
어린아이라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는지 길 잃었다는 소리를 하긴 싫은 모양이다.
‘길 잃고 헤매다가 날 보고 쫓아왔나 보군.’
내가 인적 드문 길로 가니까 얘도 안 들킨 셈이다.
“어휴. 혼자 쉬지도 못 하게 하네.”
“쉬고 싶으면 신경 쓰지 말고 쉬어. 누님과 아주머님도 그렇게 금방 나오실 것 같지는 않으니 기다릴게. 나도 모처럼 궁에 왔으니 바로 돌아가면 재미없을 거 같고.”
아니 뭐 이런 놈이.
내가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이 꼬맹이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호수가 보이는 나무 아래 편히 앉아 있던 나는 뜻밖의 불청객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얼굴이 깨끗하고 귀티가 흐르는 것이나, 차려입은 행색만 보아도 양반가 자식은 맞는 것 같았다. 아직 어린아이지만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이었고.
아이는 동글동글한 눈을 굴리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누구야?”
“……알 거 없다.”
“애기 나인이라기에는 너무 예쁜데.”
“궁녀가 안 이쁘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럼 궁녀 맞아?”
“……그렇다고 치자.”
설명하기 귀찮고, 또 왕족이라고 하면 예의를 운운하기도 귀찮아 고개를 저으며 축 늘어졌다.
물론 이것도 왕족이라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생각이겠지만.
‘음, 내가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차피 이리 굽신 저리 굽신하며 살았어야 하는데 아까 세자가 말한 정도는 참아 줬어야 했나.’
일반적으로 공주라는 신분에 대한 환상이 퍼져 있긴 하지만 어느 나라든 딱히 공주들의 인생이 평탄한 편은 아니었다.
여권이 낮은 시대에 정략결혼을 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결혼도 흔했고, 남편 인성이 쓰레기라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조선 시대 왕들은 대체로 딸들을 아껴서 정략결혼보다는 적당히 좋은 집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는 편이었고, 누가 뭐라 해도 공주가 부마보다 우위에 있었다.
물론 뭐든 왕 나름이고, 부마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갈리긴 하지만 정치적인 부침만 없다면 전 세계 평균에서 최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좋은 팔자라고 할 만했다.
‘근데 역시 못 참겠지.’
역시 어떻게든 혼자 살 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저기, 아까부터 왜 화가 나 있어?”
“그런 일이 있다. 꼬마야.”
“나보다 작은데 꼬마래.”
“안 작다.”
내가 아직 작긴 하지만 내 옆에 앉아 있는 꼬맹이도 분명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작나? 아마도?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내 장래에 대한 일은 일단 제쳐 두고 옆에 있는 미아에게 좀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 궁은 어린아이가 헤매고 다니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꼬마야. 너 가족들이 걱정할 테니 슬슬 돌아가 보는 게 어때. 중궁전으로 데려다줄게.”
“그야 누님한테 죽도록 혼은 나겠지만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어? 여기 재밌단 말야. 건물도 크고, 화려하고, 이런 연못도 처음 봤고, 예쁜 애기 나인도 봤고.”
“그야…….”
원래 왕궁은 위엄을 보이려고 화려하게 지으니까 그렇게 보이겠지.
그리고 애기 나인을 꼬시면 안 된단다, 아가야.
‘순진하게 감탄하는 어린애를 상대로 이런 소릴 해도 바보 같지만.’
TV도 없는 시대고 왕궁에 처음 들어와 본 아이가 감탄하는 것도 당연해서 나는 관광 가이드가 된 기분으로 아이를 이끌었다.
“그래, 누님한테 죽지 않을 만큼 혼날 각오라는데 어쩌겠니. 여긴 어차피 사람도 없으니 적당히 구경시켜 줄게.”
“정말?”
계속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내 말에 기쁜 듯 고개를 번쩍 들더니 갑작스레 달려들어 포옹을 시도했다.
어이구. 강아지 같구만.
너 실은 길 잃어서 무서웠지?
“떨어져, 떨어져.”
“너 좀 특이하다.”
“너야말로 어느 집 자제인지 모르겠지만, 예의범절이 부족하다는 말 좀 듣지?”
“똑똑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뭐래.
나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아가야. 길 잃어버리지 않게 손잡아 줄게.”
“손잡아 주는 건 좋은데, 아이 아니라니까.”
“그래그래.”
내 손을 잡고 일어난 아이는 확실히…… 나보다 조금 컸다.
아주 조금.
“너 몇 살이니?”
“나? 일곱 살인데.”
근데 왜 나보다 커.
“일곱 살이면 나보다 어리니 누나라고 부르거라. 근데 너 실은 나이 더 많은 거 아냐?”
“어. 누나였어?”
오랜만에 누나 소리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뭐, 중요한 전각도 아니고, 후원 정도니까 구경시켜 준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
궁궐 후원은 확실히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
‘나중에 기억이나 할까.’
나는 아이 손을 잡고 적당히 호수 근방을 한 바퀴 돌았다.
한창 봄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라 풍광이 아름다웠다.
아이는 주변을 살피면서도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그래서 말을 탔는데, 아직 망아지라 누님은 못 타고 나만 탈 수 있더라고.”
“하하. 잘됐네.”
“하지만 나 큰 말도 탈 수 있다?”
“그래? 나도 탈 수 있는데, 우연이네.”
궁 안에 내 말벗이 될 만한 애기 나인들이야 많지만 아무래도 그쪽에서 나를 편하게 대할 수 없다 보니 이렇게 누군가와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세자는 세자니까 말이지.’
음,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참는 편은 아니지만 좀 더 크면 계속 그리 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금이야 독살 사건의 기억이 아직 선명한 데다, 내가 어리니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그냥 안 자라는 것도 좋을 것 같지.’
무의미한 생각을 하며 연못가에 있는 정자에 도착한 나는 분명 내가 들고 있었는데 어느새 아이의 손으로 옮겨 간 보자기를 풀기로 했다.
“배고프니 간식이라도 먹자.”
“어, 이거 간식이었어?”
간식이란 말에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일곱 살이든 여덟 살이든 한창 먹을 때였다.
잘 싸 둔 보자기를 풀자 아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그래, 네가 이런 걸 어디서 보겠니.
먹음직스럽게 갈색으로 익은 윗부분과 노오랗고 폭신한 몸체.
오늘의 간식은 어제 구워 둔 카스텔라였다.
자고로 몰래 튈 때는 간식 지참이 필수인 법이다.
“이거, 뭐야?”
“먹어.”
설명하기도 귀찮다.
아이는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의심도 없이 집어 먹었다. 이따가 손 씻으라고 해야지.
“음! 맛있어! 진짜 맛있어! 이거 뭐야?”
“장안의 화제인 계란밀떡이란다.”
“나도 그거 들어 봤어. 궁궐에서만 만들 수 있다며?”
“하하하. 그래, 많이 먹으렴.”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걸 보니 역시 강아지 같아 귀여웠다.
‘나도 개나 한 마리 키울까.’
안 그래도 세자는 아닌 척하면서 고양이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데.
참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놈도 내 머리를 쓰다듬는 데 집착하는 이상한 남자로 컸을지도 몰랐다.
“한 바퀴 돌았으니 이거 다 먹고 나면 이제 중궁전에 데려다줄게. 그럼 누가 네 누님을 찾아 줄 거야.”
“어, 왜? 좀 더 같이 놀면 안 돼?”
“왜냐니. 네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을 거 아냐.”
“으응.”
아이는 아쉬운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키득키득 웃었다.
표정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때였다.
까악-
모처럼의 즐거운 시간을 깬 건 갑자기 들려온 까마귀 울음소리였다.
“저놈이 또 저러네.”
“까마귀 아냐?”
궁에는 종종 까마귀들이 보였는데,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사람을 성가시게 하곤 했다.
아마 지금도 내 옷과 장신구들이 반짝거리는 게 맘에 들어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사람한테까지는 잘 안 달려드니까 괜찮으려나.
“앗.”
“어, 위험해!!”
괜찮지 않았다.
까마귀가 나에게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아이의 팔이 내 얼굴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