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7)화(37/326)
“저리 가지 못해?”
아이가 소리 지르며 팔을 휘두르자 까마귀도 달아나려 날갯짓을 했다.
푸드덕.
“아, 뭐야!”
하지만 도망치려던 까마귀는 무언가에 걸린 듯 날아가지 못하고 푸드덕거렸고…….
“에잇!”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주위가 잠잠해지자 조용히 눈을 떴다.
방금까지 내 머리 위를 습격하고 있던 까마귀가 아이의 손안에 고이 잡혀 있었다.
“괜찮아? 이 녀석 겁이 없네. 사람한테 달려들다니. 누나 머리 장식이 반짝거려서 탐이 났나 봐.”
“아. 음, 고마워.”
평소에는 내 주변에 사람이 바글바글하니 까마귀가 감히 달려들지 못했는데 나 혼자 있으니 만만해 보였나 보다.
하긴 어린아이는 작고, 반짝이는 건 탐나겠지.
“까마귀 발에 줄이 걸려 있어. 이거에 걸려서 도망치지 못한 것 같아. 목걸이야?”
“아.”
챙-
정신없어서 알아채지 못했는데 줄에 걸려 옷 밖으로 끌려 나온 옥가락지가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다행이다. 잃어버릴 뻔했어.”
“중요한 거야?”
“응.”
죽은 성원 세자가 그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준 물건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걸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었다.
“내가 이놈 잡고 있는 동안 빼내.”
“무엄한 까마귀 같으니.”
까마귀의 발가락에 얽힌 매듭을 풀려고 하는데 까마귀가 다시 반항을 시작했다.
까악-
“앗.”
“조심해!”
날개는 붙잡혀 있으니 아예 부리로 나를 쪼려는 모양이었다.
매듭을 풀려면 얼굴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이러다 다쳤다가는…… 근방 까마귀들이 분노에 찬 누군가의 명에 의해 몰살당할지도 몰랐다.
“할 수 없지, 칼로 끈을 자르자.”
“칼을 들고 다녀?”
“노리개 장식이야.”
여덟 살짜리에게 은장도 노리개는 좀 위험하지 않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쓸모가 많아서 애용하고 있었다. 주로 빵을 자를 때라든가.
‘애초에 은장도의 원래 용도도 과도에 가깝지.’
내가 까마귀의 다리 부근에서 묶인 부분의 끈을 적당히 잘라 내고, 매듭을 묶은 후 반지를 다시 품에 잘 넣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그제야 까마귀를 풀어 주었다.
까악-
아이는 이쪽을 보며 깍깍거리는 까마귀를 위협하듯 소리 질렀다.
“다신 오지 마, 또 오면 혼쭐을 내 줄 테다.”
“하하. 무리로 몰려오면 곤란한 건 이쪽일걸.”
나중에 또 오면 이번에는 사람 불러서 활로 위협해 쫓아 버려야지.
가만두나 봐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던 나는 입술에 뭔가 말랑한 감촉이 닿자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이 아이 품에 안겨 있다는 것과, 방금 본의 아니게 남자애 뺨에 뽀뽀를 해 주고 말았다는 걸.
‘아니, 이 무슨…….’
아이도 그걸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놀라서 허둥지둥 나에게서 물러났다.
아까 까마귀에게서 나를 감싸느라 자세가 묘해진 셈이었다.
‘애기한테 뽀뽀 좀 해 줬다고 별거도 아니고.’
나는 뭔 생각을 하는지 머뭇거리는 아이의 팔에 긁힌 곳이 없는지 살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안 다쳤어?”
“조금, 긁힌 정도야.”
아이는 히죽 웃으며 슬쩍 몸을 뺐다. 얼씨구? 수줍어?
시선이 방황하며 볼을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나름 충격적인 일이었나보다.
‘하긴 유치원 아이들도 연애를 한다는데.’
요즘 애들 조숙하다더니 이 시대 애들도 별다를 게 없군.
“음, 긁혀서 피가 나는데.”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소매에 가리면 안 보이겠지만 말이지.
“별거 아니라도 소독은 해야지.”
“소독?”
나는 아이를 끌고 물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가 상처를 씻어 내고 손수건을 꺼내 상처가 난 부위에 묶었다.
소독약이 없어서 아쉽지만 일단 깨끗한 물로 씻어 내는 것만 해도 훨씬 낫겠지.
“다쳤을 때는 깨끗한 물로 씻고 약을 발라. 약이 없으면 깨끗한 천으로 감싸서 닿지 않게 하고. 알았어?”
“응.”
말을 잘 들으니 귀엽군.
그나저나 얜 뭐지. 까마귀도 아이들한텐 의외로 크고 힘도 좋은데, 아까 보니 까마귀가 퍼덕거리는 걸 붙잡고도 별로 버거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너 혹시 무반(武班) 집안 아이니?”
“으음? 음. 아버님께서 지금 절도사(節度使)이시긴 한데, 우리 집안은 원래 문반(文班)이랬어.”
절도사란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나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이르는 말이다.
아까 아버지가 북병영에 있다고 하더니 병마절도사였냐.
이 아이 아버지가 절도사라면 이 아이도 제법 지체 높은 집안 자식이란 뜻이었다.
‘궁에 중전마마를 뵈러 들어온 거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 무예를 익히지는 않아?”
“활쏘기랑 말 타는 거 정도는 배우지만…… 다들 글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하시지.”
“하긴 그렇겠구나.”
무반이고 문반이고 양반이라면 말타기와 활쏘기가 교양인 나라였지, 여기가.
애초에 출세하려면 대과(大科)를 통과해서 문관으로 시작해야 하고.
‘절도사 집안, 게다가 중궁전, 누나랑 같이 왔다고 했지. 그럼 혹시??’
“세자빈 후보인가……?”
중궁전에서 무반 집안에서 세자빈 후보를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었지, 분명.
“뭐?”
“꼬마야, 너 누나랑 같이 왔다고 했지?”
“또 꼬마야?”
“아무튼. 너희 누나 나이 몇 살이야?”
“어어, 열넷인데……. 왜?”
세자도 지금 열넷이니 나이도 적당하네. 지금부터 추진해서 열다섯쯤에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으로 들이면 좋을 나이였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여주 아냐?’
<이화의 연인>의 여주인공도 비슷한 설정이었던 거 같은데.
한동안 정신이 없어서 떠올리지 않았던 소설의 설정을 더듬어 봤다. 과거사까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주의 과거는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 아이의 누나가 여주인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도 떠올랐다.
“너 지금 나랑 같이 좀 가자.”
“어? 어딜?”
나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목적한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보통 책 빙의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원작을 내용을 기록하려 애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게 꽤 어려운 일이었는데.
일단 갓난아기부터 시작했고, 내가 종이와 붓을 잡고 낙서 비슷한 것을 하고 그걸 숨기는 것이 가능한 연령까지 자라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두세 살짜리가 붓 잡고 배우지도 않은 글씨를 써 봐라. 신동 소리 듣지.’
게다가 손의 소근육 발달의 문제로…… 연필도 아닌 붓으로 제대로 된 글씨를 쓰는 것은 나에게 너무 고난이도의 일이었다.
덕분에 지금 내 기억 속의 원작 소설은 드라마 설정과 뒤섞여 조금 뒤죽박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뭐가 어디 설정인지, 지금 여기가 어느 쪽 세계관인지도 헷갈렸다.
‘맞아. 일단 드라마 대본에선 분명 여주에게 동생이 있었어.’
함께 온 동생이 궁궐에서 길을 잃은 것을 안 여주가 동생을 찾아 헤매다 남주를 만나는 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드라마는 실질적 주인공인 여주의 시점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여주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다.
실제 사극을 봤다면 영상물이라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아쉽다.
그렇게 생각하며 동궁 쪽으로 뛰어가던 나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덕분에 날 따라 뛰어오다 내 등에 부딪힌 아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 왜? 다 왔어?”
“조용히 좀 있어 봐.”
“?”
나는 아이의 입을 막고 조용히 뒤로 잡아끌었다. 아이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내 말에 순순히 따랐다. 뛰어와서 그런가 아이의 체온이 뜨끈뜨끈했다.
기둥 뒤에 숨어 고개를 내밀자 바람에 날리는 분홍빛 꽃잎을 배경으로 선남선녀 한 쌍이 수줍게 아이컨택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남주 여주 아니랄까 봐 둘이서 한 폭의 그림 같은 첫 만남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사극 속의 한 장면 같은데.’
하긴 그게 그거지.
전생에 못 본 사극의 한 장면을 그렇게 보게 되다니 나쁘지 않군.
‘나 때문에 원작이 많이 어그러졌어도 역시 큰 줄기는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쨌든 둘이 만나게 되었으니 긍정적이었다.
문득 세자의 뒤쪽을 보니 늘 세자의 뒤를 따르는 송 내관이 나랑 비슷한 자세로 건물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우리는 동시에 검지를 입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자의 연애 사업에 집중했다.
‘와, 뭐야, 뭔데, 둘이 첫눈에 반함? 대본에서는 남주가 약간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감성이라 웃겼는데 우리 애가 그게 가능할까?’
남주라기엔 너무 찐 혈육이 되어 버려서 저들의 연애를 웃지 않고 볼 수 있을까 걱정됐는데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즐겨요, 이 순간.
팝콘을 씹고 싶지만 여긴 팝콘도 없고.
아쉬운 대로 아까 먹다 말고 챙겨 온 카스텔라를 꺼내 입에 물고 내 뒤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여주의 동생(추정)에게도 빵 한 조각을 넘겼다.
“이거 먹고 조용히 있어.”
“……응.”
말을 잘 들으니 좋군. 역시 애들한텐 먹을 게 최고야.
건물 뒤에 숨어 귀를 쫑긋 세우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소녀는 세자빈이 되고 싶지 않사옵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세자빈은 장차 국모가 될 자리이기도 합니다.”
아, 이 비슷한 대화가 원작에 있었던 거 같아.
“소녀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사옵니다. 하지만 소녀가 세자빈이 된다면 그것은 이루기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세자가 소녀에게 묻자 또 사르륵 바람이 불며 꽃잎이 화사하게 떨어졌다.
‘주인공 보정인가.’
내가 뻘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여주의 의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의술을 배워 사람을 구할 것이옵니다. 여인이라 하여 할 수 없다 하시겠습니까?”
오, 맞다. 여주는 이런 애였어.
양반가의 여식으로, 세자빈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지만 의원(醫員)이 되어 사람을 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것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한이 된 여주의 소망이었다.
이 시대에는 남녀가 유별하다고 해서 부인병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의술이 뛰어난 의녀들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 수가 적어 찾기가 힘들었으니까.
‘양반가 출신인 남자 의원들도 존재하는데 자신이 의원이 되는 게 뭐가 문제겠냐고 당차게 말하던 아이였지.’
아직 어린 여주는 실제로 구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의서들을 구해 외우고 약초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있었다.
의술을 가르쳐 줄 스승을 구하고 싶었으나 양반가 여식을 제자로 받겠다는 별난 의원을 찾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없는 데다가 아버지까지 멀리 외관직으로 나가 계시는 집안 사정상 여주는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다.
그런 여주에게 남주는 ‘그대가 더욱 마음에 든다. 그 당찬 면모도, 겁 없는 기개도. 내 세자빈이 되지 않겠는가?’ 뭐 이런 대사를 날렸었지.
‘음. 아니 우리 애가 그런 말을 할 성격은 아닌 거 같은데.’
게다가 지금 세자는 처음부터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아니, 그 말에는 틀린 것이 없습니다. 양반가 여인이 의원이 된다면 반가의 부녀자들도 의원의 진맥을 받는 것이 훨씬 수월해지겠지요. 총명하신 분이니 분명 가능할 겁니다.”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