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39)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39)화(39/326)
“너는 어찌 따라 나오려는 것이냐.”
“응. 그럼 지금 당장 아바마마한테 고할까?”
“끄응. 따라오너라.”
세자는 당연히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는 게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도 나름 절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뭔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내키지 않겠지만.’
내가 나가면 혹시라도 한 명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세자의, 미복암행(微服暗行)의 탈을 쓴 데이트 준비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늘 따르는 호위가 코치를 해 준 거 같긴 한데……
“옹주 자가의 준비가 더 철저하신 것 같습니다.”
“준비 좀 했지.”
생각시 복장을 하고 가이와 함께 나서는 나를 본 세자의 지밀 내관인 송 내관이 묘한 얼굴로 칭찬했다.
반면 나를 따르는 가이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옹주 자가. 관등일은 사람이 많아 번잡하고 위험하옵니다. 아직 어리신 옹주 자가께는 이르지 않을는지요.”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뭐.”
나는 일부러 세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오라버니랑 같이 갈 거야.”
“으음.”
질색할 줄 알았던 세자는 뜻밖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손을 잡았다.
아니, 데이트에 여동생을 데리고 나가다니. 따라가겠다고 달라붙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현대였음 장가가긴 글렀다, 너.
“이리 오라비와 함께 가고 싶다는데 어쩌겠느냐. 한 번도 궐 밖에 나가 보지 못한 것은 이 아이도 마찬가지이고…….”
“맞아!”
“자각관등(紫閣觀燈:자하골 창의문에서 보는 관등놀이)은 국도팔영(國都八詠:조선시대 정조가 시로 남긴 한양도성에서 보는 계절별 명승지)이 아니겠느냐. 내가 언제 또 시아와 함께 나와 같이 구경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고.”
창의문은 청계천과 반대편인 저어 뒤쪽에 있으니 그 말은 청계천으로 구경 나가는 우리랑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멀리서 보기만 하는 건 지루하겠지. 대신 오라비에게서 떨어지면 아니 된다. 알겠느냐?”
“응!”
결국 세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이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저…… 옹주 자가께서 혼자 사라지시지만 않으면 다른 걱정은 안 합니다.”
“송비랑 가이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당연하지 않사옵니까.”
송비랑 가이는 원래 같이 일하는 번이 아닐 텐데, 가이가 굳이 나를 따라 나오겠다고 비번도 버리고 나왔다.
둘 다 연등제를 구경을 할 거면 친구나 지인들과 보러 가고 싶었을 텐데 미안하네.
‘궁녀들도 휴가를 받을 수 있긴 하지만. 축제 맞춰서 나가 놀다 오긴 힘들고.’
내가 금방 지칠 거라며 말을 꺼내 오기까지 한 걸 보면 만반의 준비를 다 한 듯했다.
“과자는 챙겼어?”
“옹주 자가께서 분부하신 대로 챙겼습니다.”
나중에 지화와 수천에게 주기 위해 챙긴 것들이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비상식량도 되고, 안 생기면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일단 여기저기 주워듣고 다닌 바, 어제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 조짐은 없었다.
대전(大殿)까지 가서 확인하진 않았으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익숙한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없었으면.’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송비가 말고삐를 잡고 있는 가이에게 불안한 듯 물었다.
“옹주 자가도 말군(襪裙)을 입으셔야 하나?”
“아직 어리신데 괜찮지 않을까?”
“귀찮아. 안 입어.”
말군은 말 탈 때 입는 일종의 승마용 바지인데 다들 안 입고 말 잘만 타고 다닌다.
치마 입고 말 타면 속바지가 보인다고 반가의 여인들은 꼭 입어야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귀찮고 번거롭고 딱히 보기 좋지도 않고.
“나중에는 꼭 입으셔야 해요. 옹주 자가.”
“옹주 자가 아니고, 아기씨 해야지.”
“어휴. 예, 아기씨.”
“혼자 타셔도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응.”
나 말 탈 줄 아는 여자라고.
게다가 내가 타는 말은 국마장(國馬場)에서 고르고 골라 데려온 온순하고 똑똑한 아이라 솔직히 내가 말을 탄다기보다는 말이 나를 태워 주는 것에 가까웠다.
죽은 세자가 내 선물로 주려고 지시해 두었던 아이라고 했다.
“사람이 많아서 놀라지 않을까.”
“똑똑한 아이이니 괜찮을 겁니다.”
지밀나인으로 나보다 기마(騎馬) 경력이 긴 가이의 말에 송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선 시대에 말은 자가용 승용차 같은 것이라 상류층에선 여인들도 많이 타고 다녔고, 궁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가마는 높으신 분들이나 타는 거라 아무나 탈 수 없었고.
물론 말도 대부분 양반과, 예외적으로 기녀만 탈 수 있었다. 궁녀들이야 본래 신분상 양반이 아니어도 품계를 받은 사람들이고 왕족의 심부름을 다니는 몸이니 말을 탈 수 있는 이들도 많았다.
말군을 안 입고 말을 탄 여인을 기녀로 착각하고 폭행했다가 유배 간 사람도 있었다던가.
‘후기로 갈수록 여성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니 보이지 않게 된 거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연이 먼 이야기였다.
조용히 궁 밖으로 빠져나오자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와 세자만 신기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빼 들고 두리번거렸다.
‘민속촌 같은 느낌이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10명 가까운 인원이 우르르 다니려니 조금 번잡했지만 안전을 생각하면 소규모로 다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와 세자가 너무 어렸다.
날이 밝아서 조금 심심하지 않을까 했지만 관등놀이의 규모는 생각보다 큰 편이어서 민가에도 다들 마당에 장대를 세우고 등을 거는데 꿩 깃털과 색색깔의 비단을 늘어뜨려 낮에 보아도 제법 화려했다.
“저게 뭐야?”
“배 모양의 배등(船燈)입니다. 등의 모양이 다양하지요?”
화려한 등은 어디 사찰에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경쟁적으로 다양한 등을 올리고 깃발도 화려했다. 게다가 집집마다 가족의 수만큼 등을 단다니 대가족 시대라는 걸 생각하면 밝을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간은 밤에 궁 안의 누각에서 보아도 연등이 환하게 밝혀진 모습이 보이곤 했다.
“밤에는 불꽃놀이도 한다지?”
“그때는 들어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보고 갈래.”
원래 안 좋은 사고는 밤에 일어나거든. 일찍 들어갈 수는 없지.
물론 아무 일 없이 불꽃놀이를 보고 들어가는 게 베스트고.
내가 떼를 쓰자 가이가 곤란한 듯 세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저쪽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람이었다.
‘쟤도 밖에 나온 게 처음이니 어쩔 수 없지.’
약속 장소에 가 보니 이미 남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도 어린 오누이만 나올 수 없었는지 유모로 보이는 여인과 하인 하나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관등놀이가 밤까지 이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데이트……가 아니군. 생각해 보니.’
둘 다 혹을 하나씩 달고 있는 동반 육아 모임 아닌가, 이거.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동생을 데리고 나와 면목없다 생각했는데 옹…… 아기씨께서 같이 나오셔서 조금 안심했습니다.”
수천이 따라 나온 것 때문에 난처해하던 지화는 나를 보고 반색했다.
‘누나한테 말할 줄 알았는데 말 안 했나 보네.’
오랜만에 다시 본 꼬맹이는 나를 보고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지화의 안내에 따라 거리를 구경했다.
이미 등을 사거나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 번화한 것을 본 세자는 조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신기하신 모양입니다.”
“이리 혼잡한 풍경을 처음 봅니다. 시아야, 너도 놀라지 않았느냐.”
“응. 그럭저럭.”
이보다 더한 인구밀도를 심심치 않게 봐 온 터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옹주…… 아기씨께선 참 침착하십니다. 소녀의 동생도 조금은 침착해지면 좋을 텐데 부끄럽습니다.”
“아니 누님, 가만히 있는 나는 왜…….”
“자, 가자.”
수천이 불만을 토로할 틈도 주지 않고 지화는 동생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사람이 많으니 걸으면서 자연히 거리도 좁혀졌다.
세자와 지화가 은근슬쩍 나란히 걷고, 뒤에는 우릴 따르는 이들이 서니 자연히 나는 수천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저기.”
“응?”
“오늘 정말 나왔네요?”
“나온다고 했잖아.”
“응. 하지만 세자…… 저분이 못 나올 수도 있다고 누님이 그랬거든요.”
“아아.”
뭐, 못 나올 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동안 여기저기 뿌려 둔 뇌물(주로 먹을 거)이 많아서 사실 은근히 수월했다.
게다가 세자가 나가겠다는 것보다 내가 나가고 싶어 징징대는 걸 세자가 몰래 데리고 나간다고 하니 다들 안쓰러운 눈으로 못 본 척 눈을 감아 주기도 했고.
“헤헤. 다시 봐서 좋다.”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내 손을 잡았다.
허허, 어린아이가 참…… 세자보다 낫네?
‘저놈이 배워야 하는데……!’
앞에서 지화와 진지하게 의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저기, 곶감 좋아해요? 저 가게 곶감이 정말 맛있대요.”
이 꼬맹이도 이렇게 여자 환심을 사려 노력하는데.
타고나길 왕자로 태어나서 그런가, 노오력이 부족했다.
‘하긴 남주인데 내버려 둬도 연애는 알아서 하겠지.’
애초에 왕이나 세자에게 연애가 필요 없었다. 반강제적으로 혼인을 하고 아이가 안 생기면 후궁도 들이는 처지니.
“나 곶감 싫어해.”
“앗, 미안. 그렇구나.”
내가 곶감 먹고 피를 토한 이후로 궁에서 곶감은 금기란다.
하지만 아이가 그런 것까지 알 리도 없고, 나는 시무룩해진 얼굴의 아이를 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 쓰다듬어 주고 싶다.’
시무룩해진 걸 보니 정말 어린 시절 길렀던 시고르자브 종 강아지…… 그 강아지가 떠올라 귀여웠다.
죽은 남동생이 떠올라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나 약과 좋아해. 저기서 파는 거 같이 먹자.”
“정말?!”
시무룩해졌던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이고, 좋단다.
가이가 값을 치르자 우리는 나란히 약과를 하나씩 입에 물고 각자 손위 형제의 뒤를 따랐다.
등이 밝혀져 있는 주변은 온통 온갖 가판대가 서고 먹을 것도 구경거리도 많아 요란스러웠다.
“나 저거 살래.”
“어쩐 일로 이런 것을 다 고르십니까?”
내가 노리개를 고르자 가이가 의혹을 제기했다. 나는 좀 찔렸지만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왜?”
“눈이 높으셔서 왕실…… 아니 크흠, 아무튼 어지간히 귀한 물건이 아니면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차라리 그림이나 도자기에 더 관심이 많으시고.”
“진짜? 요?”
옆에 있던 수천이 신기한 듯 물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모처럼 나왔는데 기념품 정도는 가져가야지.”
“그렇습니까?”
“응.”
그렇게 말했지만 진실은 좀 달랐다.
‘돈이 될 만한 거…… 급할 때 여비로 쓰기 좋을 만한 작은 게 좋겠지.’
만약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이 둘에게는 도피 자금이 필요할 테니까.
아까 내가 들고 온 과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하인들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주인의 품성이 어지간하기만 하면 가노(家奴)들은 주인을 잘 배신하지 못하니 데리고 도망칠 거야.’
원작에서도 지화의 유모는 목숨을 바쳐 지화를 도피시키고 자신의 딸인 척 키운다.
수천의 뒤를 따라온 하인은 어떨지 모르지만…… 귀한 장손의 나들잇길이니 쓸 만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으리라 믿는 수밖에.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저 다들 어린 시절 즐거운 추억 하나를 남기는 거지.
오늘 이 불안이 그저 나 혼자만의 것이기를 기도하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