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4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41)화(41/326)
사월초파일은 당연하지만 음력이다.
양력으로 친다면 대략 5월 정도.
밤 외출을 생각한다면 아직 겉옷을 걸쳐야 하는 시기였으므로 가이는 내 겉옷을 따로 챙겨 왔다. 내가 나올 때 입고 나온 생각시 옷도 있었고.
그러니까, 이 아이에게 내 옷을 입혀도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 나이면 아직 성별 구분이 모호한 나이이니 겉보기에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테고.’
지금 내가 걱정해야 할 건 지화가 아니다. 지옥 끝에서도 살아 돌아올 생명력의 소유자인 주인공을 걱정하기엔 눈앞에 배드 엔딩이 확정된 애가 있었다.
“왜, 왜 이러세요. 누나.”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런가 분위기가 좀 더 묘했다.
“아기씨? 어쩌시려고요.”
“내 겉옷 더 가져왔지? 그거 줘.”
“네?”
나는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으며 손을 내밀었다.
“으앗?”
“그럴 때가 아니야, 너도 벗어, 얼른.”
“히익?!”
내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동공지진을 하는 꼬마의 등짝을 한 번 더 때려 주고 아이의 옷을 벗겼다. 어차피 속저고리에, 속치마에, 속바지까지 겹겹이 입은 상태인데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거 입어.”
“아니, 저…….”
“아, 역시 속치마도 입혀야겠다.”
“네?!”
속치마가 없으면 옷 태가 안 사는걸. 안에 입고 있는 바지가 밝은 색이라 다행이긴 한데 치마 밖으로 보이면 안 되지.
“아기씨. 옷 입으세요! 감모라도 드시면 어쩌시려고!”
완전범죄를 위해 속치마를 풀려는데 내가 아까 입고 나온 생각시 옷을 들고 온 가이가 얼른 내게 옷을 입혔다. 그리고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속바지와 속치마를 꺼내 수천에게 안겨 주었다.
아까 생각시 옷을 입었을 때 입을 속치마를 따로 챙기더라니 여기까지 들고 온 모양이었다. 역시 가이도 완전범죄를 추구하는 스타일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대충 내 뜻을 읽었는지 옷을 입힌 수천을 앉히고 머리도 풀어서 배씨댕기를 올리고 다시 묶어 주기 시작했다. 전문가답게 빠르고 꼼꼼한 솜씨였다.
‘잘 어울리네.’
키가 나보다 약간 크지만 체형이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니 내 옷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오늘 입고 있던 옷은 평소에 입는 내 맞춤옷이 아니라 밖에서 구해 온 옷이었기도 하고.
“이리하면 될까요?”
“응. 고마워. ……가이는 막지 않네.”
반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슬쩍 눈치를 보는데 가이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바쁘게 손을 놀렸다.
“소인이 옹주 자가를 모신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사옵니다. 말린다고 듣는 분도 아니신데 어찌하겠습니까.”
“미안.”
“결국 소인이 질 것이 뻔한데 시간이라도 아껴야지요.”
오랜 시간 함께해 와서 그런가, 역시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걸.
“그리고 옹주 자가께서 그런 분이시니 저희도 따를 수밖에 없고요,”
“내가?”
“언제나 어린 생각시들이 실수하는 걸 눈감아 주셨지요.”
“어리잖아.”
어린 생각시들이 내 시중을 드는 건 아니고 내 또래 놀이 동무로 지내는 아이들은 있다.
물론 놀이 친구라고 해 봤자 정신 연령 이전에 신분상 대등한 친구일 수가 없었지만.
너무 어려서 가끔 내게 이런저런 실수를 하곤 했지만 애들인걸.
들켰다가 상궁들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날 걸 생각하면 눈감아 줄 수밖에 없지 않나?
“시중을 들던 소운이 실수로 뜨거운 물을 흘렸을 때도 물이 튄 그 아이의 팔에 찬물을 부으시며 어서 의원을 불러오라 하셨지요.”
“나는 그때 안 데었고 소운이 데었잖아? 화상은 빨리 치료해야지.”
그럼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해?
“조생이 진지상을 쏟아 옹주 자가의 옷을 상하게 한 적도 있지요.”
“조생이 어릴 때 팔을 다친 적이 있어서 가끔 힘이 빠질 때가 있다고 들었거든. 진작 제대로 치료받았어야 하는데 의원 불러 준다고 하고 까먹었더라고.”
젊다 못해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왜 이렇게 깜빡깜빡하는지 원.
“생각시 하나가 밤에 울고 있으니 연유를 물어 의원을 보내 주신 적도 있지요.”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우는데 그럼 내버려 둬?”
안 그래도 어린 나이부터 부모랑 떨어져서 강제 취직한 애들인데.
“진 내관이 보관을 맡고 있던 도자기를 실수를 깨트렸을 때 옹주 자가께서 아끼시던 도자기를 대신 내주시고 감싸 주신 적도 있지요.”
“그거야…… 그게 처음이 아니니 끌려가서 두들겨 맞을까 봐 그랬지. 그 이후로 진 내관이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잖아.”
내명부도 그렇지만 내시부 군기도 빡셌다. 내가 그렇게 안 했으면 며칠 후 다리를 절며 돌아다녔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아낀다고 해도 그 도자기는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내 컬렉션에서 30번째쯤 될까 말까 하는 거였다고. 20위권부터는 곤란해.
‘그 덕분에 이렇게 몰래 놀러 나올 때도 협조적이기도 하고.’
이어지는 내 말에 가이가 내 손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죄인으로 끌려가는 저를 붙잡아 살려 주신 적도 있으셨지요.”
“내가? 언제?”
“아기씨께서 정말 아주아주 작으셨을 때 일이지요.”
아니, 진짜 아기 시절 얘길 하면 어떡해?
“……가이가, 잘못한 게 없으니 붙잡지 않았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티를 내도 될지 감이 안 잡혀서 모른 척하자 가이가 후후 웃었다.
“그럼요. 저희 주인인 옹주 자가는 그런 분이시지요. 그러니 아기씨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 저희는 그저 따를 겁니다.”
그렇다고 역적의 자식을 도피시키는 걸 도와도 괜찮나요.
‘만약에 들키면 옹주인 나는 어떨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무사하지 못할 텐데.’
결과적으로는 내 말을 따라 줄 거라는 자신은 있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걸 보니 오히려 미안해졌다.
“대신 옹주 자가의 신변만은 꼭 최우선으로 지켜 주셔야 합니다.”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은 알거든.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의 약속 장소로 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무서운 말씀 마세요.”
“걱정 마. 적아는 똑똑한 아이니까.”
내가 아닌 내 말(馬)을 믿으라는 말에 가이는 부정하지 않고 겉옷을 건넸다.
“어린아이이니 호패를 확인하지도 않을 테고. 하인 데리고 관등놀이 나온 양반댁 아기씨라고 적당히 둘러대. 오라비가 뱃놀이 중이라 보러 간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할 수 있겠어?”
“……네, 네!”
오늘은 사월초파일. 이날을 위해 요 며칠간 도성 안이 유등으로 환히 밝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시간에도 남대문을 오가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 수천의 말로는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유생들도 많다고 했으니 적당히 둘러댄다면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을 터.
‘여주, 지화도 비슷했지.’
소설에서 지화는 민가의 옷을 훔쳐 입고 유모의 딸인 척 도성을 빠져나갔다.
훔친 옷 대신 본인의 비단옷을 두고 왔으니 피해자는 어이없어했지만, 역당의 딸이 도망쳤다는 소문을 듣고 조용히 옷을 숨겼다. 괜히 잘못 엮여서 좋을 것도 없고, 밖에 입고 다닐 수는 없어도 예쁜 옷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비단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사치품이지.’
물론 가난한 평민이 잘못 처분했다가는 도둑으로 몰릴 가능성도 있었다. 도망친 노비라든가.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도 방 안에서 아이에게 설명했다. 하인이 듣지 못하도록.
“알았지? 옷은 가지고 가서 나중에 험한 길 나오면 갈아입거나, 몰래 팔아서 처분해. 아, 내가 가져온 과자도 가지고 가서 먹고.”
“네, 네.”
그리고 나는 오늘 거리에서 샀던 노리개 같은 가벼운 사치품들을 품에서 꺼냈다.
“앗.”
서둘러 꺼내다 보니 주머니에 있던 것들이 와르르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돈 될 만한 물건만 산 게 아니다 보니 어수선했다.
방 안이 조금 어두웠던지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대충 주머니에 욱여넣고 입구를 닫아 아이의 품에 넣어 주었다.
“내가 오늘 산 것들도 가져가서 필요하면 하나씩 팔거나 바꿔서 써. 하나같이 비싼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굶지 않을 정도는 될 거야.”
“네에…….”
“그리고, 행랑아범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인들도, 아는 사람이라 해도 완전히 믿어선 안 돼. 재물이든 뭐든 중요한 건 네가 꼭 들고 있어. 알았어?”
“……네.”
멍하니 대답하는 아이가 너무 기운이 없는 것이 걱정되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남대문 앞까지는 같이 가 줄게. 너무 걱정하지 마.”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너무 준비된 티가 났나. 근데 네가 그런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니다.
“어린 네가 뭔가 잘못한 건 없을 테지만, 역적의 아들이란 멍에를 쓰고 겪을 일들이 녹록하진 않을 거야. 최소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어디 멀리 도망가서 숨어 있도록 해. 그 후의 일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아.”
“…….”
어린 수천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러곤 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어떻게든 무사히 도망치는 것만 생각해.”
수천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제법 침착해 보였지만 그래 봤자 아직 일곱 살이었다.
역모가 뭔지는 알겠지, 하지만 아직도 피부에 와닿지는 않을 거다.
‘네 아버지까지 내가 어떻게 살리기는 어렵겠지만…….’
너는 도망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역적의 자식이라고 해도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7살이 된 남자아이가 끌려가서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죽었잖아.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렇게 알게 됐는데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괜찮아.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야.”
나는 겁에 질려 있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한양을 빨리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야.’
지화는 지금 남대문 성벽 위에 있으니 잘하면 우리보다 먼저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우선 이 아이가 빨리 원작 흐름을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마당으로 나서던 나는 수천에게 입고 있던 푸른 빛깔 겉옷까지 걸쳐 주며 물었다.
“너, 말 탈 줄 안다고 했지?”
***
남대문 앞은 오가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도성으로 들어오려는 사람과, 일찍 구경을 마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섞여 혼잡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어느 댁 아기씨인지 아직 어린데도 말 위에 제법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부모나 하인에게 안기거나 업혀 잠들어 있거나, 시끄럽게 칭얼대는 아이가 많아서인가 말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는 더욱 의젓해 보였다.
과연 양반은 양반인가.
“우리 딸도 좀 저렇게 얌전했음 소원이 없겠네. 어쩌면 그리 천방지축인지.”
“자네를 닮아 그런 걸 누굴 원망하는가, 그래?”
“뭐가 어째?”
남대문 앞에서 오가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파수꾼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말을 탄 아이 쪽을 힐끔대고 있었다.
저 어린 것도 양반이라고 성질만 부리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고, 어쩌다 이런 날 번에 걸려서는.”
“잘 살펴. 놓치면 경을 치는 건 우리 아닌가.”
파수꾼들이 피로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역당의 식솔들이 도주했으니 검문을 철저히 하라는 명이 내려왔지만 용모파기도 없이 이 많은 사람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저기 말 타고 있는 아기씨는 아니겠군.’
듣기로 역당의 여식 쪽은 열네 살이라 했으니 일단 나이가 맞지 않고, 아들 쪽하고는 나이가 좀 비슷해 보이지만 저 아기씨는 아무리 봐도 여자아이였다.
게다가 분명 하인만 데리고 나갔다고 했는데, 저런 좋은 말을 갑자기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파수꾼 생활이 벌써 몇 년 차인데. 사실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말만 봐도 대충 각이 나왔다.
저건 척 봐도 훨씬 더 높으신 댁 귀한 아가씨였다.
괜히 건드리지 말고 보내야겠다고 통과시키려는데 뒤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저, 저깁니다. 저기 치마를 입고 말을 탄 아이가 도망친 역적의 아들입니다!!”
금부(禁府)의 나장(羅將)과 함께 있는 노비 행색의 사내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막 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말을 탄 그 귀한 아가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