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44)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44)화(44/326)
“오라버니.”
“말을 탄 여자아이 이야기를 듣고 너일 거라 생각은 했다만 정말 너더구나. 어디 상한 곳은 없는 것이냐?”
“응. 괜찮아.”
나는 멀쩡하다는 걸 보여 주려 말에서 내렸으나, 나도 모르게 주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어?”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놀란 세자와 달리 차분히 나를 안아 든 가이가 내 다리를 주무르며 세자를 안심시켰다.
“긴장이 풀리신 게지요. 아무리 아기씨께서 담대하셔도 말에서 떨어질 뻔하고 낯선 곳에서 혼자 헤매셨는걸요.”
“응. 나 목말라.”
“어서 가자.”
내가 쓰러지는 순간 같이 동요했던 파수꾼들도 곧 가이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말에 오르는 나를 보곤 적잖이 안심한 눈치였다. 그야 뒤탈이 무서웠겠지.
“많이 놀라신 듯하니 어서 댁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파수꾼 하나가 조심스레 귀가를 권했다.
아까의 소란과는 별개로 여전히 문은 북적거렸고, 파수꾼들은 자신들이 찾아야 할 사람이 이미 탈출한 것을 모르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지화는 어떻게 된 걸까.’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세자가 이렇게 있지는 못했을 것 같지만.
우리는 남대문을 떠나,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세자는 나와 함께 적아를 타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대해 물었다.
밖에서는 할 수 없는 대화고, 궁에 들어가서는 더욱 꺼내기 어려운 화제였던지라 물어볼 타이밍은 지금뿐이었다.
“하인 하나가 와서 도망치라고 하더구나.”
“어느 하인이?”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도성 밖으로 도망치는 것은 확인하였다.”
나는 나대로 이쪽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어찌 된 일일까.”
“김선익 대감은 함경도 절도사에, 아바마마께서 그 여식을 세자빈으로 삼으려 하실 만큼 깊이 신임하시던 인물일 텐데 갑자기 역모라니.”
애초에 함경도 병마절도사라는 자리가 왕의 신임이 없으면 앉기 어려운 자리였다.
그 자리를 거친 후에야 흔히 말하는 대장(大將)이라 불리는 직책으로 갈 수 있을 정도였고, 게다가 딸이 세자빈이 된다면 이후 승진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도망치는 것부터 도왔어?”
“설령 역모를 꾸몄다 한들 아직 어린 자식들이 무슨 관계가 있었겠느냐. 게다가 역적의 딸이면 관비가 될 터이니…….”
“그래, 잘했어.”
세자라고 맘이 편하진 않겠다 싶어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칭찬해 주었더니 굳었던 얼굴에 흐릿하게 웃음기가 어렸다.
“역시 내 맘을 알아주는 건 시아밖에 없구나.”
칭찬해 줬다고 말이 과한 거 같지만 얘도 속이 편치 않겠지 싶어 괜히 나를 꼭 끌어안는 걸 봐줬다.
아마 세자도, 이상할 정도로 선뜻 세자빈이 되겠노라 나서는 집안이 없는 자신의 현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알고 있겠지.
‘피곤하다.’
오늘 내내 긴장하고 있어서일까. 지금 한창 도피 중인 지화와 수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무사했으면 좋겠다.’
강아지같이 웃던 어린아이.
먹을 거랑 옷이랑 도피 자금으로 쓸 물건들까지 바리바리 챙겨 줬는데 어디서 굶지나 말았으면.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화한테는 과자 말고는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는데 잘 도망갔겠지? 주인공이니 오히려 너무 변수를 주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관여하지 않았는데.
둘 다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죽지 않고 살아남길.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스르륵 내려가며 의식이 흐려졌다.
오늘은 진짜 피곤했다.
***
“아?”
“옹주 자가?”
“우음.”
조심스러운 가이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익숙한 내 방이었다.
세상에, 언제 돌아왔지? 중간 과정이 기억에 없었다.
‘하긴 어린아이에게는 좀 빡센 하루였나.’
노곤한 몸에 감기는 포근한 이불의 감촉에 이대로 다시 눈을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결국 목이 말라 일어나기로 했다.
내가 자리끼 쪽으로 손을 뻗자 가이가 물을 따라 건넸다.
“나 그대로 잠들었었어?”
“예, 세자 저하께서 궁까지 품에 안고 오셨답니다. 곤하실 터이니 좀 더 주무시지요.”
세자가 안고 왔다고? 뭔 일이래.
‘하긴 세자도 이번 일은 충격이 컸을 테지.’
내가 예전에 성원 세자와 친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도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자신과 가까운 주변 사람이 죽거나, 불행해지는 게.
‘……거기에 내 지분도 좀 클 거 같군.’
새삼스럽지만 쫌 미안한데. 나중에 카스텔라라도 만들어 줘야겠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자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세자 저하는 지금 어디 있어?”
“환궁하시자마자 의관을 정제하시고 역모에 관한 일로 대전에 드셨사옵니다.”
“음.”
창가를 보니 날이 어스름한 것이 아직 새벽이었다.
“……가이는 안 잤어?”
“뒷정리는 제가 해야 안심이 됩니다.”
하긴 일단 몰래 나갔다 왔는데 나는 잠이 들어 버리고 세자는 정신이 없고.
“가이, 고마워.”
“옹주 자가께 상찬을 들을 만한 일은 아니옵니다.”
내가 품에 꼭 안기자 가이도 싫지 않은 듯 나를 토닥였다.
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저 좋은 날이었을 텐데.
그런데 진짜 어떻게 된 걸까.
‘좌상도 없는데 누가? 왜?’
어제 일에 대해 자세히 알려면 아마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세자도 한동안은 바빠질 테고 나와 둘이 몰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긴 어려울 거다.
아마 세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앞으로는 자연히 그렇게 되겠지.
‘나도 몇 년 안에는 혼인해서 궁을 떠나게 되려나. 요즘 분위기를 봐선 혼인은 일찍 시키더라도 정식으로 출궁하는 건 훨씬 뒤로 미룰 것 같기도 한데. 그럼 그 둘이 재회하는 것도 볼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하기로 세자와 여주는 어린 시절 아련하게 헤어지고 어른이 될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
‘드라마로 봤다면 흥미진진했겠지.’
어린 아역들 파트가 끝나면 화면이 페이드 아웃되며 성인 배우로 바뀌고 배경에 애절한 OST가 깔리겠지. 그리고 성인이 된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차회 예고로 뜨려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는 실제 상황이었다.
드라마였다면 길어야 일주일만 기다리면 알 수 있었을 두 사람의 재회는 리얼타임으로는 최소 몇 년 후에야 이루어지겠지.
‘게다가 역모가 실제로 발각된 거면, 음. 사람이 많이 죽고 다치겠지.’
이런 종류의 역모 사건은 보통 한두 명이 얽히는 게 아니니 아마 지화 남매가 아니더라도 어제부터 일상을 잃은 사람이 벌써 여럿 생겼을 건 분명했다.
물론 나야 반역이 성공하면 가장 크게 피해 볼 사람 중 하나이니 무고하게 엮인 사람들 외엔 동정해 줄 처지가 아니었지만.
게다가 당장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가이. 우리 나갔다 온 거 들켰어?”
반역 때문에 경계가 강화되었으니 혹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들키지 않았을까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아니,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말을 해 줘. 왜 거기서 뜸을 들여.
망설이던 가이는 조금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옹주 자가께선 한동안 대전으로 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 그야 그렇겠지?”
역모 때문에 난리인데 내가 대전까지 찾아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세자라면 모를까.
‘소설에서는 안 들켰는데 나라는 변수 때문에 들켰을 수도 있으려나.’
원작에서는 왕이 아직 어린 세자가 불안해할 것을 염려해 역모 사실과 지화의 집안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세자에게 알려 주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전할 생각이었으나 세자가 눈치채고 밤중에 찾아가자 오히려 기특하게 여겼다는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세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내가 두려워한 대로, 이야기는 예정된 줄거리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둘 다 무사히 도망치고 있을까.’
결국 그대로 아침은 밝아 왔고 뒤늦게 몸을 닦고 몸단장을 하던 나는 문득 뭔가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없어……?”
늘 목에 걸고 다녔던, 죽은 성원 세자가 강무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준 옥가락지가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이, 가이!”
“무슨 일이시옵니까, 옹주 자가?”
“내 옷 갈아입힐 때 가락지 못 봤어?”
“가락지라 하심은…… 아니요,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내가 잠이 든 채 처소에 돌아왔을 때 내 겉옷을 벗긴 것은 가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이를 포함해 내 시중을 드는 궁인들은 다들 내가 성원 세자의 유품인 옥가락지를 애지중지 목에 걸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입고 나갔던 옷은?”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곧 가지고 오겠사옵니다.”
장 안에 숨겨 둔 보따리를 꺼낸 가이가 세심하게 옷을 뒤졌으나 가락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방 안도 샅샅이 뒤졌으나 보이지 않았다.
‘설마 어제……?’
생각시 옷을 평복으로 갈아입을 때만 해도 분명 옥가락지가 옷 속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니 잃어버린 건 그 이후겠지만…… 짚이는 곳이 너무 많았다.
종일 저자를 돌아다녔으며, 내 옷을 벗어 수천에게 입히고, 적아가 놀라서 날뛰기도 하고, 남대문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옷 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니 쉬이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어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어제 그 민가에서 옷 갈아입을 때 흘렸을 가능성도 꽤 높은데.’
설령 끈이 풀렸다 해도 옷 속에 있었을 테니 잃어버렸다면 역시 옷을 벗었을 때가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그곳에 다시 찾아갈 수는 없다.
어제 그 하인 놈이 거기서 저희 도련님과 함께 그곳에 있던 일행이 있었다고 고해바쳤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갔다가 이상하게 얽히면 곤란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적아를 난동 부리게 만든 그 하인은?”
“염려 마십시오. 그자가 입을 열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생각나서 묻자 가이가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오싹해?
뭔데,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 협박했어?
‘어제 적아의 뒷발에 차이기는 했는데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적아는 원래 군마로 쓰기 위해 키우던 말로, 머리도 좋지만 피지컬이 뛰어난 아이였다. 거기에 차였으니, 아무리 자업자득이라 해도 안 다쳤을 것 같지는 않은데…….
궁금하긴 했지만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아 나도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지금 가이는 내가 가락지를 찾으러 가겠다고 나설까 봐 긴장한 눈치였고.
‘싸구려라고는 해도 옥가락지이니…… 누군가 발견했다면 좋다고 주워 갔겠지.’
게다가 만약 남대문 같은 데서 잃어버렸다면 밟히거나 깨져서 이미 형태도 남아 있지 않을지도.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다녔더니 이렇게 잃어버리는구나.
하긴 세자가 나에게 맡기고 간 이유도 비슷했겠지.
싸구려 옥이라 흠도 있는 걸 매일 만지작거렸는데 없어지고 나니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옥가락지를 잃어버려서일까, 적아가 보고 싶어졌다.
어제 제대로 들어가는 것도 못 봤으니.
‘그 정도는 가이도 뭐라고 안 하겠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가이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옹주 자가?”
“적아나 보러 갈까 싶은데.”
“적아도 지쳐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러니 가 봐야지. 다른 데는 가지 않고 적아만 보고 돌아오자. 응? 적아도 어제 갑자기 너무 돌아다녀서 놀라지 않았겠어?”
내가 그리 말하자 가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 그러하시다면 빨리 다녀오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응. 사복시에 갈 테니 간식 좀 챙겨 줘.”
솔직히 궁 안이 살얼음판이니 한동안은 적아를 보는 것 외에는 낙이 없을 거 같았다.
나는 간식을 챙겨 사복시로 향했다.
사복시(司僕寺)는 왕이 타는 수레, 말 등을 관리하는 부서인데 적아도 이곳에 맡겨 돌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적아를 아껴도 내궁에 마구간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안으로 들어서자, 자주 찾다 보니 이제는 내가 와도 놀라지도 않는 사복시 서리들이 익숙한 듯 고개를 숙였다.
적아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알고 있으니 안내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처음 보는 사내가 적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는 겸사복 복장의 사내도 함께 있는 걸 보니 신분이 불분명한 자는 아닐 듯했으나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 말도 전하의 군마인가?”
“아닙니다, 옹주 자가의 말입니다. 성원 세자께서 생전에 옹주 자가께 선물하겠다고 하신 말이지요.”
“……훌륭한 말인데 아깝군.”
시비 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