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46)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46)화(46/326)
“옹주 자가!! 정신 차리시옵소서!!”
아, 가이 목소리다. 벌써 일어날 시간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다급하게 날 부르지.’
피곤한데 더 자겠다고 하면 안 될까 고민하는데 낯선 남자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옹주 자가!!”
순간,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과 함께 눈을 뜬 나는 동시에 지금 상황을 깨달았다.
도중에 정신 차린 척하면 되겠지 했던 나는, 아무래도 진짜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아닌가, 나 진짜 잠든 건가? 그 상황에서 진짜 잠이 든 거면 그게 더 대단한데.’
물론 어제의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일을 겪었으니 몸이 못 견딜 법했다. 말들이 난리를 치고 낯선 아저씨 수염을 뽑아 손에 쥔 상태였지만!
‘나 실은 충격을 많이 받았나.’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 대한 고찰은 둘째 치고 일단 지금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내 건강에 민감한 왕실 사람들을 더 이상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가이?”
“옹주 자가, 정신이 드시옵니까?”
“응.”
울 것 같은 얼굴의 가이도 꼴이 말이 아니다. 아까 말들이 난리 칠 때 나 말고도 다들 흙바닥을 굴렀나 보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니 내 머리 바로 위에는 아까 그 겸사복 아저씨의 얼굴이 있었다.
나 왜 아직도 이 아저씨한테 안겨 있냐.
정확히 말하면 안전하고 정중하게 들려 이동하고 있는?
덕분에 여전히 수염이 뽑힌 곳이 아주, 훤히, 잘, 보였다.
‘아으흑. 세상에 저거 어떡해.’
내가 저지른 본의 아닌 범죄 현장이 눈에 들어오니 다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으아아, 미안하다악!!!!
수염이 뽑힌 턱밑이 빨갛게 된 걸 보니 엄청 아파 보여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데 그걸 다른 의미로 오해했는지 걱정에 박차를 가해 버렸다.
“괜, 괜찮으시옵니까?”
“아니야. 괜찮아. 저기…….”
“옹주 자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던 참에 내의원에 도착했는지 놀란 의원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옹주 자가?!”
“옹주 자가!!”
“아…….”
독 곶감 먹은 이후로 내의원에 있는 이 의원 저 의원에게 고루고루 진맥을 받아 봤던지라, 익숙한 얼굴의 의원과 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진맥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아, 조금 놀랐나 봐.”
좀 굴러다닌 기분인데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긁힌 데도 없네.’
내의원이 있는 궐내각사는 사복시와 가까운 편이니 아마 내가 의식을 잃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듯했다.
진맥을 하는 동안 가이와 겸사복 아저씨는 심각한 얼굴로 의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으니 두 사람 다 진정 좀 하거라.”
무서워서 제대로 진맥하겠나.
가이는 그렇다 치고 이 아저씨는 또 왜 이래.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니 나를 못 지켰다고 벌을 받지는 않을 텐데, 의외로 정이 많은가 보다.
‘어제 날 도와준 것도 그렇고, 어린아이에게 약한 사람인가.’
아무튼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진맥을 마친 내의원의 의원들은 내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너무 놀라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먹고 푹 쉬라는 진단을 내렸다.
괜찮다는 의원의 말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겸사복 아저씨는 후다닥 내의원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 고맙단 말도 못 했는데.’
이후로는 땅에 발을 붙일 틈도 없이 내 처소로 운반당했다.
덕분에 어제 일로 인한 피로는 적당히 묻어 버리고 따뜻한 물에 목욕한 후 노곤노곤해져서 다시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나 궁녀들의 극성스러운 보살핌을 한 몸에 받으며 금수저의 삶을 만끽하던 그날 저녁,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나를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늘 일을 들었나 보네.’
역모 때문에 한동안은 나를 찾진 않을 것 같았는데.
역모 하면 아무래도 사람도 좀 상하고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이어지니 어린아이를 가까이하는 건 정서상 꺼려지는 법 아닌가.
하지만 놀라서 기절했다는 얘길 들었을 테니 그냥 넘어가진 못하겠지.
‘심신이 고단하니 힐링도 필요할 테고.’
나는 멀쩡하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 얼굴 근육을 풀다, 피부 미용의 필요성에 대해 잠시 고민에 들어갔으나 금방 포기했다.
‘아직 한창 어린 나이인데 이 말랑한 피부를 뭘 굳이 관리해.’
슬슬 오겠거니 싶어 처소 밖으로 나서자 마침 저 멀리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집단이 보였다.
“아바마마!”
“나와 있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덥석 안기자 지친 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지쳐 보이는 데도 왕은 나와 눈높이를 맞춘 채 내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조심스레 안아 들고 내 등을 토닥였다.
“괜찮은 것이냐. 놀라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언제나 아비가 네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아니 된다. 옹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윤 숙의에게 면목이 없지 않겠느냐.”
“예, 아바마마.”
지쳐 있는 왕에게 안긴 채로 등을 토닥여 주다 고개를 드니 뒤에는 마찬가지로 지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는 세자가 있었다.
‘오랜만.’
손을 까닥까닥 흔들어 주니 피식 웃는 것이 보였다.
‘상태를 봐선 몰래 나갔다 온 게 들키진 않은 거 같은데.’
그리고 그런 세자의 뒤로, 아까 본 겸사복 아저씨가 서 있었다.
수염이…… 반쯤 뽑힌 상태 그대로.
“아…….”
“왜 그러느냐?”
내가 이상한 소릴 내자 의아해하던 왕이 내 시선이 겸사복에게 가 있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삼켰다.
‘흑흑. 웃긴가요.’
물론 저걸 당한 게 본인이 아니니 웃기겠지!
여기서 웃을 수 없는 것은 피해자인 겸사복과 가해자인 나뿐이었다.
“오늘 성윤이 너를 구해 주었다지.”
“성윤?”
“성 겸사복 말이다.”
아, 저 아저씨 이름이 성윤이었어?
‘근데 왕이 이름도 아는 사이야?’
내가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왕은 겸사복 아저씨를 치하했다.
“자네가 없었다면 옹주가 큰일을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네.”
“소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사옵니다. 오히려 옹주 자가를 놀라게 하셨으니 죄스러울 따름이옵니다.”
“아니다. 역도의 잔당들이 옹주를 상하게 할 뻔한 것을 자네가 구하였다는 것 정도는 안다. 과인도 아비인데 어찌 고맙지 않겠느냐.”
“황공하옵니다. 전하.”
“혹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그저 한동안은 마음 편히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한가…….”
뭐야, 뭔데.
이거 분위기가 아무리 봐도 그냥 겸사복이 아닌데???
“한동안 겸사복으로 지내 보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거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리고 그 수염은 정리를 좀, 하는 게 좋겠구나.”
“예, 전하.”
겸사복 아저씨가 물러나고 부왕과 세자는 안으로 들어가 나와 함께 차를 마시며 다시 한번 다친 곳은 없는지 내 안부를 살폈다.
덕분에 정작 나는 겸사복 아저씨에게 뭐라 말도 못 붙여 보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흑흑 미안해.
나는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며 겸사복 아저씨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 겸사복은 어떤 사람이옵니까?”
“세자가 중히 쓰길 바랐건만 한동안은 어려울 듯하구나.”
“?”
뭐야, 가르쳐 줄 것도 아니면서 왜 내 앞에다 불러다 놨어.
물론 날 구해 준 걸 내 앞에서 제대로 치하해 주려고 불렀겠지만.
‘아직 어린 나한테는 말 안 해도 세자는 뭔가 알 거 같은데.’
어쨌든 내 임무는 힐링이었으므로 왕의 옆에서 적당히 어깨를 토닥여 주며 세자의 안색을 확인했다.
쟤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안색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지화 남매는 붙잡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군.’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만, 전개상 도망쳤을 거란 확신은 들었다.
***
세자와 직접 만나 지화 남매와 겸사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무슨 친남매 간에 대화 좀 나누는데 이렇게 비밀 접선하듯이 어려울 일인가 싶지만 세자의 주변에는 워낙에 사람이 많았고, 무엇보다 아주 바빴다.
엄청 바빴다.
평소에는 강학 중에 내가 조용히 구경하고 있어도 괜찮았다면 이번에는 역모 뒤처리라는 즐겁지 않은 실무를 배우는 데 바빠서 내가 끼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이를 포함한 내 궁인들이 안정해야 한다며 나를 방에 가둬 두고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만 잔뜩 먹이는 바람에 처소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이러다 소아 비만 된다고!’
내가 먹는 음식들은 만들어 온 나인들과 지밀나인들이 내 앞에서 기미(氣味)를 한다.
원래 정해진 법도는 아니지만 그 곶감 사건 이후로 그렇게 됐다.
이렇게 말하면 다 같이 먹고 살이 찔 거 같지만 방에서 뒹굴며 놀고먹는 나와 달리 다들 먹고 일하러 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나만 포동포동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물론 본래라면 아직 한창 먹을 나이이긴 하지만, 잘 자라지도 않는데 먹으면 그게 다 어디로 가겠는가.
“아기씨. 좀 더 쉬셔야…….”
“그만! 과자 만들러 갈 거야!”
며칠 만에 겨우 밖으로 나온 나는 본래 내가 먹었어야 할 당 덩어리, 아니 고열량의 간식을 만들어 폐인 같은 안색의 세자를 찾아갔다.
저 까칠한 놈은 본인이 신뢰하는 인물이 만들어 온 음식이 아니면 쉽게 입에 넣질 않다 보니 간식은 주로 내가 만든 걸 즐겼다.
덕분에 동궁전 궁인들은 세자가 피곤해서 예민해질 때면 슬금슬금 내 처소를 찾을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처소에 반감금 상태라 찾아오지도 못하고 애만 태운 모양이었다.
세자가 나와 간식을 즐기며 스트레스 해소를 한다는 걸 아는 이들은 다과상 세팅을 마치자 적당히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구나.”
“응.”
“네가 만든 거지?”
“당연하지.”
세자는 내가 가져온 꿀을 뿌린 푸딩부터 먹어 치우며 내 의문을 풀어 주었다.
참고로 푸딩은 이름 짓기 귀찮아서 탱글이라고 불렀더니 세자는 푸딩을 명사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이것, 저것, 그것 등의 지시대명사로만 칭하고 있었다.
나약한 녀석 같으니.
“그럼 그 둘은 그대로 종적이 묘연한 건가.”
“그래. 한때 세자빈이 될 수도 있었던 이가 이젠 역도의 딸로 쫓기게 되다니 얄궂은 일이구나.”
“마음에 든 거 같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며 눈치를 살피자 세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마음이 맞았다고나 할까. 의서에도 해박해서 말이 잘 통했거든.”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여전히 의서에 관심이 많네.”
“알아 두어 나쁠 것은 없지.”
하긴 중전도 병약하고.
내가 먹은 독은 여전히 무슨 독인지 알 수조차 없으니 어의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쨌든 종적이 묘연해진 데다가 이제 세자빈이 될 수 없는 신분이 된 사람 이야기를 계속하기도 뭐해서 화제를 바꿨다.
‘물론 여주니까 돌아오겠지만.’
당연히 내가 꺼낸 화제는 성윤 겸사복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그에 대해 물어볼 걸 예상하고 있었는지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뜸 이렇게 물었다.
“혹시 체탐인(體探人)이라는 걸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