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4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47)화(47/326)
“들어 본 적은 있는데.”
체탐인은 조선 시대에 국경을 넘어가 적국의 동태를 살피는 첩보원을 이르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밀정(密偵), 스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는 당연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이었고. 주로 여진족이라든가, 왜(倭)라든가?
‘아, 여긴 여진족이 아니었던가?’
내 대답이 의외였던지 세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는 그런 것을 대체 어디서 듣는 것이냐.”
“몰라.”
어디서 듣긴, 예전에 사극에서 봤다.
주인공이 전옥서(典獄署:교도소) 다모(茶母)로 시작해서, 체탐인이 되더니, 나중엔 외지부(外知部:변호사)가 되는 사극이었지.
‘세종 때 만들어져서 활약했지만, 성종 때 여진족이 좀 잠잠해졌다고 해체했다든가 줄어들었다든가. 그 덕분인지 이후에 다시 여진족의 침략이 빈번해졌다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여긴 아직 있나 보네.’
하여간 성종, 과부들 생계를 이어 가기 힘들다고 신하들이 다들 반대하는데도 굳이 과부재가금지법(寡婦再嫁禁止法)을 만들어 몇백 년간 수많은 여인들을 괴롭힌 악법 폐습의 근원답게 한 가지만 하지 않았다.
‘부디 이후 조선 땅에서만 여자로만 100번쯤 환생해서 기녀, 첩, 과부로 고루 살며 본인이 만든 법으로 받는 고통 모두 거치고, 열녀문 세우겠다고 시댁 식구들한테 생명을 위협받는 삶도 몸소 겪었길.’
성종(成宗)이란 시호(諡號)는 법전을 완성하고 제도를 정비한 왕한테 붙는 시호다.
당연히 이쪽 세계관에도 경국대전을 완성한 성종(成宗)이라는 동일한 시호의 왕이 존재했지만 그 성종과는 다른 사람이라 그런 악법은 없었다.
여인의 정조(貞操)관념에 대해서야 여전히 시끄러운 편이긴 하지만 재혼을 금지하지는 않으니까.
참고로 과부재가금지법에 이어 서얼 과거 응시 금지도 성종이 했다. 후궁도 많았던 놈이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간 여자 정조에 관심이 지대하던 놈들은 꼭 처첩이 많던데.
좋아하던 여자가 과부였는데 딴 남자 첩으로 들어가기라도 했나?
첩 자식 차별하고 싶으면 차라리 첩 들이는 걸 금지하든가 불이익을 주든가 할 것이지 뭐 하는 짓인지.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럼 그 겸사복은 체탐인 은퇴한 거야?”
“음, 수년간 국경지대를 오가며 고생했다고 하더구나. 예전에는 몇 년이나 돌아오지 못해 다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돌아온 적까지 있다고 들었다.”
“오, 몸놀림이 심상치 않다 했더니 경력이 남다르네.”
“험지에서 고생을 했을 터이니 이제는 현역 은퇴하고 싶을 만도 하지. 전에 몇 년 만에 살아 돌아왔을 때 은퇴할 줄 알았는데 다시 국경으로 갔다고 들었거든. 안정적인 생활을 원할 때도 되었겠지.”
“그래서 겸사복인가. 하지만 겸사복은 체아직(遞兒職) 아냐? 더 좋은 데는…… 음. 딱히 없나.”
체아직은 쉽게 말하자면 비정규직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겸사복은 7년 만기에, 다른 자리로 영전(榮轉)도 가능하고 잘하면 종 3품까지는 올라가니까 꽤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매년 시험 통과해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지만.
놀랍게도 궁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는 비정규직이 꽤 많더라. 심지어 무급직도 있음.
“목숨을 걸고 국경을 정탐하는 체탐인에게 설마 돈을 아꼈겠느냐. 은퇴하고 싶어 하니 우선 겸사복으로 붙잡아 둔 게지.”
“그럼 그냥 은퇴하게 해 주지?”
“능력이 아깝지 않으냐.”
하여간 권력자들이란 신하들이 능력 있으면 졸기(卒記, 실록에 남은 망자에 대한 평가기록. 세종대의 일 잘하는 신하들은 사직서를 내도 반려당하고 사초에 졸기가 남을 때까지=죽을 때까지 일해야 했다고 한다.) 때까지 부려 먹으려고.
‘그래야 백성들이 잘 사는 거 같긴 하지.’
너무 블랙기업 같지만.
그리고 블랙기업에서 가장 굴려지는 자리 중 하나인 세자는 암울한 얼굴로 내가 만든 카스텔라를 우물거렸다.
“역모에 관련된 이들은 이제 대부분 추포되었고 그날과 같은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거라. 도성 안 민심도 추스를 때고.”
저 말은 추포(追捕:체포)가 완료되었다는 뜻이지 추국(推鞫:죄인을 신문하는 일)이 완료되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세자 저하 젊은 나이에 벌써 눈 밑에 기미가 생긴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않으냐.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 겨우 잠이 드니.”
세자 자리 너무 빡세다.
“내가 세자가 되고 나니 예전 형님께서는 어떻게 나나 너를 보러 시간을 내셨는지 신기할 지경이더구나.”
“……성원 세자 오라버니는 세자 저하처럼 완벽주의자가 아니었을걸.”
“내 어디가 완벽주의자란 말이냐.”
“성격이. 그리고 성원 오라버니는 날 때부터 원손(元孫:왕세자의 맏아들)이었고, 아바마마께서 보위에 오르시며 원자(元子:임금의 맏아들)가 되고, 걸음마 시절에는 이미 세자였다고. 어릴 적부터 배워 온 양이 다른데 당연하지.”
“그건, 그렇구나.”
얘가 정신이 없구나. 없을 수밖에 없지만.
“게다가 잊고 있는 거 같은데 오라버니 아직 열네 살이고, 우리 기억 속 큰 오라버니는 스무 살이라고.”
“그래. 비교하기에는 맞지 않지.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그야 그렇겠지.”
카스텔라를 쉬지 않고 먹고 있던 세자는 무슨 생각인지 또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반역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할 놈은 했겠지.”
“시아야아.”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세자는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성원 세자도 나와 대화를 할 때면 저랬었지.
“쓸데없는 생각 말고 건강이나 챙겨. 하나뿐인 전하의 적자(嫡子)가 세자가 된 게 맘에 안 들면 대체 어쩌겠대? 설마하니 배다른 동생들 독살하려는 놈이 좋다고? 제정신 아닌 놈들이야.”
“……네 말은 언제나 명료해서 좋구나.”
의기소침해진 세자를 위로하며 성원 세자를 떠올린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한 번은 찾으러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
물론 내 측근들은 모두 반항했다.
“아아니, 옹주 자가. 대체 이런 때에 또 어딜 가시려고요.”
“가락지 찾으러. 남대문 근처라도 한번 가 보려고.”
“그건…….”
이미 많이 늦었을 거라는 건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번은 가 봐야 했다.
가이와 송비는 내 말에 난처해하며 어떻게든 나를 막고 싶어 했다.
궁 안에 왕족이라도 많으면 모를까 하나뿐인 옹주가 대낮부터 안 보이면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최근 나는 처소에서 거의 나서질 않고 있었고.
부왕도, 세자도, 중전도 한 번씩은 내 상태를 확인하려 나를 불렀으니 한동안은 나를 찾지 않을 거다.
“아바마마와 세자 저하는 바빠서 나를 찾지 않을 거야.”
“중전마마께서 찾으실지도 모르지 않사옵니까.”
“오늘 아침에 뵙고 왔잖아? 궁 안 분위기가 이렇게 안 좋은데 굳이 또 나를 찾지는 않으실 거다.”
중전은 공적인 행사가 있거나 내게 뭔가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가 아니면 나를 잘 부르지 않았다. 지금의 적당한 거리를 서로 편하게 여기고 있다고나 할까?
그 외에는 세자와 함께 부르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
이런 때라면 중전은 더욱 조용히 숨을 죽이는 편이지.
아들이 세자가 된 후로는 오히려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진 사람이니까.
‘나야 뭐 외가도 없고.’
종친들이 가끔 나에게 친한 척을 하는 정도지만 왕도 종친들에게 그리 살가운 편은 아니다 보니.
‘역모 한번 일어나면 가까운 종친일수록 몸을 사려야 하지.’
다들 지금은 숨소리도 죽이고 다닐 때니 괜히 나를 찾아와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을 거다.
“그렇지만 옹주 자가.”
“성원 세자 오라버니가 준 가락지를 잃어버렸단 말야.”
내가 울먹거리자 완강하던 가이와 송비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빨리 갔다 오셔야 해요.”
“응.”
가이와 송비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오늘 탈주, 아니 출궁 루트도 지난번과 비슷했다.
세자와 협조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세자에게도 비밀로 움직이는 것이라 전보다 더 소수 인원이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내 처소 궁인들이 궁 밖으로 나가도록 허가를 내주는 건 내 재량이니 적당히 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귀찮은 사람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원래 원치 않는 일은 꼭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옹주 자가?”
궁 밖에서 내 얼굴만 보고 옹주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 일이 일어나는가.
‘모른 척하자. 잘못 봤겠거니 하겠지.’
나는 기억에 있는 목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 송비를 채근해 후다닥 궐문 앞을 떠났다.
하지만 전직 체탐인, 현직 겸사복의 발은 당연히 우리보다 빨랐다.
“어딜 가시는 것이옵니까?”
“깜짝이야.”
궁을 빠져나왔다고 안심한 순간 내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아저씨는 꽤 존재감이 있었다.
“일 안 하고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건가?”
“소인이 일 안 하는 것보다 옹주 자…….”
“쉿.”
내가 눈치를 주자 성 겸사복도 일단은 주변을 신경 쓰며 호칭을 바꿨다.
끙. 가까이서 올려다보려니 목 아프네.
“아기씨께서 나와 계시는 것이 더 큰 일이 아니옵니까.”
“어, 성윤 겸사복…… 맞지?”
“그렇사옵니다.”
“인상이 좀…… 많이 달라졌네?”
목소리는 아는 사람인데 얼굴이 낯선데?
내가 아는 성윤 겸사복은 수염이 난 아저씨였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인다?
물론 이 시대에는 30대도 아저씨가 맞겠지만.
송비가 나를 안고 경계하며 뒷걸음질 치자 성 겸사복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당황하며 자신의 턱 언저리를 더듬었다.
“아. 수염을…… 정리해서 그렇게 보이실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이럴 수가! 10년은 젊어진 거 같은데!!
‘수염이 이렇게 해롭다.’
수염을 밀어 놓으니 아저씨에서 얼굴에 흉터가 좀 있는 위험한 훈남이 되었네. 흉터 때문인지 좀 위압감도 있었지만 용모가 나쁘지 않으니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긴 겸사복은 용모도 보는 직종이니까.
외모지상주의가 현대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아기씨께서는 무탈하시옵니까?”
“괜찮아. 송비, 지난번에 사복시에서 나 구해 준 겸사복이야.”
“아, 그때 옹주 자가를 구해 주셨다던 그분이시군요.”
송비는 그때 나와 동행하지 않았으나 전해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밝은 얼굴을 했다.
오늘은 겸사복 복장도 아니다 보니 위험한 사람인 줄 알았나 보다.
겸사복 복장이 아닌 걸 보면 쉬는 날 같은데. 왜 여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할 말이 있었으므로 만나게 된 거 자체야 나쁜 일이 아니었다. 때와 장소가 좀 좋지 않아서 그렇지.
나는 성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그때 일을 사과했다.
“수염, 미안해. 많이 아팠을 텐데.”
“소인의 수염과 아기씨의 안위를 바꿀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 아니겠사옵니까.”
성윤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니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미추(美醜)를 떠나서 참 지쳐 있는 얼굴이었다.
“수염이랑 안 바꿀 수 있었다구…….”
“그때 아기씨는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덕분에 젊어 보인다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될지가 의문이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송비의 눈치를 보곤 성윤에게 다가가서 소곤소곤 물었다.
“체탐인이었다며?”
“그……렇사옵니다. 옹주 자가.”
“그럼 외국에 있었어? 아, 말하면 안 되나.”
“예에. 옹주 자가.”
이런, 얼굴에 어떤 놈이 어린애한테 그런 거 말해 줬냐고 쓰여 있는데?
‘세자가 말해 줬다고 하면 세자에 대한 평가가 내려가려나.’
세자는 죄가 없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날’ 이후로 세자는 어지간해서는 내 부탁을 잘 거절하질 못했다.
가엾게도.
“옹주 자가께선 소인이 무섭지 않으십니까?”
“나를 구해 주었는데 내가 왜 무서워해야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