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48)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48)화(48/326)
“……옹주 자가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자신의 흉터를 더듬으며 허탈하게 웃던 성윤은 곧 본론으로 돌아왔다.
“한데 귀하신 분께서 어찌 또 이런 곳에 계시옵니까?”
“그날 잃어버린 것이 있어서 혹시 찾을 수 있을까 하고.”
“그렇다고 해도 이리 궐 밖으로 나오시는 것은 위험하옵니다.”
“하지만 성원 세자 오라버니가 마지막으로 맡기고 간 물건이라…….”
그렇게 말하면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뜨리자 성윤 역시 가이나 송비와 마찬가지로 말을 잃었다.
“…….”
의도한 건 아닌데 이쯤 되면 무슨 마법의 단어 같다.
잠시 침음을 삼키던 성윤이 뭔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럼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도와줄 거야?”
“옹주 자가와 항아님만 보내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
내가 목에 매달리자 성윤은 나를 피하지도 안아 올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한동안 망설이다 찬찬히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또 내 신분을 망각했군.’
가까운 가족들이나 궁녀들은 내가 이렇게 하면 좋아하니까 습관이 된 거 같았다.
이제 좀 자중해야지.
송비는 갑작스러운 동행이 생긴 것에 당혹스러운 눈치였으나 나를 돌볼 손이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심한 듯했다.
송비는 원래 지밀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인가, 조금 자신감이 부족한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좋고 임기응변에도 능한 가이가 바로 곁에 있으니 비교가 될 수밖에 없을 텐데 둘이 원만하게 지내는 듯해 다행이었다.
‘둘 다 어찌 보면 소외된 처지라서 그런가.’
송비는 원래 지밀 소속이 아니었고, 가이는 원래 영빈, 홍 숙원의 지밀나인이었지만 주인을 배신하고 내 밑으로 온 셈이라 둘 다 오히려 다른 지밀궁녀들과는 서먹한 편이었다.
지금은 가이가 엄격하게 군기를 잡고, 송비가 다독이는 걸로 그럭저럭 분위기가 잡힌 것 같았지만.
가는 도중에 성윤에게도 옥가락지에 대해 설명했다. 난처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마찬가지로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 듯했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남대문까지 가는 길이 제법 거리가 있다 보니 오늘도 나는 적아를 타고 있었다.
관등놀이 이후 처음 나온 도성 안은 여전히 활기찼지만 그날은 보지 못했던 것도 보였다.
‘그날은 놀러 나온 사람이 많아서 별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역시 형편이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많군.’
지금이 곧 6월이니 보릿고개도 다가오고 말이지.
궁 안에만 있으니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역시 마냥 살기 좋은 세계관은 아니었다.
‘하긴 풍족한 시대인 현대 한국에서도 노숙자나 거지는 있었지.’
예전에 노숙자를 본 게 남대문이었나 서울역이었나.
내가 멍하니 딴생각을 하는 사이 남대문 파수꾼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온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옥가락지를 본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역시 그런가.”
그날 수천과 함께 있었던 민가에 다시 가 보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으음.’
그 집도 잘못 얽혀서 꽤나 수난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괜히 간섭했다간 일만 더 복잡해질 테니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았다.
“그럼, 그날 내가 성 겸사복과 마주친 곳은?”
“아기씨께서 직접 가 보시는 것보다는 나중에 소인이 혼자 가서 찾아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시일이 지났으니 없어졌다면 찾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겠지.”
“게다가 그날처럼 이상한 놈들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쉽지만 맞는 말이었다.
성윤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그때처럼 시비 걸러 나타날 거 같지는 않지만.
“두 사람에게 헛걸음만 시켜서 미안하네. 음, 조금 쉬었다 돌아갈까? 송비 다리 아프지 않아?”
“저는 괜찮습니다.”
“이 근처라면 아기씨께서 쉬실 만한 곳은 딱히…….”
아니 옹주인 내 기준으로 쉴 곳을 찾으면 어떡해.
나는 눈에 보이는 주막을 하나 가리켰다.
“저기 주막이 있네. 송비, 돈 가지고 나왔지?”
“돈은 가지고 나왔습니다만 아기씨,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송비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사실 송비가 걱정할 만도 했다.
그 곶감 사건 이후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오죽 까다롭게 구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다 나는 나대로 이 시대 기준으로 지나칠 정도로 청결과 위생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으므로 이런 길거리 주막집이 내 기준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은 나 때문에 청결에 대해서는 똑같이 까다로워진 송비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아마 맛은 어떨지 몰라도 청결은 기대하기 어려우려나.’
하지만 여기는 실제 조선 시대가 아니고 그럭저럭 보정을 받은 소설 속 세계관이니 괜찮지 않을까?
“그냥 쉬었다 가는 정도야 괜찮아.”
“그럼…… 소인이 알고 있는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아기씨께 마땅한 곳은 아니지만 다른 곳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안절부절못하는 송비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던 성윤의 말에 송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성윤이 말한 주막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적당히 흐린 눈을 하기로 결심하고 주막으로 들어섰다.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의외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해서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했다.
“여기 국밥 세 그릇만, 맛있는 걸로 주세요.”
“예예, 알겠습니다!”
사실 사극에선 왕실 음식보다는 주막 음식이 더 많이 나온다. 촬영상의 사정인지 국물 요리보다는 그냥 삶은 닭고기에 나물 반찬이 나오는 경우가 많더라.
그래도 역시 주막 하면 국밥이지.
“네? 국밥을……요?”
“왜? 먹으면 안 돼?”
“아니, 하지만…….”
내 주문에 불안한 듯 동공지진을 하던 성윤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그릇이 도착했다.
탁!
따가운 눈빛과 함께.
“우리 집 국밥에 뭔가 문제라도?”
“아닙니다…….”
영업 방해자를 노려보는 주모의 싸늘한 눈빛은 국경을 오가며 사선을 넘기던 체탐인의 입도 다물게 했다.
“술 드실 거요?”
“아니요.”
술도 안 먹는 돈 안 되는 손님이 못마땅한 듯 성윤을 흘겨보던 주모는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쩐주가 누구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라기엔 내가 좋은 옷 입고 말을 타고 들어왔구나.
“모처럼 쉬는 날인데 나 때문에 연장 업무 하는 거 아냐?”
“아직 쉰다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이쪽이 편합니다.”
“저런.”
하긴 쉴 수 없는 직종이었구나.
여기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관리들도 보름에 하루 정도 쉰다던가.
주 5일제의 시대에서 살다 온 사람은 적응할 수 없는 시대였다.
나는 혀를 차며 국밥을 떠 입에 넣었다.
“오? 맛있어.”
오오오. 이거야말로 현지에서 맛보는 그 맛!
“마음에 드십니까?”
“응.”
주모의 솜씨가 좋은지 국밥은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사실 고기 잡내도 조금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어쩐지 내 그릇에 고기가 많았다. 이거 혹시 신분 차별인가?
“송비. 고기 더 먹을래?”
내가 고기를 덜어 송비에게 주는 것을 본 성윤이 묘한 얼굴을 했다.
“아기씨는…… 특이하시군요.”
“그래?”
적당히 잡담을 얹어 국밥을 먹으며 주변을 슬금슬금 구경하는데 주막 근처에서 구걸을 하는 걸인 아이들이 보였다.
구걸도 구역이 정해져 있다고 들었으니, 저 아이들은 분명 이 근처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일 터였다. 여기선 남대문도 멀지 않으니 혹시 내가 옥가락지를 떨어뜨렸다면 저 아이들이 본 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 아이들은 근방을 많이 돌아다닐 테니 가락지를 본 적이 있지 않을까?”
“그건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순순히 말을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아기씨를 속일지도 모릅니다.”
“나야 속아도 별로 큰 손해는 아니야. 저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겠지.”
“지난번에 본 그 무뢰배 같은 놈들이 나타나면요?”
“와아. 여기 든든한 아저씨가 있네.”
“아기씨이…….”
이미 내 앞에서 한 차례 힘 자랑을 했던 성윤은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못했다.
나는 국밥을 먹다 말고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얘들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
“뭐요? 적선이라면 환영이지만.”
“내가 관등놀이 날 남대문 근방에서 옥가락지를 잃어버렸는데…….”
“우리가 훔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갑자기 급발진을 하지…….
같은 무리 중에서도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놀라서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쪽도, 나보다 한 뼘 정도 커 보이는 아이가 성을 내자 성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일이 커지지 않도록 발끈해서 소리치는 아이를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아니 아니. 혹시 본 적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것뿐이야.”
“우린 그런 거 모르니까 가던 일이나 가시죠. 야, 가자.”
“어? 하지만…….”
“가자고.”
뭐가 그리 거슬렸는지 대장으로 보이는 아이는 어린아이들을 끌고 가려 했다.
정작 어린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머뭇거렸지만. 특히 아까 뒤에 숨었던 어린아이 한 명은 내 쪽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 아이를 따라 동냥을 다닌다는 건 부모가 버렸다는 뜻이려나.
이대로 그냥 보낼까 했던 나는 제 언니 오빠들을 따라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보며 결국 가장 쉬운 수단을 꺼냈다.
차륵-
멈춰 선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내 쪽을 향했다.
“정말 전혀 몰라?”
내가 꺼낸 엽전 꾸러미의 찰진 소리 앞에서 아이들의 고개는 무거워지고, 입은 가벼워졌다.
어느새 내 앞으로 돌아온 아이는 말투조차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저희는 보지 못했는데 알아봐 드릴 수는 있습죠.”
“오래 걸릴까?”
“주워 온 물건들 중 돈이 될 만한 건 모아 놓으니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엽전 꾸러미에서 딱 절반을 건네주며 말했다.
“응. 확인해 주면 나머지를 줄게. 그리고 만약 내 옥가락지를 찾는다면 한 뭉치 더 받을 수 있을 거야. 참고로 말해 두자면 내가 찾는 옥가락지엔 표식이 있어서 만져 보면 내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다른 걸 구해 와도 소용없어.”
“알겠습니다. 알아봐 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요?”
“응. 부탁할게. 내가 없으면 일단 주모에게 말을 전해 두면 될 거야.”
아이들은 나에게 몇 가지를 더 확인한 후 후다닥 사라졌다. 그런 내 뒤에서 성윤은 혀를 찼다.
“저놈들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뭐,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고.”
일단은 먹던 국밥이나 마저 먹어 볼까.
그리고 성윤의 예상대로 꽤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주모에게 돈은 맡겨 둬.”
“아기씨.”
“그 아이들이 약속을 안 지킨다고 나까지 허언을 할 수는 없잖아?”
얼마 뒤, 내가 걸인들에게 턱턱 돈뭉치를 주는 것을 본 후론 지짐이니 떡이니 이것저것 음식을 가져다준 주모 덕분에 배가 부른 나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별미로 서민 음식을 즐기는 부잣집 아가씨가 된 기분인데.’
어디 드라마에 이런 게 나온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기씨,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괜찮아. 아마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고.”
바보가 아니니, 이제 와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온 것은 왜일까.
물론 그 옥가락지는 특별했지만, 성원 세자의 유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궁에 이미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맡겨 둔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묘한 죄책감이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걱정스레 속삭이는 송비의 말에 나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궁으로 돌아가는 길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한 게 아니라구요!!”
아까 본 걸인 아이가 더 어린 아이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