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5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50)화(50/326)
“뭐?”
갑작스레 대화에 끼어든 건 성윤이었다.
차륵, 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의 엽전 꾸러미가 성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 설마 아까 그 남자랑 부딪칠 때……?’
거참 다재다능하네. 나는 체탐인의 교육 커리큘럼이 약간 궁금해졌다.
근데 필요한 스킬인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성윤의 손에 들린 돈을 본 아이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돈을 네가 가지고 있는 건 위험한 거 같다.”
“뭐?!”
“줬다 뺏겠다는 거 아니야. 다른 방법으로 주겠다는 거지.”
“어떻……게요?”
“너희가 돈으로 가장 가지고 싶은 게 뭐야?”
“그야, 먹을 거지요.”
다행히 예상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까 내가 있던 주막 알지? 거기에 돈을 주고 사정을 설명해 놓을 테니 물건을 찾는 동안은 가서 밥을 달라고 해. 하루에 한 번, 그건 뺏길 일이 없겠지.”
“어, 저, 정말요?”
“그래. 그럼 나는 가 볼 테니 의원이 하는 말 잘 듣고 얌전히 치료받아.”
“자, 잠깐만요!”
“아직 일어나면 안 돼.”
“아, 아까, 그, 그러니까…….”
“?”
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뭔가 고민하는 거 같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어, 언제 찾아올 거야……요?”
“나중에 다시 올게. 음…….”
나는 송비의 눈치를 보았지만 송비는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물건이 맞는지는 내가 직접 확인해야 알 수 있는걸.”
하지만 송비도 굴하지 않았다. 혜민서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나에게 하대하는 것이 불편한지 여전히 말은 하지 않고 인상만 쓰고 있었지만.
“그럼 제가 대신 전해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보다 못한 성윤이 나섰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
“걱정 마십시오.”
나 이 아저씨한테 이것저것 너무 많이 신세를 지는 것 같은데?
하지만 덕분에 조금 마음이 편해진 나는 병상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몸조리 잘해.”
“어? 아, 저기. 그럼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거야?”
음?
뜻밖에도 뻔뻔할 것 같았던 아이의 얼굴은 서운함과 고마움이 뒤섞여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어. 글쎄 가능하면, 다음에 나올지도 모르고. 집……이 조금 엄격한 곳이거든.”
“그, 그래…….”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뭔가 아쉬운가 보다.
내가 쟤한테 뭘 받을 처지도 아니고, 고마워하는 거 같으면 그걸로 됐다.
“다음에 보자.”
“어, 응! 아니, 네!”
혜민서에서 생각보다 시간이 꽤 많이 지체된 지라 우리는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나는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다.
“어찌 그리 위험한 일을 하십니까?”
“옹주 자가께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가는 저희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음, 그건 그랬다.
“미안. 근데 내 탓 아닌데. 적아가 혼자 튀어 나갔다고. 얘가 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막겠어?”
“아기씨.”
“하지만 사람들이 야박하네. 아무리 걸인이라지만 어린아이가 맞고 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니.”
“그놈들도 뒷배가 있으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렇겠지요.”
“뒷배?”
과연 다 뒤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난동을 피우고 다니는 건가.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옆에 있는 성윤에게서는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날 보고 그렇게 웃어?”
“송구하옵니다. 실은 옹주 자가를 뵙고 있노라면 소인의 어릴 적 동무가 생각나 그렇사옵니다.”
“동무?”
“착하지만 겁이 없었지요.”
이거 욕이야 칭찬이야.
내 뒤에 있던 송비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소인이 이래 봬도 어릴 적에는 작고 연약했사옵니다.”
“거짓말!”
용모가 기본 조건인 겸사복들 사이에서야 기골이 장대하다고까지는 못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키도 평균 이상이었다. 게다가 아까 그자들을 제압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연약하다는 표현과 상당히 괴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소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사옵니다. 오죽하면 동네 개들도 저를 괴롭힐 정도라, 이웃에 살던 아이가 아궁이 불을 때던 부지깽이를 들고 나와 휘둘러 쫓아 줄 정도였지요.”
불 때던 부지깽이라니,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군.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성윤의 입가에 그리운 듯 애매한 미소가 어렸다.
“이젠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아기씨를 보면 그 동무가 생각나 기쁘옵니다.”
“그럼 자주 봐.”
얼굴을 보니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썩 좋은 의미 같지는 않았지만. 내 얼굴 보는 게 괴로운 것만 아니면 괜찮겠지.
성윤은 내 말이 기뻤는지 밝은 낯으로 되물었다.
“그래도 되겠사옵니까?”
“성 겸사복이 퇴직하지 않는다면? 아마?”
“하하하. 옹주 자가께서는 참으로 정이 많고 관대하십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위태로운 행동은 삼가주십시오. 소인이 없는 곳에서 옹주 자가의 존체가 상하기라도 한다면 소인은 무척 슬플 것이옵니다.”
동무랑 닮았다는 말은 이걸 위한 밑밥이었나 보다.
지은 죄가 있는 나는 그저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말을 돌리기로 했다.
“도성 안에 생각보다 거지가 많은데.”
“이양법 실시 이후로 늘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아. 이양법.”
여기서는 이미 이양법 = 모내기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양법은 2모작을 가능하게 해서 농업생산성과 노동생산성을 동시에 올라가게 하는 대신 잉여 노동력을 만드는 주범(?)이었다.
‘덕분에 남는 노동력은 도성으로 몰려들게 되고, 도성에서도 필요한 노동력의 수는 정해져 있으니 결국 일을 하지 못하고 동냥질로 생계를 이어 가는 거지도 늘어나게 되지.’
그렇게 남는 인구에게는 할 일이 필요한데 농업에만 집중해서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걸인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네?”
내가 중얼거린 말에 성윤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걸인을 어떻게 줄입니까?”
“데려다 일을 주면 되지.”
“무슨 일을요?”
“원래 그걸 생각해 내는 게 관리들의 일인데 말이지.”
“……그렇지요.”
“음. 직업군인 같은 건 어떨까. 어차피 다들 군역을 기피하니까 전문성도 더 높일 수 있고.”
웃어넘기지 않을까 했는데 뜻밖에 성윤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미 대립군(代立軍)이 많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대립군은 군역(軍役)을 가야 할 사람이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보내는 걸 말한다.
‘예전에 대립군을 소재로 한 사극 영화도 나왔었지.’
하, 직업군인 고용할 거니까 돈 내라고 하면 안 낼 놈들이 본인이 가야 하면 돈을 쓰는구만.
‘어떻게 돈 뜯어낼 방법 없나.’
이 시대 사대부니 양반이니 하는 놈들은 왕한테는 늘 근검절약하라고 핍박해 대지만, 본인들은 사치스럽게 놀아도 된다고 여기는 뻔뻔한 놈들이 태반이니 쉽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아?”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곧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생각해 보니 이거 내가 고민할 일이 아닌데?”
“네?”
아니, 이거 혹시 남주가 여주를 그리워하며 저자에 나왔다가 애민정신을 깨닫고 막 그런 스토리텔링 아냐?
‘내가 애민정신에 눈 떴다고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이런 고민을 한담?’
내가 무슨 남주 역할 뺏을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 세계관은 대체 역사물도 아닌 로맨스물이었다. 그렇게 하드한 설정은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세자 남주가 무능해지는 건 좀 곤란해. 물론 K 로맨스 소설에서 남주가 무능해지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안 그래도 내가 아는 조선 시대와는 이미 많은 것이 달랐고, 달라져 있었다.
애초에 임진왜란도 안 일어났는데 이미 이양법이 보급되어 있고 화폐 경제도 활성화되어 있는 사회 아닌가. 분명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더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무사히 환궁해 내 처소로 돌아가 가이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렇게 긍정회로를 돌렸다.
***
하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내가 안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성윤에게 궐 밖으로 나갔다 온 일에 대한 입단속은 했지만, 내가 한 얘기에 대한 입단속은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고.’
심지어 성윤이 그 얘기를 흘린 상대는 무려 주상 전하였다.
역모 사건의 주요 관계자가 밝혀진 후라 심기는 여전히 불편해도 조금은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시아가 성 겸사복과 친밀해진 모양이더구나.”
“소녀를 구해 준 은인이기도 하니 가끔 다과를 함께한 것뿐이옵니다.”
아무래도 공범자 의식까지 있으니 심적으로 가까워지기도 했고,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성윤이 전해 주고 있기에 가끔씩 처소로 불러 다과와 함께 담소를 나누곤 했던 것은 팩트였다.
‘게다가 저 아저씨는 어쩐지 늘 한가해 보이고.’
본인이 하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정해진 업무가 있다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실전형 교관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은퇴하고 싶은 걸 간신히 붙들어 놓은 느낌이었고.
“성 겸사복에게서 대립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네가 직업군인에 대한 의견을 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전문적인 대화 안 했어요.
그나저나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라니 의외였다. 하긴 왕이 백성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날 끌어들여.’
오랜만에 왕과 함께하는 다과 자리에서 뜻밖의 말을 듣고 멀찍이 서 있는 성 겸사복에게 눈을 흘겼다.
그날 이후로 가끔 맛있는 것도 주고 잡담을 했을 뿐인데 나를 배신했겠다!
‘본인의 생각인 척 말하면 본인 공인데 욕심이 없는 사람인가.’
대충 들어 보니 왕은 꽤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있는 놈들이 안 내는 데에 있었다. 애초에 이번 반란도 왕이 사대부들 세금 더 걷도록 법을 바꾸자 불만 품은 놈들이 일으킨 거였다고.
물론 반란을 모의할 때는 좀 더 있어 보이는 미사여구로 꾸미는 법이지만 요약하면 그랬다.
‘하지만 세금 더 내는 거에 반항하는 인물은 많을 수밖에 없으니 역모에 엮어 넣기도 좋았겠는데.’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렇게 끌려간 사람이 많다 보니 한동안은 왕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대범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당연히 왕도 했다.
“이번에 역적들의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는데 마침 그중에 위치가 마땅한 곳이 있더구나. 주변의 가옥을 좀 더 매입해서 네 사가를 지으려 하는데 어떠하냐?”
“사가요?”
지금 아직 8세밖에 안 된 제게 집을 지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와오. 이것이 금수저의 삶?
“소녀에게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물론 아직 이르지만 터는 하루빨리 잡아 두고 싶구나. 안 그래도 근래에는 좋지 않은 일만 있었으니 좋은 일도 있어야지 않겠느냐.”
8세에 이뤄 버린 내 집 마련의 꿈에 주접부리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사양하였으나 왕이 입 밖에 낸 순간부터 내 집이 지어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게다가 뭔가 말투를 보아하니, 요새 안 좋은 일만 있으니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는 투였다.
‘무슨 스트레스 해소용 쇼핑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인데.’
소비의 규모가 남과 달라서 그렇지.
“부마도 정해야 할 터인데.”
“소녀는 아직 아바마마의 슬하에서 떠나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래. 옹주가 아직 어리고 세자도 아직 세자빈을 맞지 않았으니 이른 이야기구나.”
현대에서야 결혼에 순서를 신경 쓰지 않지만 여기는 손위 형제가 아직 미혼인데 동생을 먼저 보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무래도 역모 사건이 마무리되고 나면 딸들이 있는 집안은 또다시 긴장 상태에 들어갈 듯했다. 이 틈에 다른 집이랑 얼른 혼약 맺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 같고.
‘그나저나 집이라.’
얼마 전 거리에서 본 집도 없는 걸인 아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주는 걸 안 받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 심각한 빈부격차에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내가 기득권층일 텐데 죽창을 들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역시 소시민의 삶이 더 길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