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5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51)화(51/326)
어쨌든 어른이 주신다는 건 감사히 받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였다.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딸의 얼굴을 보며 차 한 잔 마시는 것이 끝일 정도로 짧은 왕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나는 처소로 돌아가야 했다. 처소로 가는 길에는 마침 성 겸사복이 함께 했기에 왕에게 괜한 소릴 한 것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손짓으로 부르자 성윤은 아까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인 부름이시옵니까. 옹주 자가.”
“아바마마께 왜 그런 얘기를 했어.”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직업군인 얘기, 내가 말했다고 할 필요 없잖아.”
“성상께서 고려해 보심도 나쁘지 않을 듯하여 아뢰었을 뿐이옵니다.”
“그냥 성 겸사복이 생각해 냈다고 하지?”
“남의 공을 탐하는 재주는 부족한 몸인지라. 게다가 소인은 붙잡혀서 일하기 싫사옵니다.”
아, 그래서였나. 붙잡힐까 봐?
“이 험한 세상을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남았대?”
“소인이 잘 살아남았으니 여기 있지 않겠사옵니까. 운이 좋은 모양이지요.”
“어디에 있었는데?”
아,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잠시 멈칫했는데 성윤은 의외로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고 있었으니 아마 내 뒤에 따라오고 있는 가이에게는 들리려나.
“소인은 북쪽에 파견되어 있었사옵니다.”
“북쪽? 그럼 두만강에 가 본 적 있어? 백두산은?”
“백두산은 가 보지 못하였지만 두만강은 가 보았습니다.”
“와. 나도 가 보고 싶다.”
전생에는 가 보고 싶어도 여러모로 애로 사항이 많은 곳이라.
그리고 그건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옹주 자가께서 가시기에는 많이 험한 곳이옵니다.”
“그렇겠지?”
나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거기가 뭐 경관이 빼어나서 가 보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그럼 백두산은 괜찮을까.”
그래도 죽기 전에 백두산 천지는 한번 내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백두산을 어떻게 오르시려고요…….”
“걸어서?”
아, 이 시대에는 제대로 된 등산로가 없어서 더 어려우려나? 하긴 등산화도 없는데.
그래도 등산은 차라리 어릴 때가 낫다. 나이 먹으면 몸이 무거워서.
20대에 벌써 그걸 깨달았었다는 사실이 좀 슬프지만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백두산에 놀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바로 마음을 바꿨다.
“으음. 역시 나중에 금강산 가 보는 걸로 만족해야 할까.”
“옹주 자가. 궁을 나가고 싶으십니까?”
“언젠가 나갈 거 아냐? 나야 세자 저하와 달리 궁 안에서만 살 것도 아닌데 기왕 나가는 거 다른 데도 좀 가 봐야 하지 않겠어?”
관광하면 역시 제주도지만 이 시대의 제주도는 풍토병이 무서우니 피해야 하나.
게다가 비행기도 없으니 남쪽으로 내려가서 배를 타야 하는데 재수 없으면 배 타고 여러 날을 가야 하니 썩 즐겁지 않은 여행이 될 가능성도 농후했다.
궁을 나가면 관광을 다니겠다는 내 사고방식이 신기한 듯 성윤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옹주 자가께서는 참으로 호기심이 왕성하십니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즐거운 일을 찾는 거지. 나는 행복하게 즐겁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의무입니까?”
“그래. 그게 옹주로 태어난 내 의무지.”
일찍 떠난 내 생모와, 태어나 보지도 못한 내 동생과,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내 큰 오라비.
첫 부인도, 부인이 낳은 첫아들도, 늦은 나이에 맞은 후궁도, 태어날 예정이었던 막내아들도 먼저 보낸 내 생부.
그리 따르던 형을 잃고, 어린 나이에 하나뿐인 누이동생이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해 버린 데다, 마음을 주었던 소녀는 역당의 딸이 되어 도망치게 된 내 작은 오라비.
주변에 온통 불행한 인간들뿐이니 나라도 좀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아야 균형이 맞지 않겠는가.
“그래도 처음부터 먼 곳은 좀 힘드실 테니 조금 가까운 곳 중에는 어디 가고 싶으신 곳이 있으십니까?”
“아. 그럼 먼저 양주…… 진접에 가 보고 싶어.”
“양주 진접, 말씀이시옵니까?”
“응. 거기 묘가 있거든.”
내 생모의.
후궁들은 살아서 도성을 벗어날 수 없으니 묘는 대부분 고향에 만들어 준다.
먼 지방이면 힘들겠지만 다행히 경기도라 그리 멀지 않으니 하가한 후에는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열 나서 쓰러지고 독 먹고 쓰러지고 하다 보니 장례조차 제대로 참석 못 했으니. 나중에 가서 제사라도 제대로 지내 줘야지.’
언니를 생각하니 또 코끝이 찡하게 울려 온다.
아직,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탓이다.
‘몇 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무뎌지리라는 걸.
이건 아직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궁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옹주의 삶은 너무나 조용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바쁜 편이 딱 좋은데.’
심심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본래라면 내 또래 궁녀 아이들과 술래잡기나 하고 놀아야 할 텐데 그건 아무래도 좀 그랬다.
덕분에 이곳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천천히 흘렀다. 한없이 방바닥에서 뒹굴어도 심심하지 않았던 건 스마트폰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 침묵하고 있자 주변 역시 조용해졌다. 거참, 혼자 있을 수 없는 생활이란 이런 게 불편했다.
다들 내가 말한 묘가 뭘 말하는 건지 알고 있을 테니 더 했다.
조용한 분위기에 맞춰 한동안 말이 없던 성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인이…….”
“응?”
“소인이 그 근처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나중에 옹주 자가께서 진접을 찾으신다면 소인이 모셔도 되겠사옵니까?”
“겸사복 진짜 그만두게?”
“옹주 자가 사가에 취직시켜 주시면 아니되옵니까?”
“고작 옹주방에서 뭐 하게.”
전직 체탐인, 현직 겸사복인 고급 인력이 지금 사설 경호원 채용에 지원하는 건가?
“평소에는 식객 노릇 하다가 놀러 나가실 때 부리시면 좋지 않겠사옵니까.”
“나중에 구사(丘史) 받을 테니 달리 부릴 사람 필요 없는데.”
구사는 공신이나 종친 등 이른바 높으신 분에게 배당되는 하인이다. 사극에서 가끔 나오는 ‘물럿거라! 무슨 무슨 대감 행차시다!’ 하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 있지 않은가.
아, 혹시 옹주는 안 주나? 안 준다고 해도 달라고 해야지.
“왜 필요가 없겠습니까. 혹시 나중에라도 쓸모가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부마께서 서운하게 대할 때라든가.”
“흐음.”
주먹을 불끈 쥐는 게 어쩐지 부마가 맘에 안 들면 때려잡아 주겠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건 아니겠지.
하긴 아무리 왕녀라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부마가 못살게 굴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안 그래도 조선 시대 옹주 중에 중종의 딸(*효정 옹주)이었나? 부마가 고의적으로 옹주의 위독을 왕실에 알리지 않은 데다, 옹주가 이미 죽었다며 궁에서 보낸 의원과 의녀를 집에 들이지 않고 돌려보내기까지 해서 타살 의혹이 제기된 일도 있었다.
솔직히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나? 현대처럼 바이탈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숨이 끊어졌어도 살릴 수 있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집에 들이지도 않다니.
심지어 부마는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은 첩을 들일 수 없건만, 옹주가 데려온 궁녀를 첩으로 삼아 본부인처럼 대했다던가. 그러고는 옹주가 첩으로 삼으라고 했으니 괜찮다는 개논리를 펼쳐서 대신들이 두둔해 주기까지 했었다. 여자들에게 투기는 죄라고 가르치는 놈들이니 오죽할까 싶지만.
중종은 빡쳐서 부마를 유배 보냈는데 심지어는 유배지(옹주를 생각해서 부마의 본가가 있는 지역으로 보내줌)에서까지 첩이랑 알콩달콩했다더라.
그 궁녀가 옹주와 자매 같은 사이고 충성심이 강했다고 실드를 치기도 하던데 자매고 충성심이고 이전에 제정신이면 첩 들여서 유배 간 놈 유배지까지 따라가서 그러진 못할 텐데. 개 풀 뜯는 소릴 하고 있다.
‘남편이 다른 남자 만나도 괜찮다고 허락해 줬다고 정말 다른 남자 만나고 다닌 부인이 있으면 기를 쓰고 사형시켰을 거면서.’
게다가 조선의 부마가 법적으로 첩은 못 들여도 기생집 다니며 파락호 짓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파락호 짓을 해도 옹주를 때리기야 하겠냐마는 이런 고급 인력이 알아서 굴러들어 오겠다는데 그리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나중에 하가할 때 생각해 보자.”
“하하.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요즘 종종 불러서 보곤 했더니 좀 친해진 거 같긴 해.’
워낙에 궁 안이 새로운 얼굴 보기가 힘든 환경인 데다 성윤만큼 도성 밖 세상을 잘 아는 이가 없어 자꾸 불러서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
게다가 겸사복은 출퇴근을 하는 몸이다 보니 가끔 그 주막으로 가서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확인해 주는 것도 가능했고.
‘의외로 열심히 찾고 있나 본데 슬슬 포기하라고 해야 할까.’
못 찾았어도 수고비 명목으로 한동안은 도와줄 생각이었다. 언제까지나 계속 먹을 걸 줄 수는 없겠지만.
***
그리고 얼마 후, 성윤에게서 그 아이들이 옥가락지를 찾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놈들이 참 되바라지게도 아기씨께서 직접 오셔야 보여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더군요.”
“하하. 거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인데 보통 근성으로 되겠어?”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가 보고 싶어서 와 달라는 건데 한번 가 주지.”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심은 약간 달랐다.
‘궁 안 너무. 심각하게 노잼이야. 좀 나가자.’
전보다는 조금 풀어지긴 했는데, 궁 안은 여전히 역모 때문에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어 평소보다 더 분위기가 삭막했다.
사실 나도 기절한 날 이후로는 평소처럼 나대고 돌아다니기가 좀 눈치 보이는지라 요즘은 처소에서 뒹굴고 있어 더욱 한가하고 심심했다.
“꼭 직접 나가셔야겠사옵니까?”
“소인이 아이들에게서 옥가락지를 받아 올 터이니 기다려 주시면…….”
“내가 직접 가겠다고 말하였는데 나를 허언하는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야?”
아니 허언 좀 하면 어때요. 송비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다시 외유 준비에 나섰다.
세 번째쯤 되니 다들 익숙해졌는지 준비도, 궐을 빠져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가서 후딱 가락지만 확인하고 오려던 내 눈앞에는 쓸데없는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리 내놔!”
“이거, 어? 우리 구역에 있던 거잖아! 어? 너네 꼬맹이가, 어? 몰래 들어와서 가져가는 거, 어? 다 봤거든?”
낯선 꼬맹이 몇 명이 내 거래처(?)를 괴롭히고 있었다.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대충 알 거 같은데 나는 많이 귀찮았다.
아니 그냥 옥가락지 찾고 적당히 놀다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왜 이런 방해가?
나는 말없이 성윤을 쳐다보았다.
내 마음을 읽은 성윤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뒷목을 잡아 떨어뜨려 놓은 후, 옥가락지를 들고 있는 낯익은 아이에게 눈짓을 했다.
성윤의 시선을 따라 나를 발견한 아이는 화색이 되어 달려와 나에게 옥가락지를 내밀었다.
“왔구나! 이거! 찾았어요!!”
“고마워. 고마운데……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저거 별거 아냐. 저 아저씨가 안 도와줬어도 내가 이겼거든요?”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이상한 존댓말을 들으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옥가락지를 받은 것을 확인한 성윤이 시끄러운 쪽 아이를 놓아줬는지 쪼르르 이쪽으로 달려온다.
“이기긴 어? 누가 이겨! 내가 그래도 너, 어? 다쳤다고 들어서, 어? 봐주고 있거든? 어? 알고 말해?”
개성적인 말투를 가진 아이가 다가오니 자연히 둘이 다시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음, 그만하고. 그래서 너는 뭘 바라는데?”
“얘네한테 주기로 했던 보상. 절반이면 됩니다.”
“이 날강도 X끼가 어디서…….”
“도둑은 어? 너지! 우리 구역에서 어? 찾은 거잖아!!”
“넌 있는지도 몰랐잖아!”
“진흙탕 속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아!”
나는 다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여긴 주막이었고, 주모가 무서운 눈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음. 근데 우리가 보상을 뭘 주기로 했지?”
“……먹을 걸로 주기로 했지요.”
돈 뺏기는 거 보고 보상을 바꾸기로 했으니 그건 아직도 유효했다. 나는 낯선 불청객 아이에게도 그 사실을 고했다.
“네가 와서 같이 먹는 건 상관없는데. 주모만 괜찮다면.”
물론 주모는 돈만 더 준다면 상관없다고 했고.
딱 정해진 인원만큼만 주고 있으니까.
“……정말 어, 그거뿐? 어? 돈이 아니고요?”
“돈을 줬더니 뺏기고 있길래 먹을 걸로 주기도 했거든.”
“말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돼. 너 내가 다친 건 알면서 왜 다친 줄은 몰랐냐?”
“깝치고 다니다, 어? 털린 줄 알았지, 어?”
쟤랑 계속 대화하고 있으면 노이로제 걸릴 것 같다.
나는 주모에게 가서 푹 끓인 국밥을 받아 와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 앞에 놓고 손수 떠서 한입씩 넣어 주었다.
“자, 시끄러우…… 아니, 배고플 테니 우선 먹자.”
“으읍?! 우으읍!!”
“읍? 으으읍!!”
저런, 뜨거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