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5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52)화(52/326)
뜨거워서 그대로 뿜어 버리지 않을까 싶어 슬쩍 몸을 피했는데 다행히 먹을 거 귀한 줄 아는 애들이라 입 안에 들어온 게 다시 나오는 불상사는 없었다.
일단 먹을 것이 들어가자 아이들은 한동안 조용해졌다.
곧 다시 시끄러워졌지만.
“다, 다른 거 없슴까? 어? 시킬 일? 나, 나도 물건 잘 찾는데!”
“야, 저렇게 돈 펑펑 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같은 애들한테 또 무슨 부탁을 해?”
아이의 말이 거슬렸는지 송비와 성윤의 눈썹이 약간 찡그려졌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에게 시킬 만한 일이 없기도 하고.
“딱히 없는데. 아.”
하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돈 펑펑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먹을 거 정도라면 어떻게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래?”
“어, 뭔데?”
아이들은 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마 내 뒤에 있는 두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겠지.
눈을 반짝이다 말고 묘하게 시선을 내리까는 아이들의 표정만 봐도 알 거 같았다.
그리고 정작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은 예상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우리 사는 게 뭐가 궁금해요?”
“게다가 도성에 뭐가 있는지도 몰라요?”
“으음. 잘 모르지.”
나 지금 여덟 살이다. 얘들아…….
오히려 도성의 전체 구조를 그럭저럭 아는 건 내가 전생에 본 서울 지도를 그럭저럭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지하철 기다리다 가끔 들여다봤는데 그게 의외로 도움이 되네.
사실 지도 없이 말로만 어디에 뭐가 있다고 듣는 것만으로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는 좀 어려웠다.
‘솔직히 니들도 잘 모르지 않니?’
아무리 지금 한양의 크기가 현대 서울보다 많이 작다고는 해도 구(區) 두어 개 정도 사이즈는 된다. 어린아이들이 전체를 파악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그런 걸 물어봐요? 높으신 분들 놀이인가?”
“그런 놀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나도 그렇지만 높으신 분들은 다른 사람들 사는 거 힘들다는 거 잘 모르시거든. 그래도 내가 직접 보고 전하면 좀 믿어 주지 않을까 해서.”
“그런가?”
아이들은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가는지 저들끼리 모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고민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그리고 뜻밖에, 내가 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먹혔다.
“아기씨.”
“아, 미안. 위험한 일은 안 할게.”
날 부르는 송비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변명하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감격에 차 있었다.
“아기씨께서 그런 깊은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아, 음. 뭐.”
거기에 성윤까지 합세했다.
“아직 연치도 어리시온데 그런 생각까지 하시다니요.”
“아니, 음. 그래.”
나는 두 사람의 반짝이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미안,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 사심 때문이야.
‘실은 그냥 조선 시대 생활사 연구를 위한 기록 작성의 일환인데.’
심지어 이미 왕실 생활사에 대한 기록 작성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기왕 왕실에 태어난 몸 아니던가. 이렇게 된 거 왕실 생활사에 대한 자료를 남기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붓을 잡고 한글, 아니, 여기선 아직 훈민정음이지만 귀찮으니 그냥 한글이라고 하자. 아무튼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일기를 가장해 궁중 생활사와 관련된 온갖 잡다한 내용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왕실 어른들을 대하는 관습이라든가. 궁녀들이 일하는 방식이라든가. 궁 안에서 몰래 하는 미신이라든가. 나나 세자가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의 특징이나 색깔이라든가.
하다못해 매일 내 밥상에 오르는 음식들의 종류와 맛과 간단한 요리 방법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적고 있었다.
물론 세자와 만나서 먹는 간식들도 마찬가지.
덕분에 우연을 가장해 내 일기장을 살펴본 가이는 내가 음식에 관심이 많아 그런 걸 쓴다고 생각해 흐뭇하게 웃고 넘어갔지만.
사실 이런 걸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후후. 대략 n백 년 후 관련 학과 학생들의 논문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예정이지.’
그때쯤이면 언어가 또 좀 바뀌어서 번역을 해야 하려나.
괜찮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내가 남긴 자료를 토대로 고증 맞춘 사극을 만들어라!
사료가 없어서 고증을 못 한다는 소리는 못 하게 만들어 주겠어!
‘물론 전쟁 나서 불타면 끝이지만. 아무리 옹주의 것이라도 개인 일기를 조선왕조실록처럼 여러 서고에 복사해서 보관할 것도 아니니.’
게다가 고증도 시대별로 바뀌니까 내가 남기는 자료는 기껏해야 조선 중기에 가까울 듯했다.
현대에 남아 있는 왕실 문화 자료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 시절까지 궁녀였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남아 있는 것이 많았으니 아무래도 다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기 자료가 있으면 중간 단계가 없어도 어떻게 바뀐 건지 연구 정도는 하겠지?
적어도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만들어진다면 꼭 참고하게 만들어 줘야지.
도화서 화원들을 고용해 그림도 잔뜩 그려서 남길 예정이었다.
“훗.”
나의 비뚤어진 생각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본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이…… 내 뜻을 알 리가 있겠니…….
진짜 역덕이 이런 데 환생했으면 더했을 텐데.
나야 뭐 적당히 역사 좋아하고, 사극 보고 가끔 관련된 책이나 찾아보는 평범한 사극 애청자 정도지.
‘그러고 보니 서민 생활이 그리 자세히 나오는 사극도 별로 없으려나.’
어떻게 보면 노비들 생활을 다룬 경우가 더 많지 않나 싶지만 뭐…… 그건 일단 제쳐 두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과 별개로 어려운 일도 위험한 일도 아니고, 먹을 거 준다는데 거부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아마 저 애들도 음흉하게 웃는 성인 남성이었으면 의심하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싶지만.
험한 세상, 조심하는 게 제일이다.
“좋아. 우리도 늘 가는 곳만 가지만 아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어요!”
“뭘 알고 싶은데요?”
“으음.”
애들이 글을 알면 알아서 이것저것 기록해 오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러려면 글부터…… 가르쳐야 하나?’
아무리 한글이 쉽다지만 얘들이 순순히 배우려고 할까?
아니, 역시 돈이라도 주면서 가르쳐야 할까.
성가신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아이들이 다니는 루틴이 궁금하기도 해서 안내를 부탁했다. 처음에는 사는 곳에 대해 물어봤는데, 거지들이 사는 다리 밑은 곱게 자란 아가씨가 갈 곳이 아니라고 거절당했다.
“별 게 다 궁금하시네.”
“그럼 아기씨도 직접 동냥해 보면 어때요? 옷은 공수해 올 수 있는데.”
애들은 개구진 얼굴로 나에게 무리에 합류하라며 권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얼굴이 너무 귀티가 나서 안 될 거 같은데.”
“……헐.”
내 말에 정색하는 파와 그건 맞는 말이라며 긍정하는 파 둘로 갈려 술렁거리던 아이들은 그럭저럭 납득했는지 밥값을 하겠다며 와르르 몰려나갔다. 어차피 갈 거면서 말이 많다.
“……아기씨.”
“아……빠가 나 혼인하고 살 집을 지으시겠다는데 나도 바깥세상을 좀 알아 놔야지. 송비는 따라다니려면 힘들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떨까?”
송비의 경악스런 목소리에 변명하듯 우다다 말을 내뱉은 나는 그대로 아이들 뒤를 쫓아갔다.
“제가 모실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시고…… 아기씨 말씀대로 여기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휴.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송비는 딱히 내 말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근래에 내가 심심하다고 방바닥 긁으며 몸부림치는 걸 옆에서 강제로 목격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는 없을 거 같지. 서민 생활이야 궁녀들이나, 나중에 하가한 후에라도 어찌어찌 들을 수 있겠지만 이런 아이들은 그나마 어릴 때가 아니면 가까워지긴 어려울 거 같고.’
애초에 대부분은 본인들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 같은 걸 안 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외국인 정도나 신기해서 기록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나 외국인 같은 건가.’
본래 다른 시대, 다른 세상 사람이니 틀린 말도 아니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으나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까 싶어 곧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아이들이 동냥을 다니며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안 이제 안면이 익은 아이가 내 옆에 붙어 가이드를 해 주었다.
“여기로 쭉 가면 개천이 나오는데…….”
나는 나대로 기억 속의 서울 지리와 대조해 보며 정신없이 애들을 쫓아다녔다.
‘으음. 저쪽이 명동인가, 그럼?’
그리고 내 뒤를 쫓는 성윤의 얼굴에는 ‘이 정도는 그냥 내가 안내해도 괜찮은데?’라고 쓰여 있었다.
미안. 그 마음은 알 거 같지만…… 나도 아저씨보단 애들이 좋아.
주막에서 밥을 얻어먹게 되니 신경 쓰게 된 건지, 어쩐지 전보다 다들 깨끗해진 거 같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본업에 나선 아이들은 인심 좋은 대갓집이나 잔치가 있는 집의 정보를 귀신같이 알고 찾아가고 있어서 제법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저런 정보는 어떻게 알아내는 거야?”
“뭐, 알음알음. 잔치를 하려면 고기도 잡고 일손도 모으니까요.”
나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아이에게 물었다.
“그런 데에 가서 일을 하기도 해?”
“써 주기나 하겠어요? 쪽박이나 안 깨지면 다행이지.”
퉁명스레 답한 아이는 나를 힐끗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가락지는 왜 그렇게 애타게 찾았어요? 보아하니 잘 사는 집 딸 같은데.”
“죽은 오라버니가 마지막으로 준 거거든.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들고 다니다가 그만 잃어버렸네.”
“……한심하구만.”
“그렇지 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나를 끌고 다니며 동시에 주변을 살피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옥가락지를 찾아 헤맸는지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여기! 여기서 우리가 막 기어 다니면서 찾았다?”
“진흙 속에 있어서 새까맸는데! 우리가 개천에서 열심히 씻었어!”
“그랬구나. 고마워.”
“정말?”
무리 중에서도 아직 어린 아이 하나는 고맙다는 내 말에 화색이 되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날 내 품에 안겨서 울었던 탓인가 묘하게 나한테 친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누가 본다면 잃어버린 가락지를 찾은 것이 내가 아니라 저 아이인 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마냥 좋아라 하는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나에게 가락지를 건네준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보지 않을 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우리가 찾아준 그거, 아가씨 거 아니지요?”
“……아, 들켰네.”
아까 받자마자 확인했다. 흠집투성이인 그 가락지는 내가 찾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옥에 난 흠집만으로 구별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땅바닥을 구르면서 다른 흠집이 얼마든지 새로 생길 수도 있으니까.
실은 내가 찾는 그 옥가락지에는 반지 두 개에 이어지는 듯한 반점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걸 말해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내가 아이들을 완전히 신뢰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릴 동정하는 거, 겁니까?”
“동정일 수도 있고. 음. 그냥, 고맙잖아. 그렇게 흙투성이가 되어서 찾아주었다는 게.”
“……날 구해 준 은인이라고 다들 열심히 찾았어요.”
“응. 고마워. 몸은 이제 괜찮아?”
“뭐. 그럭저럭.”
내가 약속한 건 사실 조금 허술한 보답이었다. 아이들이 좀 더 머리를 굴렸다면 가락지를 찾아주지 않고 계속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 더 이득이란 것도 알았을 거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눈앞에 있는 이 애는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갈 거 같았다.
“실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거지요?”
“현실적으로 말이지. 이미 시일도 꽤 지났으니까. 누군가 봤다면 집어 갔을 테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굴러갔다면 찾기 어려울 테고.”
“그런데 왜 굳이 찾으려고?”
“오빠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 거거든. 오빠에게는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내가 잃어버린다면 미안해서. 적어도 찾아보는 노력이라도 해 보는 게 도리이지 않을까 하고.”
“도리는 무슨 얼어 죽을.”
“아하하하.”
의미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조금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포기하고 있었지.’
어쩐지 궁 안에서는 하기 어려운 대화였으니까.
그리고 내 말에 짜증을 내지 않을까 했던 아이는 뜻밖에 묘한 얼굴을 했다.
“나도, 오빠 있었어요.”
“그렇구나.”
오빠가 있어, 가 아닌 오빠가 ‘있었어’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