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5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53)화(53/326)
“뭘 잘못 먹었는지 며칠을 아프다고 뒹굴다가 죽었지만.”
“혜민서에는…….”
“그땐 그런 게 있는 것도 몰랐어.”
하긴 그날 가 본 혜민서 꼬라지를 보니 갔다고 치료해 줬을지는 모르겠다.
이 시대에도 어린아이를 돌봐 주는 구휼청 같은 것이 없지는 않을 텐데. 아마 있다 해도 혜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는 힘들겠지.
‘소설에서도 남주…… 세자가 빈민구제와 고아들을 위한 법을 만들려고 하지.’
아마 여기서도 만들겠지만 그건 몇 년 뒤의 일일까.
아이들은 아직 해맑은데 나만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 가락지 주인은 왜 죽었어요? 의원을 못 부를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음…….”
솔직하게 말하면 이 애들도 무서워할 거 같은데. 말해도 괜찮을까.
내가 말을 해도 괜찮을까 고민하고 있으니 아이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을 흐렸다.
“뭐, 나 같은 애한테 말하기 싫으면 말고…….”
“호랑이한테 물려 갔어.”
“헉.”
아이가 놀라서 나한테서 후다닥 멀어졌다.
‘음. 역시 창귀 얘기는 유명한가 보네.’
눈치를 보며 다시 슬쩍 다가온 아이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나, 나 놀리려고 거짓말하는 거지요?”
“그런 거짓말을 해서 뭐 해.”
“그, 그렇구나.”
“무서우면 떨어져 있어도 괜찮아. 아, 어차피 나는 네 이름도 모르니 괜찮나.”
“누가! 누가 무섭대?!”
비장한 표정을 하고 다가왔지만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뭔가를 납득한 듯 나를 보는 눈빛이 뭔가, 미묘해졌다. 뭐랄까, 좀 불쌍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
‘대체 뭔 생각을 하길래…….’
아무래도 죽은 오빠 얘기도 그렇고 묘하게 동질감을 산 모양이었다.
“그거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요.”
“상관은 없는데.”
“상관없지 않다고요.”
혼자 중얼거리는 걸 보면 여전히 무서운데 허세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이 시대에 호랑이는 살아 있는 공포일 텐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
“너희들, 또 온 거니?”
이번에 아이들이 방문한 집에서 나온 소녀는 한숨을 쉬면서도 아이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 밥 잘 주는 착한 언니다.”
뭔가 드라마 제목 같은 타이틀의 보유자네.
“오늘은 왜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지?”
“그냥 평소대로만 줘.”
아이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대충 밥만 주고 내쫓던 사람들과는 달리 소녀는 나의 존재를 알아채고 아이들을 추궁했다.
“저기 있는 아가씨는?”
“음. 국밥 사 주는 언니?”
내가 남의 타이틀 걱정할 때가 아니었구나.
아이들은 나를 안내해 주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했지만 소녀는 넘어가지 않았다.
“너희들 혹시 순진한 아기씨를 속이고 있는 것 아냐?”
“아니야!”
아이들이 울컥해서 반박하는 걸 보니 귀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앞으로 나가 해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멀어지자 소녀는 나를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
“걸인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잘해 주지는 말아 주세요.”
“?”
“도움에 기대려고만 할 테니까요. 지속적인 도움을 줄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는 길이 될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저 아이들보다야 나이가 많겠지만 아직 어려 보이는데 꽤 단호한 태도였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대가도 교육도 없이 공짜로 받아 버릇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그대로 망가지는 법이니까.’
딱히 내가 저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고 있는 쪽은 아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소녀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제가 실수한 게 있어서요.”
“실수요?”
아이에게 한 번에 큰돈을 줘서 괜한 시비에 휘말리게 했으니 내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제 실수로 다친 아이가 있어서 아무래도 못 본 척할 수는 없네요.”
“다쳤다고요? 다치면 찾아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내 말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가 다쳤었는지 물어봤다. 지난번 다쳤던 아이를 가르쳐 주었더니, 아이를 향해 달려가 둘이 이러쿵저러쿵 실랑이하기 시작했다.
“다치면 찾아오라고 했잖아!”
“아, 아파서 정신이 없었다고! 게다가 아픈데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와?”
나는 꼬마 아이들을 붙잡아 물었다.
“이 집에 자주 찾아가는 편이야?”
“응. 음식 나눠 줘. 좋은 언니야.”
“가끔 아플 때 찾아가면 약을 주기도 해. 대신 막 일 시키지만.”
“약?”
아, 그러고 보니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탕약 냄새였군.
“집이 의원인가 보지?”
“아마도? 하지만 환자가 있는 건 별로 못 봤어.”
아이들에게 밥을 퍼 주는 것만 봐도 그렇고 집안 살림은 나쁘지 않아 보이던데 환자는 별로 없는 의원이라.
뭐 하는 사람일까 생각하며 다음부터는 꼭 찾아오라고 화내는 소녀와 시끄럽다고 성질부리는 아이의 조금 다정해 보이는 투닥거림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에 말린 뒤 인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저기, 저 애들입니다!”
“?”
우리가 지나온 골목에서 웬 사내들이 서넛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말없이 조용히 내 뒤를 따르고 있던 성윤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기씨, 저 중에 하나는 지난번 아이들에게서 돈을 빼앗던 놈들 중 하나입니다.”
음, 좋은 용건은 아니겠구나.
게다가 이번에는 나름 있어 보이는 사람도 하나 끼어 있었다.
왜 나름이냐면, 포졸 복장을 하고 있어서.
“이놈들! 너희들이 도둑질을 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네?”
이 시대에는 포졸이라도 충분히 일반 백성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도 떨리는데, 거리에서 살면서 한 번도 법에 어긋나는 일을 안 했을 거라고는 장담하기 힘든 아이들은 오죽할까.
겁을 먹고 위축된 아이들 앞에서 포졸을 위시한 사내들은 아이들이 가락지와 돈을 훔쳐 갔다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우, 우리는 안 훔쳤어!”
기세등등한 사내의 기세에 아이들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다.
‘설마 그날 성윤이 다시 가져온 돈을 아이들이 훔쳐 갔다고 생각한 건가.’
게다가 가락지에 대한 것도, 다른 구역까지 가서 찾아다녔으니 소문이 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가락지를 훔쳤다는 것이 사실인가?”
“누, 구십니까?”
갑자기 앞으로 나선 나에게 짜증을 내려던 포졸 역시, 내 행색을 살피고는 어설프게 존대를 붙였다. 편하긴 한데 신분제 사회의 이런 점 때문에 가끔 기분이 좀 묘하다.
“이 아이들에게 가락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네만.”
“네?”
“아이들이 가락지를 찾아봐 주기로 약속했고, 나는 대가로 돈을 주기로 했는데 만약 그 가락지가 훔쳐 온 것이라면 나 역시도 곤란한 일이지.”
내 말에 아이들이 울컥하며 끼어들려 하는 것을 성윤이 막았다.
“하지만, 정말 이 아이들이 가져온 것이 훔쳐 온 것이라면 그 역시 내 책임일 터이니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 줄 수 있네.”
“저, 정말이십니까?”
내 말에 사내의 얼굴이 훤히 밝아졌다.
하지만 한국 사람, 아니 조선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법.
“그래서, 찾고 있는 건 어떤 가락지인가?”
“네?”
그리고 질문이 시작되었다.
“옥가락지? 아니면 은가락지?”
“아, 그게 그러니까. 아, 옥가락지입니다.”
“색은? 흰색인가? 아니면 연녹색? 진녹색?”
“그건…….”
사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보며 나는 포졸에게 물었다.
“아까 분명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하였던 것 같은데. 만약 무고한 이를 도둑으로 몰았다면 그 죗값은 어찌 되는가?”
내 말에, 사내의 낯빛이 흐려지며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 진녹색! 진녹색 옥가락지요!”
하지만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늬는?”
“무, 무슨 무늬? 옥가락지에 무슨 무늬가…… 그런 거 없소.”
“상품(上品)의 옥이라면야 그야 눈에 띄는 무늬가 없겠지. 하지만 내가 찾던 것도, 이 아이들이 찾아준 것도 하품(下品)의 연옥(軟玉)이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옥가락지를 꺼내 보였다. 연녹색의 옥가락지.
경도가 낮은 편이라 흠집도 쉽게 나고, 색도 조금 얼룩덜룩한 데다, 잘 보면 검은 점 같은 무늬들이 보였다.
애초에 저런 길거리 무뢰배들이 옥가락지에 대해 뭐 제대로 알 거 같진 않았다.
“찾는 물건이 아닌 듯한데, 이를 어찌 책임지겠는가?”
“아니, 나는…….”
“푸훗!!”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사내를 본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이놈들이……!!”
차마 내게는 손을 올리지 못하고 만만한 아이들에게 달려들려던 사내는 당연히 내 옆에 있던 성윤의 손에 제압당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뭐?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반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아아악!”
“자꾸 우리 아기씨를 성가시게 군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외다.”
“도, 도와주시오, 형님!”
“그만두시오! 어찌 이리 무도한 짓을!”
사내는 함께 온 포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 또한 별 소용은 없었다.
“그런데 포졸 나으리는 어디 소속이시오?”
“그건 왜 물으시오?”
“아무래도 두 분이 몹시 친밀해 보여서. 혹 사사로운 일로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우려던 거라면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소?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씨?”
“이런 일로 아버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으나, 공연한 구설에 얽혔으니 말씀을 올려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나와 성윤의 연기 아닌 연기가 실감 났던지 떨떠름해하던 포졸의 얼굴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성윤의 실력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아, 아가씨! 어느 댁 아가씨이신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앞으로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특히 포졸 역시 나라의 녹을 받는 관인일진대 저런 무뢰배들과 어울려서야 되겠는가?”
“그러문요, 아가씨! 에잇! 이 못된 놈이 누구 앞길을 막으려고 이런 짓을 해?”
“아, 아이고 그만하십시오.”
둘이 쇼를 하는 것 같아 나는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만 또 이런 협잡질로 아이들을 괴롭힌다면 나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걸세.”
“예예! 명심하겠습니다. 아가씨!”
이 정도면 저놈도 더는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테지.
둘이 친밀해 보이니 관아에 넘긴다고 해 봤자 정말 위에 언질이라도 해 두지 않는 이상 그냥 적당히 풀려 나올 거 같고. 그럼 또 아이들을 상대로 괜한 화풀이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포졸은 현대로 치면 경찰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깡패나 유흥업소와 유착하는 게 뭐 그렇게 새롭고 신선한 일일 거 같지가 않았다.
‘어휴, 예나 지금이나.’
고생은 죄 없고 선량한 시민들의 몫이다.
사실 나도 얘들이 모두 죄 없고 선량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런 어린애 돈 뺏고 못살게 굴겠다고 저러는 놈들이 더 나쁜 놈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자들이 사라지고 뜻밖의 위기에서 벗어나니 아이들이 나를 보는 눈빛은 전과도 조금,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나도 아가씨처럼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저씨가 아니고?”
“아니, 왜 아저씨입니까…….”
아저씨라 불린 성윤이 약간 쓸쓸한 얼굴을 했으나 못 본 척했다.
이 시대에 그 나이가 아저씨지 그럼 뭐죠?
아이는 의외의 말을 했다.
“나도 그렇게…… 뭐라고 해야 하나, 당당하게 할 말 다 하고, 따지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으음.”
내 경우는 그야말로 타고난 배경 덕이 큰데.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내가 가락지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던 것이 생각보다 더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공부를…… 하면 도움이 되려나? 괜찮으면 우선 글이라도 배워 볼래?”
“내가? 글을? 정말?”
“한자는 어렵겠지만 훈민정음만 알아도 도움이…… 되려나.”
글자만 배운다고 똑똑해질 리는 없지만.
하지만 문득 처음에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글 익히면 일 시키기 더 좋지 않을까.’
본인들의 생활에 대한 글을 직접 남기면 더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이런 소박한 야망은 이제 빨리 귀가해야 한다는 성윤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일단 좌절되고 말았다.
나는 일단 다음을 기약하며 아이들과 헤어졌으나, 한동안은 좀 자중해 달라는 주변의 한결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음, 너무 그 아이들에게 마음 쓰는 것도 좋지 않으려나.’
의원 집 소녀의 말대로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이상 함부로 관여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장마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