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54)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54)화(54/326)
어두운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네…….”
“곧 장마이니까요.”
“다리 밑에 살고 있는 애들은 어쩌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궁 밖으로 나갈 때 나와 동행하지 않았던 가이는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애초에 지밀 궁녀는 궁녀들 중에서도 신분이 좀 괜찮은 편이지.’
왕족을 지근거리에서 모셔야 하는 데다 왕이나 세자와 마주쳐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하자면 궁녀들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화이트칼라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가이는 내가 밖에서 만난 걸인 아이들에 대해서도 송비에 비해 냉정한 부분이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나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것이니 나쁜 일만은 아니지.’
하지만 송비에게든 가이에게든 걸인 아이들에 대한 말을 다시 꺼내기가 어려웠다. 다들 내가 그런 것에 깊이 신경 쓰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나도 가능하면 신경을 안 쓰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청계천 다리 밑에서 천막치고 산다는 거잖아. 장마 때 수위(水位)가 높아지면 그럼 어떻게 하지?’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 시대 청계천은 현대 서울의 청계천과는 전혀 다르므로 그 아담한 인공 하천을 생각하면 곤란했다.
하지만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지면 수위가 올라가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였다.
봄과 초여름엔 그나마 낫겠지만, 장마철과 한겨울에는 어떻게 사는 거지.
‘당장 건강도 건강이고, 그런 데서 병이라도 퍼지면 도성 괜찮은 건가.’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나는 내 옆에서 장부 정리를 하던 가이를 불렀다.
“가이, 내 궁방전에서 나오는 돈은 어떻게 쓰이고 있어?”
“예?”
내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는 가이에게 내 뜻을 설명했다.
“걸인 아이들을요?”
“음. 비바람 피할 거처라도 마련해 주는 건 어려울까.”
아직 내 사저도 없고 말이지.
‘종친 중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괜히 빚을 만들어 두면 나중에 무슨 청탁을 받을지 알 수가 없고.’
게다가 역모 사건이 한창 정리 중이니 종친들은 한동안 어마어마하게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을 거다. 이런 식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일은 특히나.
“옹주 자가의 사재가 적지는 않으나 한도 없이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옵니다.”
“아이들이라지만 산에서 나무 정도는 주워 올 수 있고. 가르치면 짚신 정도는 삼을 수 있어.”
사실 걸인들이 아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뉴딜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아이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라도 확인하고 싶은데.”
“안 됩니다.”
“아, 안 나가. 안 나간다고.”
“옹주 자가께서 얼마나 귀한 몸이신지 잊지 말아 주십시오.”
가이는 물론이고 다른 궁녀들까지 다들 너무 간곡하게 말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성윤 겸사복을 불러서 부탁하는 것으로 타협하기로 했다.
너무 이것저것 부탁하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직업 때문인지 물정에도 밝고 신뢰가 갔다.
‘그나저나 내가 귀한 몸이었던가.’
비 오니까 밖에 나가기 싫어서 방 안에서만 뒹굴며 살았더니 약간 히키백수가 된 기분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옹주 자가?”
“안 되겠어. 뭐 먹을 거라도 만들자.”
“예!”
내가 앞장서 군것질거리를 만든다니 다들 화색이 되어 따라 나온다.
우리 처소 궁녀들이 살찌면 나 때문이 아니라 덥고 습해서 만드는 족족 다 먹어 치워야 하는 날씨 때문일 거야.
‘성 겸사복을 부르기로 했으니 먹을 거 정도는 줘야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뻔뻔하게 맨입으로 일 시킬 순 없지.
***
내가 태평한 나날을 보내는 것과 달리 세상은 좀 더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역모의 주모자들 중에는 당연히 처형된 사람도 있었고, 그들에 대한 소문도 여럿 들려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 건 역시 김선익 대감이었다.
김선익 대감의 여식이 세자빈 후보로 올랐었다는 사실이 이미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던 모양이었다.
하긴 세자의 연치라든가, 갑자기 김선익 대감의 여식을 궁으로 부른 것이나 눈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왕도 마땅한 나이대의 여식이 있는 집안에 대해 호구 조사를 하고 그중에서 김선익 대감을 골랐을 테니.’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세자빈이 될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기 위해 중궁전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중궁전에서도 지화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은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중궁전 나인들은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었지만 당시에 내가 새언니 될 사람에 대해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어보면 다들 은근히 웃는 낯을 했었다.
그건 그들의 웃전인 중전의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물론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최악이겠지만.
세자의 장인이 되면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김선익 대감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연히 좋지 않은 말이 떠돌았다.
오죽 세자가 변변치 못하면 세자빈 자리를 거부하기 위해 역모에 가담했겠느냐는 악의적인 소문이었다.
안 그래도 한때 그놈의 호랑이 소문 때문에 꺼리던 놈들이 많았는데 이어서 그런 소문까지 퍼지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당시 궁 안에서 벌어진 일은 홍 숙원이 벌인 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세자가 호환을 당했다는 사실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게 불만이면 왕한테도 시비 걸어 보든가. 원래 호환 당한 가족에게 호랑이가 찾아온다고 해서 기피하는 거 아니었나.’
게다가 그럼 나도 포함이고.
사실 궁녀들 중에서도 그런 미신을 맹신하며 떨다 무시무시한 감찰궁녀들에게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중전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보니 이런 일에 손 놓고 있지 않았고.
나는 이런저런 소문을 물어 온 송비에게 물었다.
“역당들이 추대하려 했던 왕족이 누구라 그랬지?”
“복원군 대감이십니다.”
나랑은 5촌인가 6촌쯤 되는 왕족이라고 들었는데 별로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워낙에 친척이 적지 않았다.
‘재수 없이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지.’
왕족의 경우 역당들과 얼굴 한번 마주치기는커녕 서신 한 장 받아 본 적 없는데 모르는 사이 그들에 의해 강제 추대 당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까.
사실 제일 놀라운 건 이번 역모에 가장 추대하기 좋은 위치인 경언군이 안 끼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훈훈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있었다.
“역도들이 위리안치 중인 경언군, 아니 폐서인 수에게 몰래 접촉했다고?”
“그렇사옵니다. 심지어 그들을 붙잡을 수 있게 돕기까지 했다 하옵니다.”
경언군은 이제 폐서인이므로 경언군(君)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름이 이수이니 대충 저렇게 칭하긴 하는데 딱히 그놈 얘길 할 일도 없다 보니 경언군이란 호칭이 아직 더 익숙했다.
“폐서인 이수가 돈을 받고 역도들과 자신을 접촉하도록 도운 군사들 앞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노라 대답하고 돌려보낸 뒤, 교대한 다른 군사에게 사실을 알려 당시 접촉했던 역도들을 일망타진했다고 합니다.”
“헤에.”
“전하께 버림받았다 해도 자신은 아바마마의 자식이며 신하인데 어찌 역모에 가담하겠느냐고 역도들에게 호통까지 쳤다고 칭송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고 하옵니다.”
그 소식이 한양까지 전해지기 전 역모가 발각되었으나 경언군의 미담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과연 왕자의 위엄이 있다고 칭송이 자자하다고.
물론 경언군의 인성에 대해 겪은 바가 있는 궁인들은 애매한 얼굴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이수 그놈이 폐서인이 된 과정을 백성들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나름의 변명이 있었다.
“흐응. 나에게 독을 먹인 것도 아들이 아니라 어미의 죄라 이거지. 너무 어려 어머니가 죄를 짓는 것을 몰랐던 것도 죄가 되겠느냐, 고 말이지.”
“옹주 자가.”
“아니, 내가 뭘 어쩌겠어. 다들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바마마께서도 그리 쉬이 위리안치를 거두지는 않으실 테니까.”
궁인들이야 내가 뭐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지만 조정의 일이 되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나한테는 죽어 마땅한 원수 놈이지만 부왕에게는 역시 친아들이었다.
대신들이 죽이라고 벌떼같이 들고 일어난다면 모를까. 직접 죽이는 것은 역시 리스크가 있었다. 백성들의 여론도 안 좋아질 테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내 다과상을 가지고 온 가이가 다시 그 화제를 꺼냈다.
“근래에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다고 하옵니다.”
“분위기는 여전하고?”
“예, 무엄하게도 감히 전하의 처사가 과한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나돌고 있다고 하옵니다.”
“조정에서 말이 나오는 건 그렇다 치고, 저자에서도 말이 나돈단 말이지.”
그건 이상한데.
나는 몸을 기대고 있던 사방침(四方枕)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경언군, 아니 폐서인 이수가 위리안치되어 있는 곳은 전라도라고 들었다.
도성까지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은데 백성들 사이에서 소문이 이리 빨리 도성까지 퍼질 리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자세하게, 방향성을 가지고.
애초에 궁에 있을 때도 그리 평이 좋은 놈도 아니었는데 소문만 들으면 마치 천하의 충신이고 효자 아들 같지 않은가? 실제 그놈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말이지.
‘이거, 혹시 누가 큰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는 건가.’
최근 그 나쁜 놈에 대한 여론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급격하게 좋아졌다.
심지어는 대신들 사이에서도 지난번 처분이 과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성원 세자의 예장 중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오로지 홍 숙원이 저지른 일이지 아직 어린 그 자식의 죄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내가 정치에 관여할 위치도 나이도 아니지만 그놈이 다시 편히 사는 꼴은 못 보겠는데.”
“옹주 자가. 마음을 편히 가지시옵소서. 어찌 그런 망극한 일이 일어나겠사옵니까.”
“아니. 원래 설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꼭 뒤통수를 맞는 법이거든.”
설마가 사람 잡지. 원래 세상일은 상식으로만 논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저쪽이 고의적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면 피해자인 내 입장에서는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저놈이 정말 일부러 독을 먹이려 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는데 그냥 넘어가라고?
‘하지만 내가 그 사실을 알고도 곶감을 먹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건, 누가 생각해도 어린아이가 할 법한 일이 아니니 도리어 진위를 의심받을 터였다.
당시에 이미 홍 숙원이 한 일이라고 결론지어진 일이었다. 경언군의 지시였다는 천한 궁녀 한 명의 증언보다는 모두들 홍 숙원의 자백을 더 신뢰했다.
여론을 바꿀 방법이라.
“……이쪽도 소문이나 퍼트릴까.”
“예?”
내 말에 가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수 그자가 어떤 놈인지는 궁 안에 있던 사람들이 더 잘 알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옹주 자가.”
“나는 아직 기억해. 그놈이 날 연못에 집어 던진 거.”
“!!”
가이의 얼굴이 당황한 듯 굳었다.
그럴 만도 하지. 워낙에 어릴 적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 이후로도 딱히 연못을 꺼리거나 물을 싫어하는 반응을 보인 적도 없었다.
다들 내가 잊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기에 그 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 있었고, 나 역시 주위에서 걱정하는 것을 알기에 그동안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충격적인 일이라면, 아주 어릴 때 일이지만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심심하면 동물 학대해서 뿌리고 다녔지? 이건 아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건.”
총애를 잃고 갇혀 지내는 숙원과 왕자군.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리 보일까 봐, 새로 들어오는 궁녀들에게도 괴담처럼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다들 엄격하게 입단속을 교육받는지라 그리 소문이 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여론전이면 동궁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좋지. 괜히 제 자리를 지키려고 형제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까.’
이수 그 쓰레기 새X가 왕자군 시절 동생이었던 지금의 세자를 학대한 사실은 세자의 이미지에 좋지 않으니 이대로 숨기는 게 좋을 것 같고.
피해자에게 도리어 흠을 잡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시대가 시대이고, 세자의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괜히 나약한 인상을 주는 것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궁인들만으로는 조금 약한데.”
순간 성윤 겸사복이 떠올랐지만, 그 사람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일이었다.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고의로 내는 발소리가 들리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내게 용건을 고했다.
“옹주 자가. 동궁 처소의 문 상궁이 세자 저하의 일로 들었사옵니다.”
“무슨 일이라더냐.”
“옹주 자가께 직접 고하고 싶다 하옵니다. 어찌 하올까요.”
세자가 성질을 부리고 있다거나, 신경이 예민해져 끼니를 거르고 있을 때 동궁 궁인들이 나를 찾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주로 나인을 통해 나에게 말을 전하지 직접 고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오늘은 뭔가 좀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들라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