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5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57)화(57/326)
독을 동물들에게 시험해 보았겠지.
만약 폐서인 홍씨라면 그런 증거들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놔두진 않았을 거다.
후궁의 누군가에게 독을 쓴 적이 없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때까지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는 조심스러운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진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야 이수 그놈이 정말 독을 넣으라고 지시하는 걸 목격한 사람이고.’
하지만 내가 독이 있는 걸 알고 먹었다고 하면 괜한 역풍이 불 수도 있으니까.
아마 독을 넣은 놈보다도 독이 있다는 걸 알고 먹은 나에 대한 안 좋은 말이 더 커지지 않을까?
당시 고작 여섯 살의 어린아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먼저 의심하겠지만. 믿든 안 믿든 어린 것이 소름 끼친다고 할 것이 뻔했다.
명명백백한 가해자보다도, 어딘가 흠결이 있는 피해자가 더 욕을 먹는 건 현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시대라고 다를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도 나에 대한 평가는 많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고작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가 대신들을 이리 심장 뛰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래서야 무서워서 며느리로 들이기 싫다고 여기저기서 뒤로 뺄지도 모르겠네.
생각해 보니 그건 좀 좋은 거 같기도 하군.
‘애초에 궁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경언군이 시켰다는 증언이 안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당시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 자세한 것까지는 모른다.
그 끔찍한 문초 과정을 어린아이에게 자세히 말해 줄 사람도 없었고.
다만 당시 고작 열세 살이었던 경언군이 동생을 해하려 했다는 것보다는 그 어미인 홍 숙원이 했다는 편이 모두에게 더 납득이 가는 결론이었을 거다.
게다가 대비도 경언군을 살리고 싶어 했고.
왕은 내 대답에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했으나 나를 질책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물었을 뿐.
“혹시 세자가…… 너에게 시킨 것은 아니더냐.”
“송구하오나 소녀가 오라버니의 말을 그리 잘 듣는 여동생은 못 되옵니다.”
“……그래, 그랬었지.”
허탈하게 웃던 왕은 그저 내 머리를 한참을 쓰다듬으며 조금 서글픈 눈을 했기에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
폐서인 이수에 대한 소문이 쉬지 않고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다.
처음에는 미담이, 다음에는 악평이 차례차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하나뿐인 미담은 멀었고, 온갖 악평은 여기저기서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얄궂은 일이지만, 누구나 미담보다는 자극적이고 잔인한 소문을 퍼트리며 욕하는 걸 더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재 궁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격담들은 신빙성도 높고 자극적이었다.
궁에서 숙식하는 궁녀들과는 달리 출퇴근제로 일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궁도 사람 사는 곳이니 소문을 엄히 단속하지 않으면 쉽게 퍼진다. 본래 이를 엄히 단속해야 할 중궁전에서도 의도적으로 입단속을 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으니 효과는 충분했다.
“요즘 분위기는 어때?”
“폐서인 수에 대한 처분이 과하다 주장하던 대신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하옵니다.”
“흐응.”
어쩌면 내가 곶감 같은 거 안 보냈어도 괜찮았던 거 아닌가 싶지도 한데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 봤자였다.
도리어 역당들이 위리안치된 죄인에게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져 해당 지역 수령과 기타 등등 관계자들 목부터 날아갔다더라.(죽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뜻밖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뭔데?”
가이가 드물게 말을 아끼기에 추궁했더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폐서인 이수를 처형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
거기까진 기대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이거 너무 빠른데?
“사실 역당들이 죄인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겠사옵니까.”
“음.”
그건…… 그렇네.
분위기가 급속도로 좋아져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원래 역도들에게 왕으로 추대되는 왕족=왕권에 도전하는 위험분자라는 뜻이라 죄가 없어도 사약을 받는 법 아니던가.
“대부분 옹주 자가께서 보내신 계란밀떡을 받은 대신들이라고 하옵니다.”
“으음.”
뭐, 그거 받았다고 마음을 바꿨다기보다는 그냥 원래 성향이 그쪽인데다 나나 세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걸 확인하고 더 당당해진 거겠지.
“대신들에게 곶감을 보낸 일로 옹주 자가에 대한 여론이 어찌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부정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모양이옵니다.”
“어떤데?”
“그것이…….”
송비가 돌려 말하긴 했는데 요약하면 나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아졌다고 했다.
‘아, 그런가. 어머니를 죽인 원수가 무사히 돌아오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건 꽤 공감도가 높은 감성이니까.’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복중에 있었을 동생을 잃고, 본인은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매기까지 했다. 심지어 더 어릴 적에도 그 원수에게 죽을 뻔한 경험까지 있었다.
그런 어린아이가 원수(혹은 원수의 자식)이 풀려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대신들에게 과자 보내기였다는 식으로 해석된 모양이었다.
대신들에게 어찌 말을 전해야 좋을지도 몰라 그저 고사리손으로 나름 귀하다는 과자들을, 그것도 돌아가신 생모가 생전에 좋아해서 아이가 직접 만들곤 했다는(오해다! 송비가 만들었다!) 과자를 찬합에 넣어 그나마 안면이 있는 부인들에게 보낸 어린아이…….
“…….”
정리해서 듣고 보니 확실히 안타깝고 눈물 나는 이야기였다.
‘아마 내가 보낸 곶감을 받은 대신들의 생각은 좀 다를 거 같긴 한데…….’
그렇게 백성들에게 나는 가엾고 불쌍한 아이가 되어 있었고, 그들은 나 대신 폐서인 모자를 향해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백성들은 날 걱정할 처지가 아닐 텐데.’
내가 비록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을 겪었어도, 하루 5끼에 꼬박꼬박 간식까지 챙겨 먹고, 내키는 대로 비단옷 꺼내 입고, 더우면 부채질 받으며 얼음 띄운 화채 먹고, 추우면 솜옷 입고 털옷 입고 온돌방에서 지지고, 좋아하는 도자기 모으고 골동품 수집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착하게 살아야겠는데…….”
“예?”
“아무것도 아냐.”
나는 아직도 멈추지 않는 장대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장마는 꽤 길어질 모양이었다.
‘돈 많은 백수의 삶이 좋긴 해.’
방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가져오는 밥만 먹으며 뒹굴 수 있으니.
권력자들도 이 비를 뚫고 출퇴근을 해야 할 텐데 말이지.
문득 도망친 지화와 수천이 떠올랐다.
‘잘 살고 있을까.’
수천은 몰라도 지화는 분명 언젠가 한양으로 돌아오겠지?
아마 이번 역모에 대해 무슨 음모가 있었는지 확인하려 할 것이다.
지금은 나도 세자도 어리고 힘이 없어 진범을 찾아내긴 어렵겠지만 그때쯤이면 폐서인 된 이수를 다시 왕자군으로 만들려 한 자들(추정)을 잡을 수 있으려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궁녀들을 불러 나갈 채비를 했다.
목표는 동궁전이었다.
***
“그래서 뭐 하러 온 건데?”
“미래의 새언니, 세자빈을 위한 시누이의 노력?”
“분명 내 얘기일 텐데 무슨 얘기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 것 같으냐……?”
일전과는 달리 서연관들도 없이 평온했으므로 세자와 나는 편안한 말투로 대화할 수 있었다.
“이유는 됐고, 일단 먹자. 내가 만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 으응.”
내가 권하자 세자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젓가락을 들었다.
내가 만들어 오는 음식은 언제나 프리패스였으므로, 평소에는 기미하느라 식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세자는 내가 해 오는 음식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온다고 전을 부쳤구나.”
“파전이야.”
기름진 음식이라 몸에 좋은 건 아니지만 애가 요새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가, 살이 내려서.
‘다음에는 고기 요리를 좀 해 볼까.’
세자가 먹을 음식을 해 오면서 동궁전 사람들이 먹을 것도 넉넉히 준비했더니 여기저기서 칭송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마침 비가 오니 전을 먹고 싶었다고 다들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흐뭇했다.
“비 오는 날에는 파전에 막걸린데.”
“너 지금 뭐라 그랬느냐.”
“그런 말을 들었다고. 자, 따뜻할 때 많이 먹어.”
세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나는 못 들은 척 젓가락을 들었다.
아무리 이 시대엔 아직 음주 연령 규제가 없다지만 그래도 아직 여덟 살인 내가 막걸리를 먹겠니.
믿기 힘들겠지만 우리는 마치 민가의 오누이처럼 함께 파전을 나눠 먹고 있었다.
“파전에 고기도 넣은 것이냐?”
“응. 해물 넣고 싶었는데 계절이 계절이기도 하고.”
“해물을?”
“응.”
동래해물파전이 유명한 건 역시 바닷가라서겠지…….
‘나중에 해안가 마을로 가서 해물파전 해 먹을까.’
한양에서 해물을 아예 못 먹는 건 아니지만 역시 여름철은 좀.
나도 좀 크면 파전에 막걸리 먹어야지.
짧았던 음주가무의 시절이 조금 그리웠다.
“아.”
“왜 그러느냐?”
“아니, 생각난 게 있어서.”
다시 태어난 후론 워낙에 술과 거리가 있는 생활을 해 와서 막걸리의 존재도 잊고 살았는데 덕분에 좋은 게 생각났다.
“역시 기름진 음식은 몸에 좋지 않지…….”
“그거 지금 먹이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야?”
“다음에는 좀 더 가벼운 음식을 만들어 올게.”
“그래. 기대하마.”
세자는 여전히 지친 낯이었지만 내가 가져온 음식을 사양 않고 먹었다.
얘가 입맛이 없는 것도 문제인데 거기에 음식 만드는 사람까지 가리는 게 영 걱정이었다.
‘남주가 이렇게 까탈스러우면 곤란한데.’
물론 요리는 전문가가 알아서 해 오겠지만 저러다 여주가 주는 것도 거부하는 거 아닐까?
아니, 남주가 그럴 리 없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는지 세자가 수상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너 또 무슨 이상한 생각하지.”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나는 화제를 바꿔서 조금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내가 곶감 보낸 걸로 아바마마께서는 뭐라고 안 하셨어?”
“당혹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만……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이 부자 관계도 참 여전히 애매하네.
왕이 일관되게 성원 세자에게만 총애를 집중했었던지라 다른 왕자군들에게는 또 똑같이 선을 긋고 대한 탓에 이제 와서 어떻게 친해지긴 어려워 보였다.
‘총애도 총애지만, 다른 왕자와 후궁들이 괜한 마음 먹지 않도록 일부러 그런 것 같지.’
아마 내 생모가 아들을 낳았어도 나에게 하듯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열심히 젓가락을 놀렸더니 어느새 접시가 비었다.
“음식은 잘 먹었으니 이제 그만 가 보거라.”
“응. 오라버니도 일찍 자.”
세자는 내 말을 허투루 듣고 허허 웃었다.
“읽어야 할 책이 있으니 그건 어려울 것 같구나.”
“눈 나빠져! 키 안 커! 살쪄!”
남주에게 비주얼이 얼마나 중요한데!
나의 비통한 외침을 알아듣지 못한 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네가 어마마마보다 더 엄격한 것 같구나.”
그건 내가 지금 혈육의 눈이 아닌 독자의 눈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남주야.
“나중에 세자빈보다 작은 남편이 되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신하들보다 작아서 올려 봐야 하면 기분이 참 좋으실 겁니다. 오라버니.”
“이 무슨 악담이더냐…….”
떨떠름한 얼굴의 세자에게 나는 재차 당부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니 새겨들어라.
“잠을 잘! 자야! 키가 크거든요. 영양을 고루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과 수면을 취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조선에서 나만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도 없을 거 같은데.”
그야 세자의 하루 일정이란 게 무서울 정도로 규칙적이고 빡빡하긴 했다.
이러니 조선 시대 세자들도 탈선하거나, 병약해지거나 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통성 있는 세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도 은근히 드물고 말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는 물러나며 문 상궁에게 당부했다.
“문 상궁. 오라버니께서 또 늦게까지 침수 들지 않으시거든 날 찾아오거라. 내가 강제로 재워 드릴 터이니.”
“예, 옹주 자가.”
내 말에 문 상궁이 농인지 진담인지 모를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세자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문 상궁은 대체 어느 처소 소속인 게냐.”
“소인은 그거 세자 저하를 걱정할 따름이옵나이다.”
문 상궁의 말에 나는 세자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대. 밤에 잠 좀 자. 얼굴이 영 아니다.”
“……그래.”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아마 그 미친놈이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겠지.
물론 지금은 분위기가 반전되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나도 한동안은 밤잠을 설칠 것 같지만.’
그리고 모든 것은 왕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