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6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63)화(63/326)
그냥 대소신료들한테 ‘니들은 하는 게 뭐냐’고 압박 가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줄 알았지.
나는 부왕을 너무 냉정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아 약간 반성했다.
“혼인을 일찍 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금 부마 후보라고 해 봤자 다들 어린애들일 텐데.
내가 일찍 결혼하면 걔들이…… 남자로 보이겠냐.
의도치 않은 범죄자의 기분이지.
‘생각해 보면 나한테는 지금 여덟 살인 놈이나, 네 살인 놈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양심적으로(?) 신생아는 뺐다.
지금 결혼하면 그거 결혼이 아니라, 조카 입양하는 기분일 거 같은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른 법이니 다른 집안에서도 사윗감으로 탐내지 않겠느냐. 물론 옹주인 너와 혼인하면 자연히 장래에 출세가 보장되는 셈이니 바라는 집안도 적지 않단다.”
“흐음.”
세자빈 자리도 그렇게 폭탄 돌리기 하듯이 보는데 나를? 과연 그럴까?
그야 물론 부마도위는 세자빈처럼 목숨을 위협받거나 고생하지는 않겠지만.
“아.”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났다.
세자에게는 세자빈이 없었던 이유.
분명 지금 전개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원작에서도 여주의 탈출 이후 세자는 당연히 세자빈을 맞아야 했으니 세자빈 후보가 있었다.
하지만 세자는 결국 여주와 만날 때까지 세자빈을 맞지 못했다.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중전의 사망과 새 중전의 등장으로 미뤄지고 미뤄진 탓도 있었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새로운 세자빈 후보는 사가에서 식사 중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쓰러져 생명의 위협을 겪는다.
그리고 그 이후, 세자빈이 되겠다고 나서는 집안이 없었던 것 같다.
거기까지 떠올린 나는 잊고 있었던 사실도 떠올렸다.
‘어라, 그럼 이번에 새로 뽑을 세자빈 후보도 위험……하지 않나?’
위험하……겠지? 아마?
‘다음 세자빈이 어느 집 딸이었더라.’
내가 그나마 기억하고 있던 것은 다음 세자빈 후보가 병판의 딸이었다는 정도다.
그 외에는…… 어쩌면 그 죄 없는 아가씨와 내가 비슷한 처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
‘세자빈 후보였던 그 아가씨가 먹은 독은 경언군이 보낸 거였으니까.’
어쩌면 소설에서 그 아이가 먹은 독은 경언군이 세자에게 보낸 독과 같은 독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소설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막을 수나 있을까?
나는 아직도 작기만 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누군지도 모르는걸.’
사실 주인공들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조연 이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병조판서라는 익숙한 관직 정도나 겨우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조정의 구도가 원작 소설과는 또 많이 바뀌었으니 그조차도 믿을 수 없다.
소설 속에선 당시 경언군과 그 세력이 건재했으니까.
일단 반역까지는 소설과 똑같이 일어났으니, 세자빈 얘기가 다시 나오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되려나,
‘그 아가씨도 나처럼 독을 먹고 쓰러지니까. 만약 다음 세자빈 후보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면 신변을 보호하도록 해야겠는데.’
내가 독을 먹은 전적도 있으니 어떻게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세자빈 얘기는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다른 건 제쳐 두더라도 대비가 경언군 일로 저렇게 삐져 있으니 아무래도 지금 세자빈 간택을 강행하긴 어려웠다. 괜히 말을 꺼냈다간 혼인도 못 하고 갇혀 지내는 경언군이 가엾지도 않냐며 역정을 낼지도 몰랐다.
지금 위리안치라 말이 안 나오는 거지 유배 간 왕자도 왕자라고 대부분 때가 되면 혼인시키는 모양이라 경언군 몰락 당시에 후다닥 다른 집이랑 혼사 맺은 집도 많았다고 들었다.
‘일단 한동안은 좀 조용히 지낼 수 있으려나.’
왕실이 평온하지 못하면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몰래 외유하기가 힘들다고.
굉장히 불량 청소년이 된 기분이었으나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
겨우 소란스러운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걸인들의 거처가 새로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사비로 걸인들의 거처를 만든 일로 인해 까이게 된 신료들이 나와 비슷한 형태의 빈민 구호소를 만들어 지원하기로 결정했나 보더라.
‘음. 잘되면 좋겠는데.’
어떤 이유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그쪽은 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조건이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잘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거기까지 신경 쓰기도 힘들고.
어차피 나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갈 생각이었다.
“옹주 자가. 꼭 직접 나가셔야겠사옵니까.”
“음. 이건 내가 직접 가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소인이 대신 가서 옹주 자가의 뜻을 전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다.”
“아냐. 나도 한참 못 봤으니까.”
게다가 아마 가이나 송비가 전달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얼굴 보고 하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울 거다.
‘궁으로 부르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좀 그렇고.’
오랜만에 적아를 타고 가이와 함께 궐 밖으로 나오니 전에 나왔을 때와 달리 날이 시원해져서 이제 밖을 돌아다니기에도 훨씬 좋았다.
가을이 말 그대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던 전생과 달리 여기 가을은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성 겸사복은 왜 따라 나왔어?”
일 안 해?
나의 의문에 성 겸사복이 넉살 좋게 웃으며 답했다.
“옹주 자가의 일을 우선시하라는 전하의 전교가 있으셨습니다.”
언제??
전에 내가 애들 거처 만들어 준 거 고할 때겠지만 그걸 나한테 말도 안 하다니.
나는 조금 뾰로통해져서 성 겸사복을 쏘아보았다.
“그럼 나 밖으로 나간 것도 다 보고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옹주 자가의 명으로 일을 보러 나왔을 뿐입니다.”
“으음.”
물론 겸사복이 있으면 여러모로 편하긴 하다.
적아가 자꾸 거리를 두는 것만 빼면.
성 겸사복도 자꾸 거부당하는 게 신경 쓰이는지 나에게 물었다.
“적아가 왜 이리 소인을 싫어하는 것인지 혹 아시옵니까?”
“원래 커다란 남자와 낯선 사람을 싫어해.”
사실 많은 동물들의 공통점이긴 하지.
그래도 나름 어릴 적부터 봐 온 세자나 사복시의 어린 서리들에게는 유했다.
처음에는 학대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일단 밝혀진 바는 없었다.
고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다행히 적아는 나를 잘 따랐고, 옹주가 탈 말이니 사람을 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부왕도 세자도 모두들 흡족해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긴 지난번에 도망치던 역적의 잔당도 멋모르고 적아에게 올라탔다가 그대로 낙마당한 걸 보면 확실히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동대문 밖의 작은 촌락이었다.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목적한 곳에 도착했으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 집이 맞지? 비어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여기가 맞을 겁니다. 잠시 어디 나간 걸까요.”
“연통 없이 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집 주변을 살피는 동안 성 겸사복이 자청해서 주변을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소인이 주변에 있는 다른 집에 수소문해 보고 올 터이니 예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응.”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서민들이 사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작다고는 하지만 작은 텃밭도 있고 마당도 있었다. 닭을 여러 마리 키우는지 멀찍이 조금 큰 닭장도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우물이 하나 보였다.
‘궁에서 살다가 이런 곳으로 오면 적응하기 힘들겠지?’
그래도 집에서 멀지 않은 우물이 있는 걸 보니 그나마 지내기 좀 괜찮을 것 같았다.
호기심에 우물가로 가 보니 그 뒤로 길이 있어 또 다른 건물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혹시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면 집주인의 행방을 알지 않을까 싶어 다가가니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는 줘도 괜찮지 않으냐. 혼자 사는 여자가 돈 쓸 데가 어디 있다고.”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네가 지밀 궁녀로 들어가 앞으로 돈 걱정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리 일찍 출궁할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
“그간 제가 궁에 있는 동안 가져간 돈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악!”
싸우는 중 같은데 이걸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여인 쪽이 쓰러지는 소리에 모르는 척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목소리가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가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민 상궁 마마님?”
“!”
내 생모 윤 숙의의 지밀상궁이었던 민 상궁과는 오랜만의 재회였건만 아쉽게도 썩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사내는 움찔 떨었으나 이쪽이 여인들뿐이라 그런가, 곧 안심한 얼굴이었다.
“자, 자네가 왜 여기…… 헉?!”
그리고 가이를 알아보고 당황한 민 상궁은 곧 가이 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입만 뻐끔거리는 걸 보면 옆의 놈에게 내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고. 조심하지 않고. 허허, 우리 민 상궁 마마님과 아는 사이이신 걸 보니 항아님들이신가 봅니다.”
“?”
사내는 우리를 의식한 듯 서둘러 민 상궁을 일으켜 세우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마마님의 오라비 되는 사람인데 요즘 조금 사정이 안 좋아서 동생에게 아쉬운 소리를 좀 하던 중이었습니다.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웃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투실투실 늘어진 살에 웃는 얼굴은 부어 있고 붉게 충혈된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는 게 딱 봐도 주색잡기와 도박에 빠져 있는 얼굴이다.
겨우 일어난 민 상궁의 얼굴에 수치와 모멸감이 함께 떠오른다. 이런 가족이 있다는 걸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텐데.
“됐으니 빨리 가시오!”
“아니, 내가 인사라도 드려야지. 우리 민 상궁 마마님을 찾아오신 분들이 설마 빈손으로 오셨겠어?”
빈손으로 왔는뎅.
민 상궁은 우리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사내의 팔을 애써 잡아당겼으나 허사였다.
“아, 알았으니 그만…….”
“항아님들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갑자기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한 사내는 움찔 몸을 멈췄다.
어느새 돌아온 성 겸사복이 우릴 찾아온 모양이었다. 저보다 위협적인 인물이 나타나자 사내는 태도를 바꿔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아니, 아니 난 그냥 인사를 좀 드리려고. 크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항아님들.”
응, 그럴 일 없어.
후다닥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민 상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물어봐도 무슨 일인지 알 거 같아 조금 서글펐다.
남자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민 상궁.”
“아기씨…… 아니, 옹주 자가께서 예까지 어인 일이시옵니까?”
성 겸사복이 데려온 건지 익숙한 얼굴의 나인들도 나를 알아보곤 고개를 숙였다.
내가 오늘 찾아온 건 죽은 숙의를 모시던 궁녀들이었다.
내가 옹주로 책봉되고는 처음 보는 건데도 호칭 적용이 빠른 걸 보니 역시 지밀상궁다웠다.
궁녀들은 모시던 주인이 사망하면 일단 궐 밖으로 나가게 된다.
중전이나 대비를 포함해 왕족들이라면 3년 상을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숙의의 경우 후궁이었기 때문인지 숙의를 모시던 궁녀들도 1년간은 고생을 해야 했다.
‘원래 조선 시대 때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다가 일단 나는 법적으로 중전의 자식인 셈이라 그렇게까지 상을 치르진 않았지. 당시에 워낙에 아프기도 했고.’
상궁쯤 되는 궁녀는 오랜 교육을 거쳐 길러 내는 전문 인력이니 상이 끝난 후 다시 궁으로 부르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궁 안에 왕족도 많지 않고 딱히 궁녀가 많이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인지 아직 다시 부르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게다가 숙의 처소의 지밀 궁녀들은 주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오명도 쓰고 있어서 아마 어지간해서는 다시 궁에 들어오기는 요원해 보였다.
피해자 중 하나인 내가 보기에도 딱히 궁녀들 탓은 아니었지만 꺼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아마 몸을 바쳐 주인을 보필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당시에 가이를 비롯한 내 궁녀들이 몸 바쳐 나를 보호했던 것과 더 대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조금 씁쓸한 일이었다.
“일단 좀 들어가서 얘기할까?”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지만 나는 일단 그렇게 권했다.